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부활하는 심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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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또 그 녀석인가. 진짜 귀찮게 하네.”
현찬은 자신의 주위를 끈덕지게 따라붙는 검은 연기를 무기로 휘저었다. 이 검은 연기만 있었다면 테레이오스테에 내장된 불의 힘을 이용해 태워버릴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바로 시야를 차단한 상태에서 다가오는 골렘들이었다.
골렘들은 빠르고 강했다. 만들어진 생명체라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을 아득히 상회하는 힘을 지녔으며 그것은 헌터에게도 충분한 타격을 가할 만한 능력이었으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가오는 골렘의 일격은 퍽 귀찮은 것이어서 아무리 현찬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 가면이 추가로 도입한 부하들이 일제히 현찬을 노리고서 달려든 것이다. 그야말로 이중 삼중으로 가해지는 공격은 새 가면이 현찬을 얼마나 위험하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현찬이 검은 연기를 불태우고 수십 구가 넘는 골렘들을 모두 쓰러뜨리며 새 가면의 부하들을 베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즐비한 시체와 싸움의 흔적은 도저히 3분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새 가면 정도나 되는 자에게는 도망치기 매우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망쳤나?”
검은 연기를 뚫고 골렘들을 모조리 박살낸 현찬은 주변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철 가면과 새 가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빠르게 쫓는다면 녀석들을 다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을 때다.
“뭐야 저건?”
도시가 있는 방향.
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확연히 보이는 ‘거대한 촉수’의 모습은 아무리 다양한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단련이 된 현찬이라고 하더라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저건…….]
현찬이 그런 말을 내뱉었고 헤르메스도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었는지 눈을 가늘게 좁히며 허공으로 타오르는 불길처럼 넘실거리는 수십 미터짜리의 검은 촉수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더니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심연>
헤르메스가 본격적으로 현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던 때.
현찬이 처음으로 헤르메스의 힘을 빌려 태양의 신 아폴론을 강림시키던 그때.
온갖 미지와 신비 그리고 어둠과 혐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그 심연이었다.
“심연이 대체 왜? 저 차원 통로는 폐기한 게 아니었어?”
[폐기한 것이 맞아. 다만 누군가가 강제로 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헤르메스는 이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현찬 또한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했다. 그가 보는 세계 위로 다양한 정보창들이 덧씌워진다. 하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았다. 단순히 <심연>의 흔적의 일부를 보았을 뿐인데도 흘러들어오는 정보의 양은 엄청났다.
살짝 두통을 느끼며 현찬은 능력을 제어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을 조절했다. 아주 살짝이라도 삐끗했다가는 막대한 정보는 해일처럼 몰려와 현찬의 뇌를 그야말로 곤죽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랐다.
“…… 정말이네.”
정보를 보아하니 무언가를 제물로 삼아 강제로 게이트를 연결한 것이다. 원래 <심연>의 차원은 다른 차원들과 다르게 지구와 상당히 멀어져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짓을 벌인 게 누구인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리라.
대체 어떤 수작을 부려 게이트 사태를 억지로 일으키거나 이렇게 다른 차원과의 <문>을 열어버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혼란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비밀조직이니 나름의 방법이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제길. 이래서야 잡으러 갈 시간도 없는데.”
아무리 현찬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래를 보는 힘이 있지 않고서야 <심연>의 문을 다시 열어버리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린단 말인가.
어지간한 게이트가 열린 것도 아니고 무려 <심연>과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 <심연>이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는 모르지만 딱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저 세계는 그야말로 지금까지 보았던 어떠한 몬스터보다 더 끔찍한 괴물들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 좁은 <문>의 틈을 비집고서 튀어나오려는 거대한 촉수들만 봐도 그렇다. 굵기는 수 미터에 달하고 길이는 거의 100m에 근접한 촉수 수십 가닥이 문을 비집고 찢으며 점점 크기를 늘려가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은 구멍과 촉수들의 틈새 사이에서 현찬이 훈련생 시절 실전 훈련을 받을 때 주로 사냥하던 촉수 괴물들이 마치 바퀴벌레 떼처럼 와르르 쏟아져 나오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크기도 예전에 <통로>에서 보았던 녀석들보다 더 크고 움직임도 빨랐다. 중간중간 이상한 갑각으로 이루어진 그로테스크한 벌레 괴물들까지 종종 모습을 보였다.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미리 대기하던 협회의 헌터들이 나섰다.
“이런 젠장! 모두 막아!”
“일반인들 대피시키고 빨리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
“젠장! 다른 놈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헌터들이 온갖 공격을 퍼붓자 촉수 괴물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협회의 헌터들은 약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늘 대부분 철 가면을 생포하기 위해서 나선 헌터들이다 보니 대부분 기본적인 실력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무려 30명이 넘게 모여 있다. 그들의 리더인 황설영 또한 마찬가지. 머리에 갓을 쓰고 손에 든 기묘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녀는 그야말로 검은 괴물들의 틈새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콰과광!
황설영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 것처럼 괴물들의 몸이 터져나가거나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방망이를 쥐지 않은 손을 가볍게 휘저을 때마다 푸른 도깨비불이 산불처럼 일어나 괴물들을 불태웠다.
날뛰는 것은 김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협회의 S랭크 헌터다!”
“이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어!”
김은혁의 강함을 ‘믿는’ 헌터들로 인해 <봉이 김선달>의 <허언구현>이 발동되었다. S랭크 헌터라는 타이틀과 허언구현으로 인해 강해진 힘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 정도였다.
A+랭크인 황설영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전장을 누비며 촉수 괴물들을 쓰러뜨리는 김은혁은 그야말로 군계일학. 주변 헌터들이 승리를 확신할 정도로 김은혁의 전투 능력은 걸출했다. 그의 손에서 온갖 다양한 도술이 펼쳐지며 촉수 괴물들을 대규모로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양 떼 사이에서 날뛰는 호랑이와도 같은 기세.
