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이매망량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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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대체 무슨…….”
누군가 당황하고 있을 때 현찬은 말 대신 손을 들어서 기자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현찬의 손가락을 따라 지목된 대상에게 향하는 순간 기자인 척 변장하고 있던 남자가 본색을 드러냈다.
남자는 어설픈 연기로 누군가를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의의 안주머니에서 거무튀튀한 권총 한 자루를 빠르게 꺼내 들었다. 훈련을 많이 받았는지 총을 꺼내고 그것을 겨누며 방아쇠를 당기는 데까지 매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딜.”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현찬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지팡이의 끝 부분이 권총의 총구를 꿰뚫으며 그대로 박살을 내버렸다.
단상 위에 있던 현찬은 어느덧 남자의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남자도 바보는 아니었다. 애초에 권총 한 자루로 헌터들의 틈새에서 무언가를 해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권총은 결국 눈속임이었고 진짜는 따로 있었으니까.
남자는 이미 권총을 뽑아 드는 순간 왼손은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놓인 폭탄 스위치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리고 그 폭탄은 이미 상의 옷 안쪽에 잔뜩 둘러놓은 상태. 이것이 터뜨리면 그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카두케오스 지팡이가 허공에 금빛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콰직! 남자의 왼손이 주머니에 들어가기 전에 부러졌다. 현찬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팡이를 휘둘러 남자의 두 정강이를 강하게 때렸다.
“크헉!”
남자의 몸이 저절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현찬은 마지막으로 지팡이의 끝부분으로 남자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뒤늦게 기자들이 물러나고 헌터들이 몰려왔다. 헌터들은 황급히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구속하려고 들었지만, 현찬은 오히려 그런 헌터들을 제지했다.
“가만히 놔둬도 될 거예요.”
“네?”
“어차피 이 사람을 붙잡아도 얻을 건 없을 거거든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이 사람. 지금 조종당한 거예요. 헌터가 아닌 진짜 기자인데, 다른 누군가가 세뇌를 걸어서 조종한 거겠죠.”
카두케오스 지팡이로 그의 이마를 건드리면서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 남자는 다른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현찬이 정보창을 봤을 때 남자의 소속은 데스페라도나 람브로눅스가 아니었다. 그는 기자가 맞았다.
다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 옆에 괄호로 이상한 기호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르메스. 뭔지 알겠어?’
[아니. 나도 처음 보는 문자야.]
정보를 다루는 헤르메스의 능력 덕분에 지구상에서 현찬이 모르는 문자나 언어는 없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방금 기절한 남자의 정보창에 뜬 문자는 그런 현찬조차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헤르메스조차 모르는 문자.
그렇다면 답은 딱 하나다.
‘이계의 존재인가.’
[그것밖에 없겠지.]
이미 지구는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는 상태다. 지금 이계에 발을 들이민 국가가 있지만, 아직 다른 이계인과의 접촉은 없는 상태다. 애초에 다른 세계와 <문>으로 연결된 것도 거의 최근의 일이다 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가면의 집단. 어쩌면 그쪽의 대장이 이계에서 넘어온 자일지도 모르겠어.’
[이거 참 세상 바쁘게 돌아가네.]
데스페라도와 람브로눅스에 더해서 이제는 이계의 존재라니.
어쩌면 지금 세상은 현찬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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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의 회견이 끝난 다음 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언제나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다시 현찬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강현찬 헌터. 자신과 계약한 신의 정체를 밝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 과연 그 능력은 무엇인가?]
[계약을 맺은 신은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 이대로 오버랭크 헌터 확정?]
현찬이 당당하게 자신이 헤르메스의 계약자임을 밝히는 동영상과 함께 첨부된 기사에는 사람들이 줄줄이 댓글을 달았다. 당연하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 아니, 헤르메스의 계약자인데 성은 어떻게 만든 거죠?
- 그보다 찍힌 동영상에서는 헤라클레스의 사자가죽 아니었음?
- 아니, 누가 봐도 무복에 검 들고 있는데 어디가 헤르메스야?
- 바보들아 ㅋㅋㅋㅋ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가 그것과 관련된 거겠지!
- 그래서 그 능력이 대체 뭔데?
- 저도 잘 모르죠.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이번에는 헤르메스의 능력이 무엇인지 추측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헤르메스의 전승을 알고서 대략적이나마 어떤 능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날카롭게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찬이 직접 밝히지 않으면 그저 뇌피셜에 지나지 않기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근근이 테러리스트들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사들과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보며 경각심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중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쁘네.”
반야 가면은 자신이 심어놓은 첩자가 색출된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 혀를 찼다.
철 가면이 죽고 나서 한국에 그들의 조직이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가 크게 났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도 중 하나인 반야 가면이 이쪽에 넘어온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반야 가면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바로 첩자를 새롭게 심는 것이었다. 철 가면이 심어놓은 첩자들이 모두 색출되어서 이쪽에 손해가 여간 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장 큰 문제인 강현찬 헌터에 관해서 확인할 것이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몰래 지켜보려고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첩자를 심으려는 계획도 전면 수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서. 상황은 어떨 것 같나?”
“휘유. 새 가면. 조금은 기척을 내면서 움직이는 게 어때? 철 가면과 다르게 나는 매우 섬세한 사람이라서 갑자기 나타나면 심장이 철렁거린다고.”
“…….”
