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신급 영령의 계약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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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방을 나왔을 때 현찬을 가장 먼저 반겨준 자는 바로 <호레이쇼 넬슨>의 계약자인 윌리엄 그랜트였다. 그는 마치 뭐 마려운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한 채 복도에서 서성거리다가 현찬이 나오자마자 얼굴에 약간의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자신의 앞에서 무언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머뭇거리는 윌리엄을 보며 현찬이 물었다. 윌리엄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현찬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
현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체 무슨 이유로 고개를 숙이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현찬의 의도를 읽어 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윌리엄은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 강현찬 헌터님을 봤을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데 무시했습니다. 아무리 신급 영령의 계약자라고 하더라도 바다 위에서의 싸움은 제가 더 잘할 거라고,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뇨. 오히려 방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윌리엄은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오만한 행동의 대가를 치렀고 죽음의 직전까지 몰리고 말았다. 죽기 직전에 그는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대가를 치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현찬이 나타났다.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거기에 더해서 남은 배로 100척이 넘는 해적선들을 모조리 박살 냈다. 그것도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그는 거기서 전율을 느꼈다.
지금까지 무시하고 깔보던 동양인이 사실은 자신보다 얼마나 뛰어난 자인지 알게 되었다.
부족했던 것, 모자란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이런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고 제게 깨달음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윌리엄은 허리를 90도로 숙이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욕을 들을 각오까지 마다한 그의 태도에,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는 윌리엄의 마음가짐에 현찬은 그저 피식 웃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 드세요.”
현찬의 말에 윌리엄은 조심스레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뭐, 처음에는 좀 많이 거만하고 건방진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죠. 그래도 윌리엄 씨는 결국 우리나라를 위해서 싸우러 오신 분이셨잖아요?”
특히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고 해적들과 맞서 싸운 그의 용기는 현찬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 데다가 자신의 죄를 그렇게 뉘우치시니 제가 무슨 말을 더할까요.”
현찬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죄를 뉘우치며 사과를 구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솔직하고 당당한 윌리엄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참이었다. 현찬의 용서에 윌리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현찬은 그런 윌리엄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다시 만나요.”
“네! 저도 그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현찬이 손을 흔들어주며 떠났고 윌리엄은 그런 현찬의 등 뒤로 거수경례를 취했다. 그런 윌리엄의 뒤에서 <호레이쇼 넬슨> 또한 현찬을 향해 존중의 의미를 담아 경례를 취했다. 이것은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협회 내부의 긴 복도를 지나서 넓은 홀로 나오자 그곳에는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과 혹시 모를 상황을 막기 위한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안드레이 다니엘은 아무래도 다른 문을 통해 바로 사라진 듯싶었다. 귀찮은 걸 싫어할 것 같은 그의 성격상 기자들은 매우 껄끄러운 것이겠지.
현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모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현찬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서 자연스레 그런 기자들의 사진 세례를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자신도 할 말이 있으니 이렇게 돗자리를 깔아준 자리가 내심 반가운 터였다.
‘나도 참 많이 변했네.’
1년 전까지만 해도 소시민이었던 청년은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찬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는 되었지만, 한국은 지구 전체에 있어서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이런 곳에서 1등이라고 거들먹거릴 생각은 없었다. 된다면 당연히 세계 최고가 아니겠는가.
현찬은 자신의 앞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는 것을 멈추고서 현찬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 귀를 쫑긋 세운 채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끄러웠던 협회 홀의 내부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깔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또 저에게 관심을 두니 고마운 생각이 드네요.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먼저 받아볼까 하는데 어떠신가요?”
현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자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진행에 오히려 상황을 긴장하며 지켜보던 협회의 헌터들이 놀랄 정도였다.
사람은 갑자기 직위가 오른다고 해서 사람들의 앞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다. 모두의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서 평소처럼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과 교육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현찬은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이랬다는 듯이 기자들을 잘 다루고 있지 않은가? 돌잔치 때 마이크를 집어도 저렇게는 못 할 것이다.
“네. 먼저 손을 드신 그쪽 기자분. 질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유럽의 오버랭크 헌터인 안드레이 다니엘이 강현찬 헌터님을 만나기 위해서 직접 내한을 하셨는데,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그저 새롭게 나타난 신급 영령의 계약자에 대해 호기심이 들어서 찾아오신 겁니다. 딱히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건 없네요.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서요. 자, 다음 질문?”
“저, 질문 있습니다. 강현찬 헌터님이 이번에 해적 소탕에서 아주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3등급 이상의 게이트들을 혼자서 클리어하고 다니신다고 하는데 혹시 S랭크 헌터 시험을 목표로 삼고 계십니까?”
현찬은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이제 곧 S랭크 헌터 승급 시험을 치를 생각입니다.”
그리고 현찬은 S랭크 승급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모두 만족한 상태였다. 그 누구도 현찬이 S랭크 헌터가 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리라. 이번에 해적들을 소탕하는데도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 현찬이 아닌가.
