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변화의 시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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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클랜과 철 가면 조직의 싸움은 원래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치열했다. 그것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개인의 실력마저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파랑>들의 실력과 A랭크 헌터인 김현호의 역할이 컸다.
기파랑 한 명이 철 가면의 직속 부하 2명을 상대했다. 그런 기파랑이 10명이니 철 가면 부하 20명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기파랑은 팀워크가 뛰어났다.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함께 움직이는 것을 더 많이 한 기파랑들이다. 그들이 방어진형을 유지한 채 싸움을 유지하자 30명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특히나 김현호의 활약은 대단했다. 영령 <관창>의 계약자답게 그는 창을 쥐고서 열심히 휘둘렀는데 그럴 때마다 적들이 창에 맞고 쓰러져 나갔다. A랭크 혼자서 10명이 넘는 B랭크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고려하면 김현호는 아직도 본신의 힘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피와 비명, 병장기의 충돌음이 난무했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찬과 헤르메스는 그런 싸움을 즐겁게 구경했다. 그것은 아테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바로 싸움 구경이다. 그것도 싸움은 약한 놈들 싸움이 제일 재미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싸움이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을 리가 없었다.
“죽어라!”
“어딜!”
철 가면의 부하들이 동시에 여럿이서 달려들었지만, 김현호가 기합을 토하며 창을 휘젓자 거대한 돌풍이 몰아치며 놈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특히 김현호 가까이 접근했던 녀석들은 강렬한 풍압에 몸 곳곳이 거대한 발톱에 할퀸 것처럼 상처가 가득했다.
[둘 중 어디가 이길 거 같아?]
“가면 쪽.”
헤르메스의 질문에 현찬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두 조직이 서로 비등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철 가면의 조직 쪽에서 철 가면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부하들로 정리가 가능할 거로 생각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을 쓰러뜨리기는커녕 밀리기까지 하니 결국 철 가면은 본인이 직접 나설 것이다.
“끝났네.”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철 가면이 다가가자 현찬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대로 철 가면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방어진을 유지하는 기파랑을 향해 다가가 거무튀튀한 빛을 띠는 건틀릿이 씌워진 주먹을 내질렀다. 기파랑의 1선에 선 자들이 자신의 상반신을 가릴만한 커다란 원형 방패를 앞세워서 주먹을 막았다. 쾅! 주먹에 적중당한 방패가 우그러지고 방패를 든 기파랑의 일원 중 하나는 그대로 트럭에 치인 사람처럼 피를 흩뿌리며 수십 미터를 날아가 늪지대에 처박혔다.
즉사였다.
“……!”
기파랑들은 이 자리에서 누가 가장 위험한 인물인지 빠르게 판단했다. 남은 9명이 동시에 철 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하단부터 정수리까지 기파랑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은 채 철 가면의 급소를 향해 각기 쥔 무기를 휘둘렀다.
“우스운 녀석들.”
철 가면은 두 주먹을 쾅 하고 부딪쳤다. 주홍색 불똥이 허공에 휘날리더니 그의 건틀릿 사이에서 거대한 스파크가 튀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는 연달아 터지면서 그의 주먹 사이에서 자그마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스파크는 점점 그 크기를 불려가더니 이내 하나의 전류가 되었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이 순식간에 불어서 거대한 강물이 되는 것처럼 주먹에서 튄 스파크는 이내 거대한 전류의 폭풍이 되어 철 가면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파지지지직!
거대한 전기의 폭풍은 그대로 자신을 향해 덮쳐오던 기파랑들을 전부 다 휩쓸었다. 푸른 폭풍은 이내 잠잠해졌고 그의 주변에 남은 거라고는 새까맣게 타버린 기파랑이었던 잔해뿐.
김현호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으윽!”
늪을 통해 퍼져나간 전기 탓에 김현호는 채 반응하기도 전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피부 곳곳이 검게 그을렸고 그의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파마라도 한 것처럼 꼬이거나 타버렸다. 그의 몸 주위로는 아직도 잔류 전기가 남아서 파직거리며 꿈틀거렸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릴 위력의 전기를 맨몸으로 맞았음에도 김현호는 창을 지지대 삼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
“이, 이 개새끼가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김현호가 눈을 부릅뜨며 철 가면을 노려보았지만, 그런 김현호에게 돌아온 건 묵빛의 건틀릿이었다. 퍼억! 김현호의 머리가 터지며 피와 뇌수가 흩뿌려져 늪지대에 섞여 들어갔다. 철 가면은 가볍게 손을 털며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혀를 찼다.
“쯧. 쓸모없는 녀석들. 이런 놈들 제대로 못 이긴단 말이냐.”
30명 가까이 끌고 왔던 그의 부하 중 10명이 죽었고 방금 그의 전기 공격에 휩쓸려 10명이 더 죽었다. 남은 사람은 10명. 철 가면은 자신의 손으로 부하들을 죽였음에도 죄책감 따위 갖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에 휩쓸려 죽은 녀석들은 그저 약했을 뿐이다. 약한 녀석은 쓸모없다.
애초에 자신의 수족으로 편하게 부리려고 데리고 다니는 놈들이다 보니 그렇게 실력 자체가 뛰어나지 않은 탓이 컸다.
남은 10명도 자잘한 상처가 있어서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철 가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튀어나와!”
철 가면의 쩌렁쩌렁한 울림이 늪지대 전체로 강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호통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철 가면 주변에 옅게 낀 물안개가 순간 바깥으로 밀려났고 그의 발목까지 잠긴 늪지대에 커다란 파동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런데도 현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철 가면은 가면 속의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감히, 안 나온다 이거지?”
