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81화 신급 영령의 계약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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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고개를 들어 바다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현찬의 시선이 바다 너머로 옮겨가자 그것에 의문을 느낀 사람들이 모두 현찬의 시선을 따라 수평선 위를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그것과 맞닿은 바다뿐이었다.
“대체 뭘 보시는 거지?”
“강현찬 헌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모두가 의아해할 무렵에도 현찬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급기야 헬기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설영이 직접 현찬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기다리세요. 지금 손님이 한 분 오고 있으니까요.”
“손님이라니…….”
이곳에 더 찾아올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국가의 허가가 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해군 부대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현찬의 말에 황설영도 이해되지 않을 무렵 그녀 또한 자신의 기감의 끝에 걸리는 기척에 몸을 흠칫 떨었다.
‘이, 이건 뭐지?’
기척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바다 위를 아주 빠르게. 그 속도가 어지간한 비행기의 속도에 근접해서 그런지 황설영의 기감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기척의 주인은 순식간에 해군기지에 접근했다.
황설영은 경악하는 와중에도 현찬이 보여준 능력에 감탄했다. 현찬은 황설영조차 겨우 알아차린 상대방의 기척을, 아주 멀리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멀리서 점으로 보였던 그것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이내 현찬의 앞에 내려섰다. 현찬의 주위에 포진해 있던 군인 장병들은 어, 어? 하면서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주변의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잔뜩 긴장하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손에 무기를 쥐었다.
솨아아!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현찬의 앞에 가뿐히 내려앉은 사람은 한 여인이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선녀들처럼 연분홍빛과 붉은색 기조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의 기다란 천이 허공에 나풀거리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붉은 나비가 비상하는 것 같았다.
마치 수면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한 떨기의 꽃잎처럼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만의 세계를 뽐내며 등장한 그녀는 어깨 위에서 찰랑대는 단발을 정리하며 현찬과 눈을 마주쳤다.
그 흑요석처럼 검고 투명한 눈동자는 세상의 물욕과는 하등 관계없는 초탈한 듯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누, 누구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헌병대가 우르르 몰려와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신원 미상의 여인은 그런 군인들에게 한 줌의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여전히 현찬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이 강렬하지 않고 평온했지만 계속 쳐다보니 조금 난처해진 현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황설영이 현찬의 앞을 막아서듯이 섰다. 하지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황설영은 속으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하다……!’
눈앞의 여인은 A+랭크 헌터인 황설영조차 그 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아마 그녀와 대등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현찬이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물러설 수 없었기에 황설영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결같은 태도로 현찬을 바라볼 뿐. 그 무례한 태도에 주변 헌터들이 발끈하려는 순간 현찬이 황설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괜한 마찰을 빚게 될 것 같으니 본인의 선에서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설마 중국의 유명하신 구천현녀(九天玄女)가 저를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현찬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숨을 삼켰다.
구천현녀(九天玄女) 양 리화!
어찌 그녀를 모르겠는가.
지구상에 단 3명밖에 없다는 오버랭크 헌터 중 하나!
지금은 10억 아래로 내려간 중국의 인구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양 리화 그녀였다.
속세와는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가 몇인지에 대해 신원미상이었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현찬만큼은 그녀를 쉽게 알아보았다. 양 리화 본인보다는 그녀의 등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영령이 눈에 띄었으니까.
구천현녀(九天玄女).
도교에서의 여선(女仙)이자 중국 신화에서 서왕모와 맞먹는 전쟁의 여신. 오른손에 태극검을 쥐고 왼손에는 태극패를 쥔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현찬을, 거기에 더해서 현찬의 등 뒤에 도열한 헤르메스와 아테나를 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양 리화입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반도에서 느껴졌던 강대한 힘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확실히 그럴 만하네요. 아테나. 오랜만이에요. 서로 이렇게 하계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구천현녀의 시선이 헤르메스에게 이동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헤르메스를 향한 노기가 다 전소되지 못한 잔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현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사고 좀 쳤구나.’
[우리도 구면이죠? 헤르메스?]
[으, 응? 아하하? 그, 그러던가?]
[저 계약자의 몸 안에 그 씹어 먹을 원숭이의 흔적도 남아 있군요. 보아하니 부른 모양이죠? 그쪽의 권능으로? 또 이번에는 무슨 장난을 치려고 그랬나요?]
[아니, 장난이 아니라 세상을 지키려고 불렀달까…….]
헤르메스는 장난쳐서 찔린 게 많다 보니 구천현녀를 매우 꺼렸다. 저렇게 인자해 보이는 여신마저 성질을 부릴 정도이니 대체 헤르메스는 천계에 머무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장난을 쳤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후우. 옛날의 일을 꺼내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겠죠.]
[맞아 맞아. 우리 다 지난 일은 시원하게 잊어버리자고.]
[넌 좀 조용히 해라!]
