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천신 제우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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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하늘과 천둥 벼락, 왕권을 관장하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최고의 신.
그가 가진 힘.
그가 가진 권능.
그것이 어떠한 신들보다도 지고하며 강하다는 것에 그 누구도 이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한번 정리를 했는데도 계속 몰려오는구나.]
지금 펼쳐지는 광경처럼 말이다.
콰가가가각!
거대한 소용돌이 수십 개가 몰아치며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을 빨아올린다. 넓은 대지를 까맣게 뒤덮고 있던 <심연>의 몬스터들은 바닥에 찰싹 달라붙으며 바람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저항했지만,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에 잡힌 애벌레가 나뭇잎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악에 불과했다.
수챗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거대한 용오름은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물론 그 강렬한 힘에 지면이 뒤집히고 나무가 뿌리 째 뽑히는 등 주변 풍경이 훼손되었지만 <심연>의 몬스터들의 수를 고려하면 기적과도 같은 결과물이었다.
그 광경에 헌터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급 영령의 계약자이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S랭크 헌터라도 지금 현찬이 보여주는 모습의 극히 일부조차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미쳤어.’
‘저게 개인의 힘이라고?’
맨땅에 성을 지어냈을 때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 와서 더 대단한 광경을 목격하니 이제는 질투심조차 들지 않는다.
현찬에게 드는 감정은 그저 무지막지한 경외감뿐.
질투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나 차원이 다른 존재에게는 그런 추악한 감정 따위 그저 바람 앞의 한 줌 모래에 지나지 않았다.
현찬, 아니 현찬의 몸을 빌린 제우스는 깔끔하게 정리된 주변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를 바라보았다.
일단 한 번 시원하게 밀어낸 덕분인지 <문>에서 더는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금 문 전체를 저 초거대 괴수가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는 촉수의 뿌리 부분이 점차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는 즉 곧 저 녀석의 본체가 지구로 넘어온다는 소리.
녀석의 본체가 넘어오면 넓어진 <문>을 통해 또다시 괴물들이 몰려올 것이다. 어쩌면 그 뒤를 이어서 제2의 저 거대괴수가 넘어올지도 몰랐다. 저 녀석이 넘어오기만 해도 생길 피해가 예측이 불가능한 데 그 뒤에 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헌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 이쪽이 손써야 했다.
크워어어어어!
제우스가 하늘을 날아서 가까이 다가가자 촉수들이 몸을 한차례 바르르 떨더니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기괴망측한 소리를 내뿜었다.
녀석도 느꼈다.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녀석은 그런 두려움을 떨쳐냈다. 녀석은 나름 <심연>에서도 피라미드의 거의 최상위층에 자리 잡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본신이 한 번 움직이면 수백 마리가 넘는 조무래기들이 깔려 죽었고 한 번 식사할 때면 수천 마리가 넘는 괴물들이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와 비슷한 존재가 <심연>에 더 있다고 하더라도 녀석은 약하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포식자이자 맹수였고 모든 자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두려움을 품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은가!
그것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녀석은 현찬의 몸을 빌린 제우스를 향해 거대한 촉수를 뻗었다.
길이는 무려 800m. 가장 둘레가 얇은 끝부분마저도 사람 하나를 가볍게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촉수가 제우스를 향해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거대한 산 하나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쩌억!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촉수의 끄트머리가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2개의 촉수가, 그 2개의 끝이 갈라지더니 거기서 새로운 4개의 촉수가 그리고 그 끝에서 또 갈라지며 촉수들이 무수히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 줄 때 터뜨리는 폭죽을 연상했다. 다만 일반적인 폭죽과 다른 점은 튀어나오는 것이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아닌, 거무튀튀한 징그러운 촉수라는 것이었다.
촤라라락!
제우스의 시야 전체를 뒤덮는 수만 가닥 촉수의 향연!
하지만 제우스는 그 광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우습구나.]
이런 녀석에게는 손을 휘젓는 수고를 들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그의 의지, 아주 미약한 의지의 파편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먹구름이 한차례 잘게 진동하더니 이내 그 검은 몸뚱이 속에서 무언가를 무수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하나의 크기가 거대한 그것은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박이었다.
콰가가가가각!
수만 가닥의 촉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우박에 물에 젖은 박스처럼 처절하게 찢겨 나갔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승용차에 맞먹는 우박은 밤공기를 가르고 떨어져 내리며 촉수를 찢고 으깨더니 지면에 추락하기 전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촉수 자체가 어지간한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그 탄력은 검으로도 쉽게 벨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신력이 가득 담긴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런 촉수를 너무나도 가볍게 없애버렸다.
쿠오오오오!
자신의 신체 일부가 사라지자 거대괴수는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이 녀석의 몸 전체를 내달리고 있었다.
괴로울수록 괴물은 하늘을 향해 더욱 촉수를 뻗으며 자신의 몸을 <문>에서 뽑아내려고 했다. 본체만 나온다면, 이런 좁은 공간에 몸이 묶여있지만 않는다면, 제대로 싸운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벌레처럼 작은 녀석을 으깨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 의도를 느꼈기 때문일까.
