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바다 위의 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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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윌리엄은 자신의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카리스마에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이 기도. 이 압박감.
윌리엄 그랜트가 헌터로서 살아오면서 딱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럽에서 한창 활약할 때 오버랭크 헌터를 만났을 때였다.
안드레이 다니엘.
아발란체(Avalanche 눈사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유럽연합이 자랑하는 오버랭크 헌터다.
그와 계약을 맺은 신급 영령은 바로 북유럽 신화에서 나오는 겨울의 여신 <스카디>
초인인 헌터들의 뼛속까지 얼릴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였다.
윌리엄 그랜트는 아직도 그 광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북유럽에서도 해적들은 존재한다. 특히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다 부근에는 바이킹과 계약을 맺은 데스페라도 조직원들이 판을 쳤었다. 윌리엄은 그곳에 파견을 나가서 직접 녀석들과 마주쳐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바이킹 녀석들은 좁은 해안에서 농성을 벌이듯 싸움을 걸어서 전투가 꽤 길어지는 양상을 띨 무렵이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안드레이 다니엘이.
그가 윌리엄의 싸움에 끼어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가 여행하고 있는데 때마침 바이킹 해적들이 활개 쳤고 심심한데 녀석들이나 잡으러 가볼까 할 때가 바로 해전을 벌이던 중이었던 것이다.
허공에 떨어져 내리는 한 송이의 눈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안드레이 다니엘이 한 행동은 간단했다. 그저 자신의 애검인 레이피어를 뽑아서 한번 휘두른 것.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10여 척이 넘는 해적선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타고 있던 모든 데스페라도가 엄청난 냉기에 얼어붙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저항 흔적도 없이 자신들이 언제 얼어붙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전투를 벌이는 생생한 모습 그대로.
치열하게 싸우던 야만적인 적들이 순식간에 얼음 상이 된 그 광경이 아직도 윌리엄의 꿈속에서 아른거릴 때가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 절대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절망감. 그리고 질투심조차 들지 않는 경외감.
지금 현찬이 보여주는 광경은, 그때 보았던 윌리엄의 감정을 고스란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윌리엄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떨리는 몸은 그의 이성을 완전히 배반하고 있었다. 더욱이 큰 문제는 바로 그와 계약을 맺은 영령인 <호레이쇼 넬슨>이 매우 격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설마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너도 아는 영령이야?’
[알다마다. 영령이 되고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바다에 모든 것을 지고서 살아가는 우리 해상 제독들의 사이에서도 거의 전설로 회자 되는 인물이지. 너도 알 텐데?]
‘잠깐! 설마, 정말로……?!’
윌리엄은 문득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 이름에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어찌 모르겠는가. 단 13척의 배로 330여 척의 적선을 막아내어 다 져가는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버린 최고의 제독을.
제독과 계약을 맺었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군 제독들을 살핀 그이기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처음 그 정보를 접했을 때 윌리엄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허구성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것이 허세로 부풀어진 역사가 아니라 진짜였다고?’
[그래. 그 사실에 한 점 거짓이 없다.]
그 전설의 인물이 현찬과 계약을 맺고서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윌리엄은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저자와 함께 싸우고 싶다. 저자의 곁에 서서 이 전설의 싸움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힘과 체력이 다한 그는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만 겨우 가능했다. 이런 몸 상태로는 싸움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몸 상태도 안 좋으니 그쪽은 쉬고 계세요.”
현찬은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현찬의 몸이 천천히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에 걸치고 있는 복장이 변했다.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던 수군통제사의 붉은 갑옷이 바로 그 증거였다.
“녀석들은 제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요.”
[테레이오스테(Teleióste)]는 반으로 갈라져 두 자루의 거대 환도로 바뀌었다.
<차용> [쌍룡검雙龍劍]
두 자루의 검에는 문구가 써져있었다.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러운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다 위에 서는구나.]
500년이 지나도 그대로 바뀌지 않은 조국 바다의 풍경은 세기의 제독이자 강철의 장군인 이순신의 뜨거운 마음을 매우 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풍경을 헤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해적들이었다.
[감히.]
이순신 장군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애잔함에 사로잡혔던 그의 눈동자 안쪽에서 지하의 마그마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서렸다.
[해적 따위가 나의 조국을 침범하려 하는가.]
이순신 장군의 분노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요동치는 파도의 강도가 점차 강해졌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해적선들은 지금은 그 자리에 꽁꽁 묶여서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뭐냐!”
“선장님! 배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길! 어떻게 된 거야?! 영령의 배가 왜 고작 이런 파도도 못 이기는 건데!”
영령의 배라면 폭풍이 몰아쳐도 침몰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대체 이 바다는 어떻게 된 조화인지 태풍이 몰아칠 때의 바다와 비슷했으며 심지어 그들의 배가 꼼짝도 못 했다. 오히려 점점 강해지는 파도는 그들의 배를 조금씩 갉아 먹을 정도였다.
‘아, 안 돼!’
<구키 요시타카>의 계약자인 타카와라 케이모토는 갑자기 밀려오는 오한에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아니, 정확히 그와 높은 동조율을 보이는 해적 <구키 요시타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도, 도망쳐야 해! 저자와 싸우면 안 돼!’
정유재란을 직접 겪은 구키 요시타카는 지금 이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업적과 전투를 직접 목격한 그이기에 그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안다.
도망쳐야 한다. 바다 위에서 그와 싸우는 짓은 자살행위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지나친 공포는 그의 계약자인 케이모토를 공황에 빠지게 했고 애석하게도 주변 해적들은 그런 케이모토의 상황을 살필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흔들리는 배에서 넘어지지 않게 견디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대체 이게 뭐냐 말이냐!”
