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77화 (77/265)

# 77

77화 바다 위의 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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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어떻지?”

영령 <윌리엄 키드>의 계약자인 알레프 자일은 부하들에게 상황을 물었다. 21세기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풍성한 수염과 지저분한 옷가지는 그야말로 16세기에 카리브해에서 판치는 해적의 복장과 매우 흡사했다.

“현재 넬슨의 계약자인 윌리엄 그랜트가 한국에 와 있다고 합니다. 놈들은 지금 부산의 옆에 있는 진해라는 도시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쪽은 그대로 놔둬도 되겠군. 비록 녀석이 강하다고는 하나 이쪽에는 숫자가 많으니까.”

특히나 지금 진해와 부산 쪽으로 진격하는 해적들은 하나 같이 다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한때 해적 시대를 호령하던 유명한 해적들과 계약을 맺은 헌터들이 가득하니, 영웅급 영령이라고 할지라도 이쪽과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쪽은 어떻지?”

“예. 저희가 가는 쪽에는 한국의 신급 영령의 계약자가 있다고 합니다.”

“신급 계약자? 그 강현찬이라는 애송이 말인가?”

과연 신급 영령의 계약자에 최단기간 A랭크를 달성한 그가 애송이인가 싶었지만, 부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괜찮겠습니까? 상대는 어떤 신의 능력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혹여나 신의 분노를 통해 바다에 거대한 풍랑을 일으킨다면 이쪽이 불리해지지 않겠습니까.”

“멍청한 놈. 그 정도나 되는 풍랑을 불러내려면 마력의 소모가 얼마나 되는 지나 알아? 게다가 신급이라고 하더라도 계약한 녀석이 아직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다. 우리들의 홈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이 바다야말로 해적들의 세계, 그들이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들은 언제나 자유의 아래에서 무적을 자랑했다. 상대방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일본의 멍청한 원숭이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한국의 차례겠지.”

알레프 자일은 갑판 바닥을 발로 거세게 쿵쿵 구르며 소리 질렀다.

“모두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라! 파괴와 약탈의 시간이다!”

“끼얏호!”

“가자!”

부하 선원들이 기뻐하며 자신들만의 소리를 내질렀다.

범선부터 갤리선, 거대 함선까지 다양한 해적선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제주도를 향해 진격했다.

그 광경을 본 알레프 자일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믿고 따라와 주니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누구와 싸우더라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적질하고서도 평생 떵떵하게 산 해적들의 우상 <헨리 모건>

바르바로사(붉은수염) 형제라고 불린 <하이르 앗 딘>과 <바바 우르지>

현대 해적에서도 매체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

무굴제국 황제의 보물선을 털어버린 <헨리 에이버리>

이들을 모두 이끄는 <윌리엄 키드>의 계약자인 알레프 자일.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어지간한 국가의 해군력 그 자체와 맞먹는 위력을 지닌다.

그냥 힘으로 밀고 들어가도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이야기.

알레프의 눈이 바다의 지평선 너머, 제주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타고 돛이 펼쳐진다. 해적선들이 빠른 속도로 수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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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대낮의 바다는 언제나 보아도 눈부시다. 햇빛을 받으며 빛을 마구잡이로 흩뿌리는 물결치는 파도는 쉼 없이 산산조각이 나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짜디짠 바람이 피부를 거칠게 자극했다.

FFG-813 전북함 위에 타고 있는 현찬은 정면에서 등장하는 해적선을 평온한 눈길로 직시했다. 3함대의 해군 병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이지스함을 이끈 일본의 해상 자위대에 비하면 가진 배의 크기도 적고 숫자도 적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른 것이 있었으니 바로 현찬의 존재 여부였다.

“함교! 견시 보고! 적 함선! 방위 320! 거리 5000! 본함을 향해 접근 중!”

합교 위의 갑판병이 오스카기를 휘두르며 그렇게 외쳤다.

안내 방송을 통해서 전투배치를 외치며 수병들과 간부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그것은 갑판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직 현찬만이 함수 끝에 서서 가만히 파도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적선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도 아닌데 해적선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역시나 영령의 능력을 통해 현실로 만들어진 배다웠다. 멀었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배 위에 올라선 서로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졌다.

“크하하하! 모였다는 병력이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되다니! 이래서야 우리들의 몸풀기 상대로도 안 되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이래서야 일본 녀석들보다 훨씬 더 손쉬운 사냥이 되겠어!”

두목의 외침에 부하들이 킬킬대며 소리를 내지른다. 놈들의 눈빛은 벌써 전투를 향한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일반 수병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렸다.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헌터가 뿜어내는 살기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선두에 선 알레프 자일이 현찬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그 신급 영령의 계약자라는 놈이냐?”

“그러는 네놈은 누군데?”

“뭐? 나를 몰라?”

눈썹을 치켜뜨며 노려보는 알레프에게 현찬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니까 물어보지.”

“감히 나 알레프 자일을 모른다고?!”

현찬은 괜한 분노를 터뜨리는 알레프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황설영이 조심스레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알레프 자일은 <윌리엄 키드>의 계약자이자 해적 중에서도 이름이 드높아 요주의 인물로 꼽히는 자입니다.”

“윌리엄 키드요?”

“네. 캡틴 키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현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설영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대충 들어는 본 거 같아.”

“뭐! 대충?!”