제우스는 오히려 녀석을 비웃었다.
조금 전에 험한 꼴을 당하고도 힘의 격차를 느끼지 못했는가.
하늘을 향해 촉수를 뻗으려고 하다니 마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건방진 태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보여주마. 내가 어째서 최강의 신인지.]
우르릉!
먹구름에 가득 찬 우렛소리가 천지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먹구름의 틈새로 새하얀 전기로 이루어진 무지막지한 폭력의 짐승이 빨리 자신을 풀어달라며 그 날카로운 이빨을 혀로 핥았다.
[하늘의 재앙을 맛보아라.]
이 말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었다.
하늘을 향해 수십 가닥의 촉수를 뻗은 괴물의 위로 새하얀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두께만 무려 500m나 되는 그것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거대한 통로 같았다.
아니, 그것은 빛의 기둥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한…… 벼락 그 자체였다.
상대방이 수만 가닥의 촉수를 날려 주었으니 이쪽도 그에 따른 답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받은 것이 있다면 당연히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제우스는 그 성의를 보아서 직접 수만 가닥의 벼락을 저 거대 괴수에게 내리꽂아 주었다.
파지지지지직!
강력한 전류는 뜨거운 열을 동반한다.
피부를 태우다 못해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벼락이다. 그런 벼락이 무려 수만 개나 떨어져 내렸다.
소리는 컸다. 하지만 한 번만 울렸다. 모든 벼락이 한 번에 동시에 떨어지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이 딱 한 번 내리친 것처럼 들린 것이다. 다만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수 킬로미터 밖에서 대기하던 다른 헌터들조차 듣고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무, 무슨 일이야?!”
“저기에 대체 뭐가 벌어지고 있는 거지?”
수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음에도 순간적이나마 느낀 광량, 그리고 뒤를 이은 벽력성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흠. 깔끔하군.]
제우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에 만족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턱수염이 아닌 반들반들한 턱이 잡혀서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일종의 버릇 같은 행동이라 멈추지는 않았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었던 수십 가닥의 거대한 촉수는 벼락을 맞으며 끝부분부터 바스러져 가루로 흩어졌고 촉수의 근원지인 육체는 새까맣게 타버린 숯덩이처럼 탄소 덩어리로 탈바꿈했다.
그야말로 전쟁 이후의 폐허가 된 참상을 고스란히 가져다 놓은 것 같은 풍경.
하지만 놀랍게도 거대 괴수는 아직 살아 있었다.
[호오?]
더욱 놀랍게도 괴물은 자신의 육체의 부피를 줄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종이를 접기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은 스스로 몸을 줄이더니 이내 한 사람의 형태를 취했다.
그것은 철 가면이었다.
몸 곳곳에 촉수가 돋아나고 착용하고 있던 가면 자체가 신체와 동화되어 얼굴 그 자체가 되었다. 녀석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철 가면을 매개로 지구에 나타난 괴수는 그 철 가면의 육신과 융합하여 새로운 몸을 얻은 것이다.
파지지직!
철 가면의 몸 주위로 전류가 휘몰아쳤다. 이것은 철 가면이 가지고 있던 능력.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주변에 흐르는 전류의 색깔은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검은 번개.
철 가면의 입가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새롭게 얻은 육신에, 새롭게 얻은 힘에 도취해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낀 것이다. 억지로 <문>을 넓히던 육신이 사라져서 <문>은 다시 원래의 자그마한 크기로 되돌아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힘이라면, 이 능력이라면 혼자서라도 이 세상을 충분히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첫걸음의 희생자는 바로 제우스였다.
파지지직!
검은 번개가 제우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땅에서 하늘을 향해 역방향으로 치솟은 검은 번개는 그 충격만으로도 주변의 대지를 뒤집어엎으며 거대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하지만.
[우습기 짝이 없구나.]
검은 번개는 제우스에게 닿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에서 녹듯이 사라졌다.
제우스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천한 마물을 비웃었다.
감히 천둥과 벼락의 신에게 번개로 공격했단 말인가?
이보다 더 멍청한 만용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알려주마.]
본신의 힘을 다하지 않으려고 했던 제우스였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저쪽에서 설마 자신에게 번개를 쏘아붙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제우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결국에는 꺼내지 않으려던 걸 꺼내게 했다.
[번개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세상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사그라졌을 때 제우스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새하얀 번개가 쥐여 있었다.
아주 작고 가느다란 한 줄기의 번개.
하지만 그것은 제우스가 조금 전에 떨어뜨렸던 수만 가닥의 번개 줄기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아스트라페(Astrape)>
제우스가 가진 번개 자체의 상징이자 최강의 무기.
제우스는 그것을 철 가면을 향해 집어 던졌다.
“……!”
철 가면은 검은 전기를 최대한 일으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직후 거대한 빛이 터져 나왔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철 가면의 육체를 빌린 괴물도 <심연>과 연결된 <문>도.
전부 다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크레이터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