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신급 영령의 계약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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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시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초고층 빌딩. 그곳의 라운지 홀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내부에 온갖 화려한 불빛과 음악으로 치장된 파티에서 새하얀 턱시도를 입은 남자에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여자들은 아양을 떨었고 중년의 남성들도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아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의 이목의 중심에 있는 화려한 금발의 남자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2m에 가까운 거구와 새하얀 양복 위로도 확실하게 튀어나와 있는 도드라진 근육들. 올백으로 넘긴 금발은 조명을 받으며 밝게 빛났으며 그의 미소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백색 치아 또한 밝게 빛났다.
마치 미국 슈퍼 히어로 코믹스에서 그대로 현실로 가져온 것처럼 생긴 남자.
알렉세이 윌터.
전 세계에 단 3명밖에 없다는 오버랭크 헌터이자 모든 미국 시민들의 우상이며 히어로.
그렇기에 그의 이명 또한 바로 영웅(hero).
그런 그는 지금 자신의 소유인 빌딩에서 파티를 열어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과의 친분을 맺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알렉세이를 향해서 알아서 다가와 주는 중이었지만.
알렉세이 윌터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싫은 기색 없이 사람들을 한 명씩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매우 정의롭고 유쾌한 성격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윌터. 대체 언제까지 이런 지루한 이야기만 계속 할 거야? 시원하게 괴물들을 때려잡자고!]
‘워. 워. 진정해. 글루. 본디 히어로라고 한다면 이렇게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한 법이라고.’
윌터의 머리 위를 지루하다는 듯이 뒤통수에 두 팔을 기대며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영령은 바로 <글루스카베(Gluskabe)>
아메리카 신화에 존재하는 자기 스스로 빚어져서 만들어진 최초의 인류이자 신조차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지고의 존재. 그가 바로 알렉세이 윌터와 계약을 맺은 신급 영령이었다.
글루스카베에게 이런 이야기만 나누는 파티는 매우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난생처음으로 겪는 21세기 미국의 화려한 풍경은 호기심이 가득하고 장난기 넘치는 그를 거칠게 자극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년이고 계속 지속한다면 당연히 지치기 마련. 글루스카베는 비록 유쾌하여 마음이 맞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지루한 자리까지 견뎌내며 참여하는 자신의 계약자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칫. 이런 재미없는 자리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보다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사람들의 우러러봄을 한 몸에 받는 게 훨씬 더 재미있는데.]
‘글루. 나도 네 말에는 동의해. 하지만 이런 힘을 지니고 이런 자리까지 올라온 이상 반드시 의무는 생기는 법이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얼마나 좋은 말이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스파이더맨에서 나온 말이잖아.]
‘그래. 그러니 내가 히어로를 좋아한다는 거야.’
[윌터! 그냥 이런 자리를 내버려 두고 차라리 다른 데를 가자!]
알렉세이 윌터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파트너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어디를 가자는 건데?’
[저기 태평양 너머! 자그마한 나라인 대한민국! 거기에서 이번에 엄청난 힘의 파동이 느껴졌잖아.]
‘아아. 그거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한국에 새로운 신급 영령의 계약자가 나타났다고 했지. 최근 바빠서 제대로 확인은 못 했지만, 지금까지 이뤄낸 업적을 생각하면 조만간 오버랭크가 될 가능성이 있겠지.’
아직도 그때 느껴졌던 힘의 파동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던 감각이 생생했다.
다른 헌터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신급 영령의 계약자인 알렉세이는 확실하게 느꼈다. 제우스의 아스트라페가 지면에 꽂히는 순간 퍼져나갔던 그 잔류 힘을. 그것이 얼마나 강한 존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알렉세이 윌터도 강현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이 들었다.
그를 직접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조만간 새로운 오버랭크 헌터가 될지 모르는 동료와 친해지는 게 썩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성격이 이상하면 어쩌지?]
‘하하. 설마 그러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알렉세이도 살짝 걱정되었다. 싸늘하고 냉혈한이며 감정이라는 것이 얼어붙은 게 아닐까 싶은 다니엘과 워낙 소심해서 남과 대화 자체를 섞으려 들지 않는 양 리화를 둘 다 만나본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으음. 그래도 들리는 이야기로는 매우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했으니 괴팍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어.’
[뭐, 나야 그 아이보다는 누구와 계약을 맺었는지가 더 궁금하지만.]
‘조만간 알게 되겠지.’
알렉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멀리 펼쳐진 뉴욕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게다가 이미 우리 차가운 친구가 먼저 찾아가는 것 같으니까.’
그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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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그곳에는 지금 수백 명이 넘는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곧 문을 열고서 입국하는 사람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으니까.
유럽의 오버랭크 헌터 안드레이 다니엘의 내한!
그것도 직접 신급 영령의 계약자인 강현찬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는 소식은 이미 국내에서 유명했다.
이런 특종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기자들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뭐 하나 건져보려고 인천국제공항에 몰려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흘러도 안드레이 다니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등까지 오는 은발을 길게 기른 미남자인 그를 기자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대체 왜 안 오는 거지?”