새 가면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반야 가면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쳇. 딱딱하고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
“질문에 대답해라.”
대답을 독촉하는 새 가면의 말에 반야 가면은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첩자를 심는 일은 미루는 게 나아. 새롭게 심기보다는 기존에 협회에 있던 녀석들을 교묘하게 세뇌해서 이용하려 들었는데 그것마저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차단해버리니 두 손 다 들었어.”
“다른 쪽 일은?”
“그쪽은 지금 아주 잘 해 나가고 있지. 람브로눅스 녀석들이 너무 열심히 해줘서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차도가 더 쭉쭉 나가던걸?”
“이번 일은 절대로 어떠한 실수도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아둬라.”
“알고 있어. 애초에 이쪽은 내 전문이라고. 너무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니야? 환몽촌(幻夢村) 녀석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살인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들 뿐이야. 거기에 더해서 나의 세뇌가 들어간다면 길 가던 어린아이 사탕 뺏기보다 더 쉬워.”
“방심하지 마라. 철 가면도 그렇게 자만했다가 당했으니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반야 가면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반야 가면은 조금 흥분한 기색이 만연한 상태에서 퉁명스레 새 가면을 쏘아붙였다.
“쯧. 그런 멍청한 녀석과 나를 동급으로 취급하면 곤란하지.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녀석이랑 <난제>를 컨트롤하는 내가 같아?”
반야 가면의 가면 안쪽에서 나온 말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난제>의 컨트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건지 이 자리의 둘은 절대 모르지 않으리라.
“진척은 얼마나 됐지?”
“환몽촌의 도깨비들의 방해로 조금 더뎌지고는 있지만 지금 7할은 완료했어. 역시, 보통 몬스터라면 그냥 바로 걸릴 정신 제압조차 잘 먹히지 않더라고. 과연 1등급 몬스터 그 이상 가는 <난제>다워.”
세계 곳곳에는 <난제>로 취급되는 몬스터들이 존재했다.
어떤 것은 단일 개체 하나만으로 <난제>의 취급을 받는다. 동남아와 동북아 먼바다의 한 섬에서 서식하는 대붕응자조(大鵬鷹子鳥)가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어떠한 <난제>는 단일 개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집단으로 서식하는 녀석들 또한 존재한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마존 숲에 똬리를 틀고서 다가오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스왈로우(swallow)가 그러했다.
S랭크 헌터들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난제>를 지금 반야 가면은 자신이 조종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난제> 어스름달.
모든 것이 어둠과 무의 형태로 이루어진 그슨대라는 괴물의 원류격 몬스터.
지금 반야 가면이 세뇌를 걸어서 조종하려는 놈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안 그래도 뭐 빠지게 열심히 하는 중이다. 제길. 철 가면 녀석은 대체 어쩌다가 신급 계약자 녀석에게 당해서는.”
“…….”
새 가면은 철 가면이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의 뜻이기도 했으니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도를 게이트를 열어버리는 씨앗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들의 내분을 조장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진실을 숨기고서 철 가면은 괜한 오기를 부려 현찬에게 당했다고 거짓 정보를 알렸다.
사도들은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그분’을 향한 충성심으로 뭉친 이들이었으니까.
“잘 되기를 빌지.”
“그렇게 말할 거면 도와주지그래?”
“나 또한 해야 할 일이 있다.”
새 가면은 그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반야 가면은 그런 새 가면의 딱딱한 태도에 여전히 불만이 남았는지 투덜대면서 패드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쳇. 그렇다 해도 헤르메스의 계약자라니. 나랑 상성이 너무 안 맞는데.”
헤르메스의 정확한 능력과 권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안다.
반야 가면의 입장에서는 현찬과 정면에서 싸우면 절대로 승산이 없었다. 전투력이 사도 중에서 3위에 속하는 철 가면조차 싸워서 패배했으니 더 말해 입 아픈 일이다.
애초에 그는 전투에 특화된 것이 아니었기에 나서서 싸울 생각도 없었다.
‘<난제>만 어떻게든 다루게 된다면 오버랭크 헌터도 내 상대는 아니다.’
등장과 동시에 강원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어스름달.
정부에서조차 대규모 토벌단을 꾸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둘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그런 녀석이 타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파괴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꽤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거야.’
반야 가면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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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응. 역시 인기 있는 사람은 귀찮아.”
현찬은 새로 구매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계약한 신이 헤르메스임을 밝히는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설마 이렇게나 국민 대 스타가 되어서 사람들이 귀찮게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현찬의 집 바깥에는 기자들과 시민들이 쭉 깔려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이었다. 현찬은 그 광경을 보며 질린다는 듯이 커튼을 쳐 모습을 가리고서 바로 침대로 뛰어든 것이다.
허공을 부유하다가 이내 실체화하여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친 헤르메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킬킬거렸다.
현찬이 자연스럽게 소환해둔 에크티는 깃털로 이루어진 부채를 들고 와서 현찬의 곁에서 살살 부쳐주었다. 그 부드러운 바람에 현찬은 후우, 하고 속에 가득 찬 찌꺼기와 같은 한숨을 토해내며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헤르메스. 곧 손님이 올 거야.”
“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제대로 맞이해 주자고.”
“그래야겠지.”
현찬과 헤르메스의 눈은 이미 세계의 흐름이라는 [정보창]을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오늘 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
도깨비라는 이매망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