안 그래도 조금 전 나뭇가지를 창처럼 집어 던져서 싸움을 일으킨 현찬의 행동에 잔뜩 열이 뻗친 상태인데 여기서 자신의 부름마저 무시하자 그의 분노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꽈드득! 오른손에 주먹을 꽉 쥐자 건틀릿이 마찰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이래도 안 나오는지 보자!”
파직! 그의 주먹에서 재차 푸른 번개가 튀었다. 그리고 철 가면은 현찬이 있는 방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거대한 번개의 기둥이 그대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늪지대를 반으로 갈랐다. 늪을 증발시키고 나무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며 나아간 번개의 열차는 그 강렬한 흔적을 남긴 채 사라졌다.
척!
철 가면의 앞에 현찬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착지했다. 하지만 현찬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늪에 잠기지 않고 마치 소금쟁이처럼 늪지대 위에 떠 있었다.
“미꾸라지처럼 내내 숨어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거든. 저 애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너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에 철 가면이 울컥했다. 안 그래도 잔뜩 벼르고 있던 상대가 코앞에 있다. 만나기만 하면 바로 사지를 분해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조롱까지 당하니 원래부터 성미가 거친 철 가면의 성질이 제대로 자극받았다.
“으아아아아!!!”
“피해라!”
“게이트에서 나가!”
철 가면에 분노를 터뜨리자 부하들이 황급히 게이트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철 가면을 중심으로 거대한 전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
그것은 마치 기포가 올라오는 물방울처럼 반구 형태로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며 넓은 게이트의 일부를 뒤덮었다.
“무, 무슨 일이지?”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협회 헌터들은 게이트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고압 전류에 당황했다. 황설영은 얼굴을 굳혔다. 딱 봐도 게이트 내부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이트 안쪽에서 정체불명의 로브와 가면을 뒤집어 쓴 일말의 무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모두 게이트 주변을 포위해라! 놈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명령을 내리면서도 황설영은 게이트 내부에서 싸우고 있을 현찬을 걱정하고 있었다.
‘강현찬 헌터님. 부디 무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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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장난 아닌데?”
현찬은 전류의 폭풍에 뒤로 살짝 밀려났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고압 전류로 모조리 태워버리는 강렬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현찬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왼손에 쥔 방패 때문이었다.
찬란한 황금빛을 띠는 원형 방패. 그 가운데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박혀 있었다.
<차용> [아이기스(Aegis)]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주었다는 아테나의 방패. 페르세우스에게 빌려준 이후로는 방패 중앙에 메두사의 머리까지 박혀 있었기에 단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공황에 빠지게 만들고 약한 상대는 석화시키는 신구였다.
아이기스의 뛰어난 방어력은 현찬을 강렬한 폭풍으로부터 지켜주었고 현찬은 아이기스의 능력에 감탄했다. 저런 엄청난 광역 공격에 티끌만큼의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신이 사용하는 무구다웠다.
‘해 볼만 한데?’
현찬은 눈을 빛냈다.
이 정도라면 다른 영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현찬은 아이기스로 변했던 테레이오스테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중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철 가면이 거대한 몸을 곧게 피며 현찬과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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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을 붙잡아라! 거세게 반항하면 과하게 찍어 눌러!”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협회의 헌터들은 철 가면의 부하들을 하나둘 제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 격하게 저항하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황설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헌터들은 가차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생포한 자는 총 4명. 6명 정도가 저항 끝에 죽었다.
황설영은 생포 당하는 4명을 보고는 게이트로 시선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게이트 내부에서 현찬과 싸우고 있는 놈들의 리더인 철 가면뿐이었다.
투쾅!
“어엇?!”
게이트 내부에서 무언가가 대포알처럼 튀어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니 콘크리트 바닥을 뒹굴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정체불명의 집단을 이끄는 대장인 철 가면이었다.
철 가면은 먼지가 잔뜩 묻은 로브를 휘날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락부락한 그의 근육이 분노 때문에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감히!”
분노를 터뜨린 그의 주위로 전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위험함을 느낀 황설영이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모두 대피해라!”
잘 훈련받은 협회의 헌터들은 황설영의 외침을 듣자마자 철 가면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날렵한 움직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사불란했지만, 철 가면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위험하다!’
황설영이 일단 나서서 막아야겠다고 느끼는 순간 게이트 내부에서 철 가면을 향해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를 걷어차서 뒤로 날려버렸다. 콰앙!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철 가면이 가로등에 처박혔다. 단단한 가로등이 찌그러졌지만, 철 가면은 아무렇지 않은지 몸을 가볍게 털어냈다.
“강현찬 헌터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일단 모두 물리세요.”
인적이 드문 도시 외곽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찬이 미리 헤르메스의 힘을 이용해 최면으로 이 근방에 다니는 사람들을 막았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혹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이 자리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세요. 조금 싸움이 거칠어질 거 같으니까요.”
“…… 네. 알겠습니다.”
황설영은 자신도 함께 싸울까 했지만 조금 전에 철 가면이 보여주었던 그 강렬한 전류에 잔뜩 위기감을 느낀 상태였다. 싸운다 하더라도 그녀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현찬에게 철 가면의 상대를 맡겨야만 했다.
“무운을 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때려눕힐게요.”
황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고 현찬은 철 가면과 다시 대치했다.
“우리 1대1로 싸워야 하지 않겠어?”
유들유들한 현찬의 태도에 철 가면은 자기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