혼자서 3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심지어 <심연>의 사태에서 게이트를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현찬이다. 그 누구도 현찬이 지금 S랭크 헌터의 무력을 지녔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규정상 아직 힘들지 않나요?”
현찬은 조금 전에 안드레이에게 받은 추천서는 꺼내 들었다.
“오버랭크 헌터인 안드레이 다니엘 씨가 저에게 직접 건네준 추천서입니다.”
“헉!”
“오버랭크 헌터가 직접?”
“그 안드레이 다니엘이?”
현찬의 말은 주변에 거대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현찬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사람들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세상사 관심 없이 오직 자신만의 길을 걷는 오버랭크 헌터가 추천서를 건네주다니! 그렇다는 것은 이미 둘 사이에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추천서가 규정상 무용지물이라고 하더라도 오버랭크쯤 되는 사람의 추천서라면 그것은 분명히 큰 의미를 지닌다.
기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고 현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질문을 건넸다.
“신급 영령의 계약자이신데, 지금도 어떤 신인지 밝히지 않을 생각이신가요?”
다들 궁금했던 질문이라서 그런지 모두의 시선이 다시 현찬을 향해 옮겨졌다. 현찬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짓고 있었다. 모두의 궁금증과 관심이 최대치를 찍었을 때 현찬의 입이 열렸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드디어 정체를 밝힌다는 건가?”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이내 다시 입을 헙 다물었다. 혹시나 자신이 시끄럽게 해서 현찬이 한 말을 듣지 못하는 불상사를 겪고 싶지 않았다. 재차 침묵이 맴도는 좌중을 보며 현찬은 고개를 살짝 돌려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메스마저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이제는 허락하기로 한 것이다.
“다들 제가 어떤 신과 계약을 맺었는지 궁금해하실 겁니다.”
현찬의 신상명단에 계약한 영령은 페네오스로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재확인을 하려고 해도 영령 스스로가 바라지 않는 이상 계속 페네오스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 듣는 이름인 데다가 현찬이 보여주는 능력은 이상하리만치 다방면으로 뛰어나지 않은가.
당연히 이 자리를 포함해서 대한민국 전체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현찬과 계약을 맺었다는 신의 정체일 것이다.
그 비밀에 장막에 감춰진 실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의 관심과 흥분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서 현찬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와 계약을 맺은 신은 바로 헤르메스입니다.”
헤르메스!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적잖이 감탄했다.
올림포스 12주신 중 하나이자 전령과 도둑, 정보, 계약 등 다양한 분야를 주관하는 신. 그러한 신이 반도의 조그마한 땅에 있는 헌터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놀랍기도 하면서 어딘가 뿌듯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능력은 비밀입니다. 헤르메스가 워낙 장난기가 넘치다 보니까 이런 부분에서 비밀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 속에서 헤르메스는 매우 장난꾸러기로 비친다. 그런 성격을 지닌 헤르메스라면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현찬은 자신이 헤르메스의 계약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란 듯이 자신의 오른손에 카두케오스 지팡이를 꺼내 쥐고 머리에는 페타소스 모자를 착용했다. 실제로 헤르메스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오오 하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저의 목적은 당연히 오버랭크 헌터입니다. S랭크로 만족할 생각이 없습니다. S랭크를 달성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겁니다.”
현찬이 하는 말은 실시간으로 카메라를 통해서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랑클랜의 클랜장인 최덕현 또한 자신의 개인 사무실 내에서 패드를 통해 현찬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인가.”
거기에 더해서 오버랭크 헌터의 추천까지 받았으니 S랭크는 이미 확정일 것이다. 어디 S랭크 뿐일까. 계약한 신이 어디 어중이떠중이 같은 하급 신이 아니라 무려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다. 헤르메스가 비록 전투에 특화된 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주관하는 분야를 생각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시. 조심하길 잘했군.’
현찬의 성장 속도를 보고 어딘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현호를 잘라낸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 <심연> 사태에서도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현찬에게 적대감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이쪽이 크게 밉보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영랑의 리더 1명과 기파랑 부대원 10명으로 오버랭크 헌터의 분노를 피해냈다면 이득 보는 장사지.’
최덕현은 눈을 빛냈다. 현찬과 더 친해질 가능성도 없고 그런 생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과연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나름 기대되는군.’
그렇게 최덕현이 보고 있는 화면에서는 현찬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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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마지막으로 마치겠습니다.”
현찬이 그 말을 끝내자 재차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며 기자들이 현찬을 애타게 불렀다. 아직 묻고 싶은 질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벌써 끝날 조짐을 보이니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하지만 현찬은 기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은 대신 여전히 페타소스를 착용한 채 기자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누군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졌고 현찬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쳐도, 설마 기자들 사이에서도 범죄자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네요.”
현찬의 목소리를 작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좌중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