현찬의 그 말이 오히려 알레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알레프가 검을 뽑아 들자 부하들도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쥐었다. 하나 같이 기세가 흉흉한 것이 아무래도 싸우더라도 봐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애송이 녀석! 그래도 조금 봐주면서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네놈은 반드시 밧줄에 꽁꽁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켜주마! 상어 떼의 먹잇감으로 만들어 주지!”

“남해에 상어가 살던가?”

[살기는 하겠지.]

헤르메스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현찬에게 무시 받았다고 느꼈는지 알레프 자일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놈들을 쓸어버려라!”

“끼야아아앗호!”

“전투다! 싸움이다!”

해적들의 대부분이 자신과 계약을 맺은 <영령>과의 동조율이 높은지 매우 야만적이었다. 그럴수록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해적선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이쪽을 날개를 펼치듯 포위해왔다.

“우리도 반격을 가해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간 당하고 말아요!”

해군들도 배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현찬이 그들을 말렸다.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오히려 이쪽이 당합니다.”

“예? 그, 그게 대체 무슨…?”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말입니다.”

어차피 아무리 이쪽에서 반격을 가하려 해도 저 해적선들을 제대로 쓰러뜨리기엔 요원한 일이었다.

놈들을 쓰러뜨리려면 이쪽에서도 나름의 걸맞은 대응을 해야 했다.

“발사! 쏴라 이 멍청한 놈들아!”

“발사! 마구 쏴라!”

해적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포탄이 순식간에 이쪽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던 사람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날아오는 대포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막에 막히기라도 한 듯 바다로 뚝 떨어졌다.

콰과과광!

바다에 빠진 포탄이 뒤늦게 폭발하여 거대한 물기둥 수십 개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이쪽에는 그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헌터들과 수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함선 주위로 무언가의 막이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대포를 막아 주었고 그들의 목숨을 살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때 여전히 전북함의 함수에 선 현찬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쪽도 가만히 있기만 한 건 아니라고.”

이 모든 일을 일으킨 현찬은 피식 웃으며 알레프를 비웃었다.

[내가 있던 시절에는 해적 따위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거늘.]

현찬과 계약을 맺은 영령은 눈앞에 도열한 해적선을 보며 분노를 터뜨렸다.

조국의 신민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해적들을 소탕한 해양 산업 제국의 무역 왕자.

[감히 어디서 해적 따위가 이쪽에 이빨을 들이민단 말인가?]

<해상왕(海上王) 장보고(張保皐)>

신라시대 한, 중, 일 3개국의 바다를 지배하여 온갖 권력과 부를 쌓은 영웅.

민가에 내려와 약탈을 일삼은 해적들이 판치던 시대에서 모든 해적을 쓸어버린 해적들의 공포.

지금 그가 해적들의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뭐야! 쏴라! 쏴! 계속 쏴라!”

자신들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당황한 알레프가 재차 명령을 내렸다. 대포들이 불을 뿜으며 허공을 가르며 전북함을 향해 날아왔지만, 그것은 재차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서 바다로 떨어졌다.

해적들이 망연해져서는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대체 뭐야?!”

“포, 포격이 먹히지 않아.”

“겁먹지 말고 계속 공격해!”

해적들이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았지만, 그 어떠한 포탄도 이쪽에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직선으로 날아오던 포탄은 직각으로 꺾이더니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우스운 녀석들이구나. 고작 저 정도 공격으로 나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해상왕 장보고를 신라 시대에서 무역 왕국의 왕으로 우뚝 세우게 해준 그가 지닌 천혜의 요새.

<청해진(淸海鎭)>

역사 속의 <업적>이 그의 힘을 빌려서 해상 이동 요새라는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다양한 함대들이 얽히고설킨 그 진형 자체가 천혜의 요새인 청해진 그 자체가 되어 해적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청해진이 활성화합니다. 일정 수준 이하의 원거리 공격이 무효화 됩니다.]

[방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움직이는 요새 청해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바깥에서 가해지는 원거리 공격은 대부분 무효화 하는 것이다. 물론 청해진 자체가 진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움직여야만 그 힘이 유지된다. 진형이 조금이라도 붕괴하는 순간, 청해진은 그대로 와해하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청해진처럼 훌륭한 능력도 없다.

지상에서 안시성이 존재한다면

바다에는 청해진이 존재했다.

더욱이 감은장아기의 축복으로 영령들과의 기본적인 동조율이 대폭 증가했기 때문에 특히나 불러낼 힘이 강해진 덕도 컸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백병전이다! 전원 승선준비!”

“전원! 승선준비!”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

해적들이 전략을 바꾸었다. 원거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배 위에 올라타서 난전을 벌이면 된다. 서로 거칠게 뒤섞이는 싸움이야말로 해적들이 가장 잘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넓게 날개를 펼치듯 진형을 유지하며 포를 쏘던 해적선들이 이쪽을 향해 기수를 돌리며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다. 일부 선원들은 벌써 마스트 위에 올라타 밧줄을 잡고서 이쪽으로 건너올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하지만 현찬은 오히려 그런 녀석들을 비웃었다.

[청해진을 향해 알아서 제 발로 오는 해적들이 있다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로군.]

장보고 또한 그들을 보며 비웃었다.

청해진이 방어만 강해서 요새인 줄 안단 말인가?

자고로 요새란, 쳐들어오는 적들을 모조리 박살 낼 정도로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요새인 법이다.

“전원. 발사 준비.”

현찬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청해진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지금까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의 함포가 방향을 틀어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해적선들을 노렸다.

[발사하라.]

“발사하라.”

현찬의 목소리와 장보고의 목소리가 겹치며 해적선을 향해 청해진의 압도적인 화력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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