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대해적 시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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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흘러가는군.”
새롭게 올라온 보고를 확인한 정기원 실장의 이마에는 그의 수심이 가득 담긴 깊은 주름이 파였다.
해적들이 날뛰기 시작한 지 일주일. 녀석들의 만행을 참지 못한 일본 정부에서 해적들을 향해 선전포고하고서 해군병력을 이끌고 나섰다. 이 전부터 대마도에서 자리를 틀고 가까운 일본 정부를 몇 번 괴롭힌 전적이 있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1만 톤 이상이나 되는 이지스 구축함 1척을 필두로 해서 호위함 3척, 2만5천 톤 이상이나 되는 이즈모급 헬기항모와 강습상륙함을 이끌고서 대마도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이례적인 군사 행동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대한민국 영해에 가까이 가서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일본 정부의 야심도 잠들어 있었다.
방어용으로 활용하는 해상 자위대가 먼저 움직인 것도 놀라운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당당하게 이끌고 간 배들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고 대다수 수병이 바다에 수장되거나 혹은 포로로 잡혀서 대마도로 끌려가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일본 당국은 난리가 났다. 내각 총리대신이 어떻게든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바쁘게 돌아다녔고 해상막료감부의 막료장이 뉴스에서 연일 고개를 숙이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것은 눈치를 보던 한국과 중국에게도 큰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일본 해상 자위대가 먼저 움직인 것은 확실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저 정도 병력이라면 최근 귀찮게 날뛰는 해적들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처참하게 패배해버리고 만 것이다.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해적선을 몇 척 침몰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병기로 무장을 한 구축함과 이지스함을 이끌고 패배했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역시 바다에서 제힘을 발휘하는 영령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영령의 힘을 빌려야 하는가.’
해적들이 소환하는 배들은 지금 보면 다 구시대의 유물이겠지만 영령의 힘이 담긴 그것들은 오히려 현대의 함선보다 더 강한 면모를 보였다. 단순한 화포가 함선의 강철 장갑을 손쉽게 찢어발겼고 시속 30노트 이상을 유지하는 고속정도 바람이 불지 않은 해상에서 쉽게 따라잡는 속도를 자랑한다.
녀석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부른 것이 <호레이쇼 넬슨>의 계약자인 윌리엄.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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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해적들이 무척 날뛰네.”
해적들이 약탈을 벌이는 일은 <대통합> 이후로도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해진 적은 없었다. 현찬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날아온 문자를 보며 고민했다.
문자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헌터들 중에서 혹여나 해적들을 소탕할 자가 있으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준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직접 녀석들과 의무적으로 싸워야 하는 해안 도시 헌터들을 제외하면 서울지부 대부분의 헌터들은 별로 싸움에 참여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피해가 심각하기는 한가 보구나.’
게이트 입구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순위를 살피던 현찬은 사태가 생각 이상으로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어쩔 거야?]
“어쩌긴.”
현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부터 현찬이 부른 몬스터 시체 수거 업체의 차량이 줄지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다 때려잡아야지.”
현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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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해적소탕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세간의 이목을 불러왔다. 밥을 무엇을 먹어도 현찬에 관한 것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던 기자들로서 현찬이 해적들과 싸우겠다고 나선 것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특종 덩어리였다.
벌써 포털 사이트에는 현찬에 관한 기사가 하나둘씩 생겼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정기원 실장은 현찬에게 확인 차 물었다. 굳이 현찬이 이런 싸움에 참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오는 이득은 없었다. 현찬의 실력이라면 상대하기 귀찮은 해적들을 잡는 대신 3등급 게이트 하나라도 더 클리어하면 얻을 수 있는 돈이 더 많았으니까.
“네. 물론 괜찮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정기원의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현찬의 흔쾌한 승낙이었다.
어떻게 보면 현찬이 너무나도 정의로워서 이런 일에 팔 거들고 나선다고 볼 수 있겠지만 현찬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S랭크 헌터로의 승급 조건이었다.
A랭크 헌터까지는 추천 제도가 존재 하지만 S랭크의 경우에는 애초에 추천이 불가능하다. 하려면 오버랭크 헌터가 추천을 해야 하는데 세상에 오버랭크가 흔하단 말인가?
무엇보다 S랭크 헌터는 국가의 국력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그런 자들을 각 국가에서 멋대로 등급을 매기며 만들어낸다면 이는 국제사회에 혼란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S랭크 헌터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헌터관리국의 엄밀한 테스트와 검사를 통해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S랭크 헌터가 되기 위한 조건들은 상당히 많다.
그것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3등급 게이트를 수차례 클리어하며 국가 단위의 위험에 처한 일들을 해결하는 등 매우 뛰어난 업적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협회 소속의 김은혁은 혼자서 한국 내부에 존재하는 데스페라도 지부 하나를 괴멸시켰다.
화랑 클랜의 클랜장인 최덕현도 부하들과 함께 미국 에리조나 주에 있는 2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그 외에도 S랭크를 달성한 헌터들은 그들만의 훌륭한 업적이 있었다.
당연히 현찬에게도 그것은 필요로 했다.
혼자서 3등급 게이트를 몇 차례 클리어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A+에서 S가 되는 것과 A에서 바로 S로 가는 것의 격차는 크니까. 여기서 화룡점정을 찍을 커다란 업적이 하나 필요했다.
현찬은 그 해답을 바로 해적들에게서 찾았다.
무려 3개의 강국 사이를 누비며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해적!
