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부활하는 심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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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철 가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들썩였다.
그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가 걸친 거대한 로브는 여기저기 찢기고 먼지투성이였으며 드문드문 보이는 그의 우람한 팔뚝이나 다리에는 자잘한 상처로 가득했다. 그가 쓰고 있는 철 가면의 모서리 부분도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우그러져 있었다.
반면에 철 가면의 상대인 현찬은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야밤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현찬의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 달빛 아래에 칠흑 같은 검을 든 현찬의 모습은 마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같았다.
빠드득!
철 가면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고작 전투에서 현찬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만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설사 자신과 같은 사도라고 할지라도 그의 힘 앞에서는 쉽게 무릎 꿇게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뭐란 말인가.
자신은 완전히 넝마 꼴이 되었고 현찬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어디 겉모습뿐인가. 철 가면은 체력이 떨어져 숨을 헐떡이는데 현찬은 멀쩡했다. 그것이 그의 높은 프라이드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남겼다.
‘제길! 대체 녀석의 정체가 뭐지?!’
철 가면은 현찬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몇 번의 격돌 끝에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어 봤자 바닥을 나뒹구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며 차분하게 현찬을 살폈다.
‘빈틈이 없어.’
어떻게 보면 아주 편하게 있는 자세 같지만, 막상 냉정하게 살펴보니 현찬에게는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무기도 만만치 않아.’
철 가면은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자신의 검은 건틀릿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2급 몬스터인 기간틱 터틀의 등껍질로 만든 최고 경도의 무기가 저 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심지어 모습이 자유자재로 바뀌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무기였다.
그는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싸우면 내가 위험하다.’
철 가면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힘이 빠져서 사로잡히고 만다.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일단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힘의 소모가 크지만, 광역으로 전기를 흩뿌린다면 현찬의 정신을 교란하고 몸을 뺄 기회가 생기리라.
‘어쭈?’
현찬은 철 가면의 소극적인 태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읽혔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도망치려는 속셈인데, 저 녀석 영령의 정체가 대체 뭐야?’
[흐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전기를 사용하는 영령 중에서 저런 녀석이 있었나?]
신화 속의 괴물 중에서도 전기를 사용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예로부터 전기는 곧 번개. 번개란 하늘에서 내리는 신벌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신화나 이야기 속에서 번개를 다루는 존재들은 언제나 최고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철 가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전기의 힘은 강력했지만, 번개를 다루는 위대한 존재들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랐다. 그 힘은 높게 쳐줘도 영웅급. 절대 신급이라 할 수 없었다.
보통 어지간한 영령들은 헤르메스가 다 안다. 하지만 그 헤르메스조차도 철 가면의 영령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라고 모든 영령을 다 아는 것은 아니야. 분명히 아주 소수의 사람만 알던 영령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닌 영령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는데.]
헤르메스의 의문은 거기서 끝났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철 가면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지지직!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푸른 전류는 그대로 철 가면의 의지에 따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갔다.
반쯤 포장된 콘크리트 바닥이 뒤집히고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과 가로수들이 고압 전류에 타오르며 쓰러진다. 주변에 건물이 없는 장소라 다행이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더라면 큰 재산 피해를 냈을 테니까.
철 가면은 이 틈을 노리며 도망을 쳤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날쌔고 재빨랐다. 그 두꺼운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그의 몸이 십 수 미터씩 하늘을 날았다.
단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도 그는 순식간에 전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도망이라고 쳤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철 가면은 몸을 뒤틀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현찬을 향해 내지른 주먹이 먼저 도달하기 전에 그의 옆구리에 강렬한 충격이 내달렸다.
“크흡!”
폐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며 허공에 뜬 철 가면의 몸이 지면으로 처박혔다. 쿠웅! 철 가면이 흙으로 된 지면에 처박히고 뿌연 먼지구름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서늘한 밤바람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쿨럭!”
철 가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 전에는 제대로 카운터 어택을 당하다 보니 피해가 막심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도망치는 자신을 가볍게 따라잡을 줄이야.
‘허억! 헉! 도망칠 수 없는 건가?’
하지만 더욱 철 가면을 절망케 하는 것은 현찬이 지금도 자신을 계속 봐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찬이 마음만 먹었으면 철 가면을 진작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철 가면이 현찬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현찬이 그를 제압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빌어…… 먹을!’
바로 전까지만 해도 현찬을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는 이제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머리를 최대한 굴리는 하찮은 악당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철 가면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추해도 좋았다. 그분의 대업을 자신이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정 안 된다면 당장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도인 자신들에게 금제는 걸려있지 않기에 강제적인 죽음은 없지만, 이 건틀릿으로 뒤덮인 손으로 심장을 꿰뚫으면 죽는 게 가능하니까. 다만 현찬이 그것을 쉽게 허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생각은 다 정리했어?”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현찬이 철 가면을 향해 다가갔다. 철 가면은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현찬에게 저항하기로 다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연기가 현찬의 몸을 휘감았다.
“이건?”
[지난번에 봤던 놈이야!]