보다 못한 아테나가 헤르메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현찬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양 리화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저 분위기. 낯설지 않다. 어딘가 많이 본 것 같다 싶더니 딱 에크티와 비슷했다. 자신의 감정 표현이 서툴고 인형 같은 면모가 딱 닮았다. 자기소개한 뒤에 입을 꼭 다무는 것을 봐도 감이 왔다.
“그보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있으신지요?”
이대로라면 서로 서먹하게 침묵만 고수할 것 같아서 현찬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양 리화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자그마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얼마 전에 이쪽에서 거대한 힘이 느껴져서. 그래서, 현녀 님이 가자고 하셔서 찾아 왔어요. 개인적으로 흥미도 있었고.”
“오시기 전에 미리 말씀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현찬의 휴대폰은 모르겠지만 한국 정부에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그래도 준비를 하고서 맞이해 주었을 것이다. 현찬의 말에 주변 헌터들도 옳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오버랭크 헌터의 등장은 모두의 심장에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양 리화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 산속에 살다 보니 뭘 할 줄 몰라서.”
“스마트폰이나 그런 거 사용 안 하세요?”
“그게 뭐예요?”
“게이트 클리어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냥요.”
“오버랭크 헌터 승급시험은 봤어요?”
“기억이 안 나요.”
[아, 그건 그냥 열심히 게이트 돌면서 강해지게 내가 키웠더니 알아서 오버랭크가 되었답니다.]
구천현녀의 부가설명에 현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 무계획적이고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녀와 계약을 맺은 구천현녀가 양 리화의 행동을 대부분 점해 준 것이다. 그런데도 오버랭크 라는 것은 성격은 이러해도 그녀가 지닌 힘과 능력은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현찬은 아이를 달래듯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직접 만나니 기분이 어떠세요?”
“응. 나쁘지 않아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볼 일은 다 마치신 거예요?”
양 리화는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구천현녀를 올려다보았다.
[음. 뭐,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해 볼 요량으로 찾아왔을 뿐이니 목적은 달성했어요. 아테나와 함께 있는 계약자인 시점에서 뭐, 인격은 보고 말 것도 없겠죠.]
그렇게 말하는 구천현녀의 속뜻에는 혹시나 현찬이 무언가 위험한 인물이라면 이쪽에서 손을 쓰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혜와 정의로움의 여신인 아테나가 함께하고 감은장아기의 축복과 인정까지 받았기에 현찬은 구천현녀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솔직히 그쪽의 계약자는 저도 탐나기는 하지만요.]
[야! 내 현찬이는 누구에게도 안 주거든!]
[알아요. 알아. 천계에서 그렇게 함께 지내던 투전승불에게도 주지 않은 걸 아니까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리고 그쪽에 제게 큰소리칠 입장인가요?]
구천현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헤르메스는 깨갱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도 제 계약자가 마음에 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하네요.]
[뭐, 확실히 그쪽도 자질만 보면 확실히 대단해 보이기는 하네. 현찬이 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가진 재능이 뛰어나군.]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칭찬이 부담스러운지 양 리화는 몸을 움찔 떨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현찬의 곁에 붙었다. 그러자 조금 안도가 되는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하네요. 리화가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처음인데. 낯가림이 심한 아이 거든요. 그러고 보니 현찬이라고 했죠? 당신은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나요?]
현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를 소환하면서 현찬도 이 세상이 맞이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의 전부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더라도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는 틀림이 없었다.
[최근 중국 쪽에서도 게이트가 확산된 건 그런 이유가 있죠. 그렇다고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구천현녀는 현찬을 탓하지 않았다. 현찬은 오히려 붕괴될 뻔한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데 일조했으니까 칭찬을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제 많이 바빠질 거예요.]
[지금도 그런데?]
[지금보다 더.]
세상의 운명의 흐름은 지금 동북아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강렬한 세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조만간 전체적으로 영령들과 계약을 맺은 헌터들의 능력이 향상할 거예요. 영령과의 동조율이 높아지며, 새롭게 등장하는 각성자들의 숫자는 더 늘어나겠죠.]
[그렇게 되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겠군.]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는 게 여기서 최선의 상황이겠지만, 한번 탄 흐름을 막을 수는 없겠죠.]
다른 세계와의 통합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세상은 얼마 가지 않아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인류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투쟁을 나아가야 한다.
[동북아 지역에 같은 신이 있으니 서로 잘 지내봐요.]
[그래. 우리도 잘 부탁하지.]
[아 참. 그리고 서쪽 끝의 그녀가 조만간 찾아올 거예요. 그녀의 계약자와 함께.]
서쪽 끝의 계약자라면 유럽연합이 자랑하는 오버랭크 헌터인 안드레이 다니엘이 분명했다.
눈과 겨울의 여신 <스카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헌터.
‘그도 찾아오는 건가.’
현찬은 새로운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