# 85
85화 이매망량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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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며 밤이 찾아 왔다. 바깥에서 서성대던 사람들은 제풀에 지쳐서 모두 떠나버렸고 그나마 몇 명의 근성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서 현찬을 만나려고 했지만, 이 동네가 어디 평범한 동네인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 시간에 이곳에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부자들과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경비원들이 돌아다니면서 현찬의 집 앞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들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가득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한산하게 변했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났는걸. 이사 온 보람이 있어.”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멀리서부터 언제 현찬을 만나러 갈까 망설이는 손님도 기회를 잡고서 찾아올 수 있었으니까.
밤이 깊어졌고 주택가 주변의 도로에 놓인 가로등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느덧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틈새로 별들이 빼꼼 얼굴을 내미는 중이었다. 떠오른 달은 거의 만월에 가까웠다.
현찬은 베란다로 다가가 쳐놨던 커튼을 확 거두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덩치가 큰 남성이 우뚝 서서 현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m는 넘어 보이는 덩치는 현찬이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더 거대했다. 각진 얼굴에 턱선은 굵으면서도 인상은 매우 순해 보였는데 딱 강윤이 저 남자와 비슷한 과였다.
그는 현찬과 눈이 마주치자 거대한 몸을 수그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환몽촌(幻夢村)의 도깨비 달걸이라고 합니다.”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귀인(貴人)의 존대는 불편합니다. 하물며 위대한 존재의 계약자이신데 하대가 편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게.”
저쪽에서 저렇게 말해주니 현찬으로서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헤르메스는 자연스럽게 영체로 변해 현찬의 주변을 부유하는 중이었다.
“귀인께서는 제가 찾아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물론 예측은 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저렇게 이매망량이 직접 나타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예전에 황설영이 나름의 경고를 해 준 덕분에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어서 크게 놀라지 않았을 뿐, 지금도 속으로는 적잖게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도깨비라고 해도 사람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네.’
현찬이 생각하는 도깨비는 호랑 무늬 팬티에 이상한 방망이를 쥐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달걸은 조선 시대 의복을 곱게 차려입은 평범한 차림새였다.
“나를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것은 귀인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움이라면?”
“의문의 조직이 저희 마을을 잠식하려고 듭니다. 저희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데 우연히 위대한 분의 계약자인 귀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현찬이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신의 힘을 다룬 시점에서 도깨비들을 비롯한 다양한 요괴들은 현찬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세상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그들은 가만히 숨죽인 채 동태를 살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이제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온 것이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현찬은 모든 이매망량이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쪽에서 이렇게 동맹제안을 요청한 것이고 도움을 구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얌전하던 이매망량이 현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일까?
“다른 존재들이 개입했군요.”
현찬의 말에 달걸은 그것이 분하기라도 한 것인지 입술을 깨물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존재. 정확히는 다른 조직이 이매망량인 그들을 습격 혹은 회유하여 무언가 일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 놈들의 목적이 뭐죠?”
“<난제>의 정복입니다.”
“음.”
현찬 또한 사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실력은 S랭크 헌터를 뛰어넘은 현찬에게 있어서도 <난제>라는 것은 매우 함부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녀석이었으니까. 특히나 한국에 존재하는 그슨대 <어스름달>은 더욱 그러했다.
등장과 동시에 강원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후에 기약 없는 수면에 빠져든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유일한 <난제>인 어스름달.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르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원래라면 얌전히 있어야 할 녀석이었지만 <심연> 사태에서 현찬이 제우스를 강림시킨 이후로 녀석은 잠에서 깨어났다.
세계의 흐름이 부분이나마 가속화했고 동남아와 동북아 주변의 <난제>가 조금씩 꿈틀거리며 똬리를 틀던 대가리를 짓쳐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총 4마리나 되는 <난제>가 머지않아서 움직일 것이다.
한국의 어스름달.
일본의 십미천호(十尾天狐)
중국의 천흉(天凶)
그리고 동남아 해역의 대붕응자조(大鵬鷹子鳥)
지금은 이 넷뿐이지만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다른 <난제>들이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귀인이여.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재차 상체를 꾸벅 숙이며 필사적으로 간청하는 달걸을 보며 현찬은 옆에 놓인 테레이오스테를 챙겨 들었다.
“좋아.”
“……!”
현찬의 대답에 달걸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저, 정말입니까?”
“물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도, 도움을 요청한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귀인께서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어떻게 보면 현찬이 정의로움에 가득 차서 달걸을 도와주려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현찬의 개인적인 목적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현찬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도 <난제>를 뿌리 뽑는 것이었으니까.
미래에 닥쳐올 2차 <대통합>을 대비해서 이 세계에 <난제>는 오히려 암 같은 존재였다. 놈들이 존재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훗날 다가올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놈들이 직접 움직인다면 그 피해는 무시무시할 터.
[우리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놈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해야 한다.]
‘알고 있어. 아테나.’
현찬도 세상의 진실을 안다.
아마 나머지 오버랭크 헌터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를.
‘뭐, 나도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욕심도 있으니까.’