검은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현찬의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심지어 맹독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현찬의 주변에 나 있는 식물들이 순식간에 시들었지만, 현찬은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구하러 왔다.”
철 가면의 옆에 새 가면이 나타났다. 철 가면은 반가움에 소리치려고 했지만 새 가면의 말이 더 빨랐다.
“이야기는 나중에. 나의 능력으로도 고작 짧은 시간을 붙잡는 것이 전부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해.”
새 가면이 손을 휘젓자 땅이 푸스스 일어나더니 이내 사람들의 형상을 갖추었다. 마법사 클래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골렘 스킬이었다. 골렘들은 새 가면의 명령에 따라 아직 검은 연기에 휩싸인 현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정도라면 시간을 버는 정도는 충분하리라. 새 가면은 그대로 철 가면은 부축하여 그 자리에서 빠르게 도망쳤다.
“크윽!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
철 가면의 감사에도 새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철 가면을 부축하며 검은 로브를 날개처럼 휘날리며 허공을 부유하듯 이동했다.
“그보다 우리 지금 어디로 이동하는 거지?”
원래라면 그들은 최대한 인적이 없는 깊은 숲이나 산으로 가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메뉴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새 가면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도시의 네온사인과 불빛이 뿜어내는 야경은 밤인데도 거대한 횃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려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풍경과는 반대로 철 가면은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직감했다.
이 알 수 없는 불안감. 당장에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봐! 대체 어디를 가는 거냐고!”
철 가면이 버럭 소리 지르자 새 가면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께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했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냐?”
무언가 이상하다.
철 가면이 몸에 힘을 주어서 새 가면에게서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커헉!”
새 가면의 날카로운 손끝이 그대로 철 가면의 등을 뚫고 파고들었다. 뜨거운 인두로 등을 지지는 고통에 철 가면은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꺽꺽거리는 괴상한 소리뿐이었다.
새 가면이 피가 묻은 손을 뻗자 철 가면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새 가면은 철 가면을 바닥에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고통에 몸을 비틀며 숨을 몰아쉬던 철 가면은 이를 악물었다.
“내, 내 몸에 뭘 넣은 거야!”
“씨앗.”
새 가면은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철 가면이 눈을 부릅떴다.
씨앗. 그것은 사도들이라면 절대로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주로 게이트 사태를 강제로 발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그분의 힘이 담긴, 다른 세계와의 통로를 강제로 이어주는 방아쇠.
“내, 내 몸에 그걸 심었다고?! 대체 왜!”
“너는 너무나도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 이것은 그분께서 내린 명령이다.”
“웃기지 마! 그분께서 나를 버릴 리 없어!”
철 가면이 심장을 쥐어짜듯이 절규했지만 새 가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철 가면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사라지며 천 길 낭떠러지로 뚝 떨어져 내리는 기분에 뭐라고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젠장!’
철 가면은 자신의 몸에 손을 집어넣어 씨앗을 꺼내려고 했지만 기간틱 터틀의 등껍질로 만든 건틀릿은 그의 몸에 어떠한 상처도 내지 못했다.
“뭣?!”
“소용없다. 너에게 심은 씨앗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
“뭐라고? 지, 지금 그게 대체…….”
“사도나 되는 이에게 싸구려를 사용할 수는 없지. 특별하게 제작된 거다. 제물로 삼은 자의 수준에 맞는,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지. 너무나도 귀중해서 몇 개 없으니 오히려 영광으로 알도록.”
그보다 궁금하군, 이라며 새 가면이 말을 이었다.
새하얀 새 부리 가면에 자리 잡은 퀭한 검은 동공 부분에서 섬뜩한 붉은 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과연 우리 사도를 제물로 삼은 최고의 씨앗은…… 무슨 차원을 부를까?”
“이런 빌어먹으으으을!!”
철 가면은 새 가면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덜컥! 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끄으으으! 그의 몸이 간질 걸린 환자처럼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새 가면은 그 광경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끄아아아아아!”
자신의 로브를 거칠게 찢으며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른 철 가면의 몸에 기포가 일어나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은 보기만 해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로테스크함이 있었다.
촤아악!
철 가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런 그의 몸을 찢으며 검은색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십 개가 넘는 미끈거리는 촉수는 각기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채 허공을 넘실거리듯 꿈틀거렸다. 그 광경은 마치 검은 불길이 그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호오.”
평소에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새 가면도 지금 철 가면을 통해서 열리는 차원 너머의 존재를 보며 감탄했다. 만만치 않은 괴물들이 나타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예측했던 것 그 이상이지 않은가.
철 가면의 몸 주위로 거대한 검은 구덩이가 생성되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끝없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그 구멍은 점점 크기를 키웠고 그 안쪽에서부터 끔찍한 괴물들이 집을 공격받은 개미들처럼 튀어나왔다.
<심연>
한때 협회에서 실전 훈련 때 사용하던 <통로>와 연결되어 있던 차원.
사고 이후로 강제로 붕괴시킨 통로로 인해 연결이 사라졌던 통로가 이번에는 철 가면을 매개로 삼아서 직접 현세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