선장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도 파도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울돌목>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가장 커다란 승리이자, 역사상에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최고의 업적인 명량해전. 그 승리의 축배를 마신 천혜의 전투 장소.
13척의 배로 333척의 적선에 맞서서 승리했던 그 시절의 전설이 현실에 구현되어 해적선들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끼기기긱!
콰가가가각!
영령의 힘으로 재차 드러난 울돌목의 거친 파도가 해적선들을 거칠게 흔들었다. 배와 배가 서로 부딪치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고 거친 바다가 배의 밑면을 거칠게 때리며 깎아내리고 있었다.
“이런 제길! 크라켄을 보내라!”
구오오오오오!
선장의 명령에 반응한 크라켄이 바다 아래에서 현찬이 있는 판옥선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크기만 수백 미터나 되어 수면 위로 부상하면 자그마한 섬이 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위험한 바다 괴수다. 어지간한 배는 그 강력한 빨판에 붙잡히는 순간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어딜 사이한 미물이 이 싸움에 끼어드느냐!]
하지만 상대는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호통과 함께 바닷속마저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처럼 물살이 거세게 변했다. 그것은 아무리 거대한 덩치를 지닌 크라켄이라 하더라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오오오오오!!
바다 전체를 울리는 크라켄의 비명과 함께 크라켄의 몸뚱이가 울돌목의 거친 물살 아래에서 갈가리 찢겨 나갔다. 에솔로는 그 광경을 보며 안색이 창백해 져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젠장! 전원 돌격하라! 적선은 그렇게 많지 않아! 돌격해!”
에솔로 보르치오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 질렀다. 그의 의지를 느꼈는지 플라잉 더치맨호가 울돌목의 거친 물살을 가르며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선장이 나서서 길을 열어주자 그 뒤를 이어 유명한 해적 영령과 계약을 맺은 자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그 광경을 본 이순신 장군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계약자여. 나를 다시 이 자리에 불러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
‘저야말로 그 유명하신 제독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구나.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은 이쪽이거늘. 그렇기에 나는 그대에게 또한 간청하마. 나의 전력을…… 이 자리에서 뽐내도 되겠는가?]
‘어찌 제가 그것을 거부하겠어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좋다.]
현찬은 보란 듯이 마력을 쏟아부어 넘겨주었다. 현찬이 사용하는 마력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울돌목의 바다가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현찬이 탄 배를 제외한 15척의 판옥선의 위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전 위대한 업적을 함께 했던 그의 부하들이 판옥선과 함께 등장했다.
거제 현령 안위,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 현감 류형, 가리포 첨사 이응표 등의 장수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해적들을 노려보았다.
[안위야! 이번에는 내 너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
[예! 장군!]
이순신의 외침에 장수들이 일제히 절도 있게 대답을 하며 병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화포를 장전했다.
[쏴라!]
[발포하라!]
판옥선의 화포가 불을 뿜고 화살이 날아갔다. 그것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플라잉 더치맨호를 비롯한 해적선에 마치 하늘의 운석처럼 떨어져 내리며 무차별로 해적들을 학살했다.
“크아악!”
“젠장! 반격해라! 반격해!”
“이쪽도 총과 대포를 쏴라!”
해적들 쪽에서도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고 흉포한지라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아 판옥선의 근처에도 포격을 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상대방 쪽은 일방적으로 이쪽에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에솔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열이 뻗칠 지경!
“크아아! 대체 뭐냐! 대체 뭐란 말이냐! 이런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저런 존재가 있었다고?!”
그는 지금 자신들이 농락당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넬슨 제독마저 꺾었는데 어째서 더 높은 산이 나타나 그들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에솔로는 분통을 터뜨리며 대장선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현찬을 노려보았다.
“이놈!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자!”
16척과 100여 척이 넘는 대결부터 전혀 정정당당하지 않았음에도 에솔로는 처절하게 소리 질렀다. 물론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천하의 멍청이도 아니고 누가 유리한 상황을 버리면서 정면승부를 하겠는가.
[좋다.]
“좋아.”
“어?”
하지만 정말로 있었다. 그런 사람이.
에솔로는 그 말에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상대의 대장선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 제가 다 이겼다고 판단한 건가? 이제와서 제대로 덤벼도 이길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유분수지!’
꽤 많은 해적선이 침몰하고 반파된 함선도 많았지만, 이쪽에는 아직 건재한 배들이 여전히 60척은 넘었다. 그런데도 이쪽을 향해서 달려들다니 그야말로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지 않은가!
‘더 화려하게 이기고 싶어 하는 공에 눈이 멀었구나!’
에솔로는 지금이 기회라는 듯 부하들을 닦달했다.
“뭣들 하냐! 이 멍청이들아! 지금이 기회다! 녀석이 오면 전부 죽여 버려!”
에솔로가 아직도 어버버 거리는 몇몇 부하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와중에 부관이 자신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판옥선을 가리켰다.
“서, 선장님. 저길 보십시오.”
“또 뭔데?”
에솔로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조금 전에 다가오던 판옥선과는 판이한 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저건 또 뭐야?!”
저걸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온갖 날카로운 창의 날이 번뜩 솟아있는 강철 등껍질.
입가에서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용의 머리.
그 주위로 미친 듯이 흘러나오는 뜨거운 증기.
<차용> [거북선(龜船)]
다가오던 16척의 판옥선이 전부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하여 해적들을 정면에서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