놈들을 쓰러뜨린다면 S랭크 헌터라는 업적을 충분히 다룰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숟가락을 얹는 행위는 안 된다. 현찬이 모든 것을 주도하여 주인공의 포지션에 있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겠지만, 현찬은 충분히 자신이 있었기에 오히려 정기원 실장의 조심스러운 의견을 반겼다.
정기원 실장도 현찬이 해적 소탕에 참여한다고 해서 기뻐했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현찬은 그의 표정이 왜 저런가 했는데 그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흥.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
얼굴에 선글라스를 낀 훤칠한 금발의 남자. 머리카락은 뒤로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올백으로 만들었으며 콧대가 높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삐뚤어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말들은 전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그랜트.
영국의 S랭크 헌터이자 영웅급 영령 <호레이쇼 넬슨>의 계약자다.
“윌리엄 그랜트님. 모시러 왔습니다.”
“가시죠.”
윌리엄 그랜트는 기본적으로 거만한 사람이었지만 타국의 정부 사람에게 괜한 트집을 잡으며 인신공격을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들의 인도에 따라서 움직였다.
그런 그가 현찬과 직접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협회에서 서로 마주친 둘은 가볍게 서로를 살폈다.
‘이 사람이 영국의 S랭크 헌터? 좀 대단한 영령과 계약을 맺었나 보네?’
‘이 녀석이 바로 그 유명한 신급 영령의 계약자인가? 겉보기로는 순해 보이는데, 쉽게 무시할 수 없겠어.’
둘은 서로 악수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윌리엄 그랜트.”
윌리엄으로서는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동양의 사람과 악수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것은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매우 건방진 행동이었다.
물론 현찬은 별로 개의치 않게 여겼다. 애초에 서양에서는 누군가를 향한 높임 표현이 잘 안 돼 있는 것도 있고 그저 성격이 무뚝뚝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물론 그 광경을 지켜보는 협회의 사람들은 혹시나 둘이 서로 싸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악수를 끝낸 둘은 서로 별다른 마찰이 없이 떨어졌다. 협회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리 대기시켜놓은 헬기로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을 안내했다.
프로펠러가 거세게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헌터들을 태운 헬기들이 허공을 날아 남쪽으로 진격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귀에 헤드셋을 낀 현찬은 정부 요원이 건네준 아이패드를 통해서 대략적인 브리핑 자료를 훑어보았다. 해적들이 누가 있는지, 그들이 주로 어디에서 활동하는지. 상당히 유용한 정보였다.
‘헤르메스. 어떻게 생각해?’
[그 영국의 헌터?]
‘어. 그 사람. 그리고 영령.’
[음. 좀 거만한 사람인 거 같은데, 영령이 가진 힘과 업적은 진짜야. 성격은 개차반이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은 신인 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
현찬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서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군세에서 영국을 지켜낸 영웅 넬슨 제독은 해외의 영령에 까막눈인 현찬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아니 그냥.’
현찬은 헬기의 창 바깥, 지평선 너머에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대답했다.
‘그쪽에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쪽에서도 조금은 열심히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킥킥! 그거 재미있겠네. 선의의 경쟁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구경하는 재미는 있겠어.]
헤르메스는 앞으로 벌어질 해전을 기대하는지 두근두근한다는 표정을 만면에 드러냈다.
현찬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여망(輿望)한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맺혔다.
남쪽으로 향하던 헬기는 총 2개로 갈라졌다.
넬슨 제독의 계약자인 윌리엄 그랜트를 필두로 한 1팀은 대마도 섬과 가까운 진해 해군 기지 사령부로.
현찬을 필두로 한 2팀은 그대로 쭉 남하하여 제주도 강정마을에 자리 잡은 민군합동 해군 기지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 한국 정부의 움직임을 모르는 해적들이 아니기에, 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크게 데여서 병력을 움직일 여력이 없는 일본 정부는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고 중국의 경우에는 한국이 먼저 선수 치고서 움직인 상태라서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해 가만히 있었다.
바야흐로, 21세기에서 새로운 해전이 발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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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지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별 2개를 단 소장이 헌터들을 반겨주었다. 의장대가 그에 맞춰 힘찬 음악을 연주하고 정복을 입은 해군 수병들이 일렬로 줄지어서 이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취했다.
굳이 귀찮은 의례는 생략하고픈 게 현찬의 생각이었지만 해군들은 이런 부분에서는 칼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찬과 함께 2팀에 소속된 황설영이 대표로서 나서며 소장에게 물었다.
“예. 현재 해적들이 총 2개로 나뉘며 각자 부산과 이쪽으로 진격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쪽도 저희의 진의를 눈치챈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노리고 오지는 않겠죠.”
이쪽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을 알면서도 이쪽을 향해 진격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만큼 지금 해적이 싸워서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안 그래도 일본의 해상 자위대를 박살을 냈으니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21세기의 과학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영령의 힘이 담긴 함선과 싸우는 것은 이쪽으로서도 힘듭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현찬이 앞으로 나섰다.
“호, 혹시 강현찬 헌터님입니까?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이해합니다.”
“그보다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우리나라에는 아직 해전에 특화된 영령이 없다고 들었는데.”
“물론 지금까지는 없었죠.”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현찬이라면 그만한 영령을 충분히 부를 수 있다.
해적? 날뛸 테면 날뛰어 보라지.
이쪽에는 그 이상 가는 존재가 있으니까.
[해적]을 상대로 그야말로 극강의 상성을 자랑하는 영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