<난제>를 클리어한다면 현찬은 S랭크는 커녕 바로 그 이상인 오버랭크로 등급이 올라갈 것이다. 굳이 귀찮게 세계헌터협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의 시험을 치르며 온갖 다양한 업적을 쌓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것 보다는 <난제> 하나를 잡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지름길이니까.
그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 녀석들도 막아낼 겸 말이야.’
이번 환몽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어떠한 일인지 현찬도 예상이 가는 바였다.
세계의 이면에 숨어 지내는 이매망량들과 접촉할 정도라면 어지간한 조직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현찬이 알기로 그 정도 수준에 근접한 조직은 딱 하나였다.
‘간다면 그 빌어먹을 새 가면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니, 어쩌면 다른 가면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놈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알아낸다면 더욱 금상첨화이리라.
현찬은 조금 기대감에 부푼 가슴을 안으며 떠날 채비를 끝냈다.
“에크티. 가자.”
“네. 현찬님.”
앞으로 벌어질 싸움을 위해서 현찬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활용해야 했다. 그렇기에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황금인형] 에크티를 단순한 가정부 역할로 소모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 또한 엄청난 전력이었으니까.
에크티가 테레이오스테에 흡수되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달걸은 허공에 커다란 가마 하나를 소환하여 그것을 어깨에 얹었다.
성인 남성 5명이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것 같은 크고 화려한 가마를 한 손으로 드는 모습에 역시나 달걸도 범상치 않은 도깨비임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모든 도깨비가 기본적으로 저 정도의 실력을 갖췄거나.
“제가 모시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가마를 준비했습니다.”
“아 참. 간다면 나 혼자 가지는 않을 거야. 따로 부를 사람이 한명 더 있거든.”
“네?”
다른 사람 한명을 더 부른다는 말에 달걸이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현찬을 모셔오는 것이지 거기에 괜한 짐덩이가 더 늘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현찬은 그런 달걸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너무 그렇게 껄끄러워하지 마. 아마 내가 부르는 사람이라면 너희도 나름 인정할 테니까.”
“예?”
달걸은 현찬의 호언장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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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걸은 가마를 지고서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다. 특히나 그는 도술에 능통해 있어서 축지법을 이용해 쭉쭉 나아갔다. 울퉁불퉁한 숲을 가로질러 달리는데도 가마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쾌적했다.
“예?”
빠르게 움직이는 가마에 앉은 황설영은 아직도 자신이 가마에 타고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한 듯싶었다. 평소라면 조금의 이야기만 듣고도 상황을 이해하는 그녀의 총명한 머리가 이번만큼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애초에, 아닌 밤중에 현찬에게 전화가 와서 ‘설영씨가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시점에서, 그녀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버버 거리며 얼굴을 붉히고서 잔뜩 긴장한 채 무언가를 기대하는 황설영과 만나서 바로 가마에 태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것이 조금 전이였다.
얼굴을 붉힌 황설영은 지금 현찬인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헤르메스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현찬이 너 은근히 선수 기질이 있구나.]
‘그건 무슨 소리야?’
[흥! 모르면 됐어.]
새침하게 말하는 헤르메스는 고개를 픽 돌려버렸고 현찬은 대체 헤르메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황설영씨. 다시 한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저희는 도깨비들을 도우러 환몽촌(幻夢村)으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네, 네?”
황설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와 계약을 맺은 영령인 <두두리>는 환몽촌이라는 이야기에 잔뜩 들떠서는 황설영의 평정심을 요구하는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저희들은 <난제>를 해결하러 갑니다.”
“네?! 하, 하지만 저희 둘로는 무리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협회에 연락을 취해서 다른 헌터들의 지원을 더 받는 것이…….”
황설영의 말은 결국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현찬이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설영 씨도 알지 않나요. 어스름달의 능력이 무엇인지.”
“…….”
어스름달이 제대로 힘을 발휘한 적은 없지만, 녀석은 기본적으로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 누군가는 그런 어스름달을 보며 검은 슬라임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대군에 매우 특화된 몬스터라는 것이다.
괜한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갔다가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이런 녀석일수록 소수정예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 그래도 도움을 요청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황설영은 랭크가 높아서 어스름달의 위험성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걱정에 현찬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괜찮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는 이미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까요.”
“네?”
“저기요.”
현찬은 어느덧 멀리서부터 보이는 신비로운 마을의 풍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깨비들을 포함한 다양한 이매망량. 저들이 저희들을 도와줄 겁니다.”
“저들이 저희를 쉽게 도와줄까요?”
기본적으로 이매망량은 사회의 이면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매우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두두리의 계약자이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저쪽에서 도와달라고 저를 불렀는걸요.”
“그, 그래도.”
“아니면…… 뭐, 그렇게 만들면 되죠.”
마치 목마르면 물을 마시면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대답을 꺼내놓는 현찬을 보며 황설영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안 되면 그렇게 만들다니. 이매망량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인 줄 아나?
‘아니, 강현찬 헌터님이라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여온 현찬이라면 정말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는 순간 가마가 멈춰 섰고 그것을 지고 달리던 달걸은 그대로 가마를 조심스레 바닥에 놓았다.
대한민국 이매망량의 근원지인 환몽촌(幻夢村).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