하지만 그러한 헌터들의 훌륭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쓰러지는 괴물들보다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촉수 괴물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황설영 헌터님! 협회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다른 클랜의 지원은?”
“지금 긴급호출을 받고 오고는 있지만, 아직 시간이 더 걸립니다!”
“칫! 모두 방어 전선을 유지한 채 뒤로 물러난다! 녀석들이 다른 곳으로 세어나가게 해서는 안 돼!”
쿠워어어어어!
<심연>의 괴물들은 딱 봐도 여타 몬스터들과 다르게 위험해 보인다. 어지간한 공격으로 타격조차 입지 않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과 보기만 해도 기분을 우울하게 만드는 끔찍한 외형. 지면을 빽빽하게 덮을 정도로 막대한 수까지.
콰아앙!
“크헉!”
“으악!”
거대한 볼링공처럼 굴러다니는 거대한 심연의 몬스터 하나가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단단한 갑주와 거대한 육체를 돌돌 말아서 빠르게 굴러가며 헌터들을 날린 녀석은 멈추는 기색이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딜!”
그런 녀석을 나서서 막은 것은 바로 이제 막 전선에 합류한 POH클랜의 강덕수였다. 그가 내지른 정권이 그대로 굴러오는 몬스터의 정 중앙을 제대로 가격했고 세상에 두려울 것 없이 내달리던 몬스터는 단단한 껍질이 풍선처럼 터져나가 절명하고 말았다.
지원군이 속속히 등장했지만 한번 무너진 방어선은 복구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몬스터 전용 방벽조차 쌓지 못한 급한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된 방어 진형을 짤 수도 없었고 결국 헌터들은 계속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심연>과 통하는 문이 열린 장소는 도시와 가까운 장소다. 철 가면이 중간에 무언가 눈치챘기 때문에 완전히 도시 안쪽에서 참사가 발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괴물들이 도시 안쪽으로 몰려가게 된다면 큰일이다.
“막아!”
누군가 그렇게 소리 질렀지만 그야말로 검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괴물들의 군세는 이전 수원시 게이트 사태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극강 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파멸의 파도가 도시를 향해 밀려들었다.
&
“으아아아!”
B랭크 헌터 박해일은 고함을 내지르며 단검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촉수 괴물을 찔렀다. 검은 피가 튀며 그의 몸을 적셨지만, 박해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몬스터의 사체를 밀어낸 박해일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심연>의 괴물들이 도시로 몰려온 것이 바로 조금 전. 박해일이 긴급 경보 호출을 받고서 지원을 나온 것이 바로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가 막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심연의 괴물들이 도시에 들이닥치는 와중이었고 그는 상황을 브리핑받기도 전에 먼저 몸을 날려 몬스터들을 쓰러뜨렸다.
놈들은 끔찍해 보이는 외견과는 다르게 박해일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다만 꿈틀거리는 촉수의 변칙적인 움직임과 선뜻 다가가기 힘든 징그러운 모습이 흠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수가 많다면 위험한 법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아무리 혼자서 충분히 사냥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계속 지속한다면 당연히 지치는 법이었다. 곳곳에 잔상처가 늘어나고 체력의 한계가 순식간에 찾아왔다.
‘도망칠까?’
박해일은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끔찍한 괴물들에게 당한다면 대체 얼마나 끔찍하게 살해당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런 험한 꼴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몰래 도망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언니. 무서워!”
“괜찮아. 여기 헌터님이 우릴 지켜주실 거야.”
박해일은 등 뒤에서 겁에 질린 채 서로 껴안고 있는 초, 중학생의 자매를 도저히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다 막 귀가하던 참이었던 두 소녀에게 있어서 지금 벌어지는 <심연> 사태는 너무나도 운이 나빴다고 해도 모자랐다.
박해일은 이를 악물고 괴물들과 싸웠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다. 수원시 사태에서도 혼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남아서 몬스터에 대항했다. 그는 그런 호인이었다.
‘내가 도망치면 이 아이들은 죽는다.’
약자들의 기분은 잘 안다.
왜냐하면, 박해일 그는 F랭크 헌터로 시작해서 노력 끝에 B랭크까지 올라온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다른 헌터들에게 무시 받고 멸시받던 F랭크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약자들의 기분을 잘 헤아렸다.
그러니 박해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어찌 도망치겠는가. 어찌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약자에게만큼은 반드시 잘해주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것도 끝인가.’
[해일! 포기하지 말게나!]
그의 영령이 말을 걸어주지만 이미 체력의 한계는 명확했다. 어떻게든 좁은 길목으로 들어왔기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이 이상은 그로서는 불가능했다.
‘최소한 저 아이들만이라도 지켜야 해.’
자신이 죽더라도 아이들만큼은 살려야 했다.
박해일이 결사의 각오를 하고서 단검을 고쳐 쥐었다. 이미 넝마가 되어 방어구로써의 가치조차 하지 못하는 철 쪼가리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지고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입가에 고인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자리에서 몇 번 통통 뛰었다.
“간다.”
박해일이 눈을 부라리며 눈앞에 다가오는 촉수 괴물을 향해 단검을 겨누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촉수 괴물들은 자신들의 틈바구니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바닥의 착지한 자가 자세를 잡는 순간 주변으로 날카로운 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불꽃이 튀거나 긁히는 소리는 없었다. 절삭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콘크리트 바닥을 포함해서 건물 외벽 따위도 마치 두부를 썬 것처럼 부드럽게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있던 촉수 괴물들의 결말이야 불 보듯 뻔했다.
강현찬.
그가 도시에 파고든 괴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