“우리가 시각을 잘못 안 건가?”
기자들이 그렇게 의아해하는 동안에 이미 다른 출구로 몰래 빠져나가 협회 사람들과 접촉한 안드레이는 인천공항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잔뜩 긴장하여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협회 관계자의 말을 무시한 안드레이는 그저 창밖에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음에도 협회 관계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안드레이의 성격에 대해서 언질을 들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나이.
감정이 얼어버린 남자.
싸늘한 눈의 왕.
그것이 안드레이 다니엘을 수식하는 말들이었다. 그 정도로 그는 감정을 내비치는 경우가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말을 잘 나누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을 아는 자는 오직 그와 계약을 맺은 영령뿐이라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사실 그가 강현찬을 만나러 내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드레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매우 놀랄 일이었다. 그가 무언가의 목적을 가지고서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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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자신의 눈앞에 우뚝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는 현찬보다 더 컸다. 마치 모델처럼 쭉 빠진 그의 키는 거의 190cm는 되어 보였고 무엇보다 막 쌓인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그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그가 매우 무뚝뚝하고 차가운 성격임을 단편적이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자리를 비켜주었기에 지금 방 안에서 서로 마주 본 사람은 현찬과 안드레이 단 둘 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의 헌터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안드레이 다니엘.”
그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지만, 어딘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머금은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양 리화보다 더 대화를 나누기 힘든 상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현찬의 머리를 문득 스쳐 지나갔다.
현찬이 눈을 돌려 헤르메스를 바라보자 헤르메스가 알겠다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신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스카디.]
[응. 오랜만이야. 헤르메스.]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서로 가까이 지내고는 한다. 특히나 발이 넓은 헤르메스는 모르는 신들이 거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스카디와도 안면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의외네. 네가 계약자를 만들었을 줄이야.]
[나도 계약자는 만들거든? 우리 달링이 얼마나 멋진데?]
“달링?”
그 말에 현찬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스카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드레이에게 다가가 그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반 영체화 했을 정도라면 저쪽도 아마 <소환>의 단계까지 도달한 헌터가 분명했다.
그보다 계약자와 신간의 애정행각에 현찬은 살짝 당황했다. 설마 여신인 그녀가 자신의 계약자에게 좋다고 달라붙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보다 여기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지?]
[무슨 목적이기는. 확인하기 위해서야. 이 자그마한 반도에서 제우스 님의 힘이 느껴졌는데 당연히 신인 내가 찾아오지 않겠어? 나에게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무엇보다, 라며 스카디가 말을 이었다.
[우리 달링이 만나보고 싶어 하더라고.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 두는 경우가 없는데 갑자기 헤르메스, 너의 계약자와 만나고 싶다고 말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고!]
[하하! 우리 현찬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현찬의 칭찬에 헤르메스는 기분이 좋은지 어깨가 들썩거렸다. 계약자 사랑이 내리 깊은 두 신의 수다에 현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현찬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으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현찬이 조금 난처해하는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놀랍게도 안드레이였다.
“아직, S랭크가 아니었지?”
“예. 아, 네.”
난데없는 말에 순간 뭔가 싶었지만, 그의 말뜻을 파악한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의 말대로 현찬은 아직 S랭크 헌터가 아니었다. 이미 A에서 한 단계가 더 올라서 A+였지만 S를 달기 위해서는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했으니까.
안드레이는 현찬에게 자그마한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중에 시험을 치를 때 내가 추천해줬다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그가 건네준 종이는 바로 오버랭크 헌터의 추천서!
S랭크 헌터가 추천제도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가져다주는 파급효과는 매우 컸다. 아무렴, 세계에 아직 3명밖에 없는 오버랭크 헌터가 인정했다는 소리니까. 현찬은 종이를 받아들이며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너는 고작 S에서 머물 위인이 아니다. 빨리 S를 달고, 우리와 같은 자리까지 올라와라.”
안드레이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딘가 매우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에 스카디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달링! 벌써 가게?]
“볼일은 끝났다.”
안드레이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현찬을 슬쩍 바라보았다.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서, 함께 싸우기를 고대하지.”
그의 마지막 말에 스카디는 고운 손으로 자신의 새하얀 뺨을 꼬집었다.
[세상에! 달링이 저렇게 말 많이 하는 거 계약하고 나서 처음 봐!]
항상 대답해도 단답형으로 음. 알겠다. 응. 이런 말만 하던 안드레이가 저렇게나 말을 길게 하는 광경은 한겨울에 민들레가 피는 것처럼 매우 희귀한 광경임이 틀림없었다. 자기와 계약을 맺은 여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든 말든 안드레이는 쿨하게 퇴장했다.
[달링! 같이 가! 헤르메스, 나중에 봐!]
[어. 잘 가!]
[아참! 그리고 로키 조심해!]
마지막으로 스카디가 남긴 경고에 헤르메스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최근에 잊고 지냈는데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그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불쑥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그래. 조심해야지. 로키.]
헤르메스의 중얼거리듯 하는 혼잣말에 현찬 또한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