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화 희대의 사기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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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무력이 필요한 일인가 싶어 현찬이 묻자 김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네? 아뇨, 아뇨. 강현찬 헌터님께 그 정도로 큰 부탁을 바라는 것은 너무 도둑놈 심보죠. 협회 일을 다른 헌터에게 부탁하고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의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나 손이 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도와달라고 하시는 점은 무슨 의미죠?”
“그냥 이름만 빌려달라는 거였습니다.”
“이름?”
이름을 빌려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현찬이 의아해하자 김은혁이 보충 설명을 이었다.
“말 그대로 강현찬 헌터님이 저희에게 이름만 빌려주는 겁니다. 실제로 협회 내부의 스파이 및 배신자들을 찾아서 놈들을 처단하는 것은 저의 역할이지만, 제 영령의 특성상 누군가의 이름을 빌리면 조금 더 효과적이거든요.”
“이름을 빌리는 것 정도는 그냥 하셔도 되지 않나요?”
현찬이 떠보듯 물어보자 김은혁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이름 그렇게 막 함부로 가져다 쓰면 안 되죠. 강현찬 헌터님께서 싫다고 하신다면 저도 그냥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이름이야 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죠, 뭐.”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현찬은 이름을 빌린다는 은혁의 영령 특성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체화한 상태로 현찬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던 헤르메스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때의 그의 촉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헤르메스의 두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이렇게 된다면 거절할 수 없었다. 현찬은 자신에게 아무 말 하지 않지만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헤르메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까짓것 이름 정도 빌려주는 건데 뭐 상관없죠.”
“정말요?! 감사합니다!”
밝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은혁에게 다만, 하고 현찬이 뒷말을 이었다.
“저도 구경하러 가죠. 그 스파이 색출에.”
아무렴.
사실 현찬도 궁금증이 있었으니 한번 구경하러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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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오크의 사체와 마석을 모두 몬스터 시체 수거 업체에 넘기고서 게이트를 나선 것이 바로 30분 전. 현찬은 김은혁과 함께 협회로 움직이면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김은혁 씨는 협회 소속 S랭크 헌터면서 이렇게 막 아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요?”
김은혁은 깔끔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협회의 헌터들과 다르게 활동하기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부모님 심부름으로 슈퍼마켓에 가려고 어슬렁거리는 동네 한량 같은 패션에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김은혁이 마스크가 깔끔하고 멋있어서 저런 패션도 어울린다. 그런데 돈도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더 많이 받는 협회 소속의 S랭크 헌터가 저렇게 다닌다고 하니 참 웃기는 이야기다.
“제가 좀 어디 한곳에 머물러 지내면 좀이 쑤시거든요.”
김은혁은 그게 뭐 자랑인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래 계약할 때부터 터치하지 않기로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원할 때마다 여기저기 자주 돌아다니고는 하죠. 최근에는 일본 쪽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거기 유명한 헌터 킬러 야쿠자 집단이랑 중국 쪽 마피아 조직하고 피 터지게 싸우더라고요. 그래서 뭐 겸사겸사 구경했죠. 누군가 둘을 싸움 붙인 것 같던 데 점점 싸움이 커지는 걸 보니까 재미있더군요.”
“하하.”
찔리는 게 있는 현찬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뭐,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식도락도 하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데스페라도 조직원이 나타나서 테러를 가하고 있다고.”
그가 비록 지정된 임무를 잘 빼먹는 한량이라고 하더라도 협회에 소속감을 지닌 S랭크 헌터였다. 김은혁은 연락을 받은 즉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까지 최대한 빠르게 왔다.
하지만.
“오니까 사건이 다 끝나 있더라고요.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해서.”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그런데 이름은 왜 빌려달라고 하신 거예요? 영령의 능력이 대체 뭐기에.”
현찬도 나름 영령들에 관해서 공부했기에 많이 안다고 자부했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능력을 사용한다는 영령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름을 사용한다고 하니 무언가 주술 쪽과 관련된 영령일 가능성이 컸다.
“하하! 그건 보시면 알 겁니다. 뭐, 저야 제 정체를 좀 숨기고 다니는 편인데 강현찬 헌터님이라면 들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째서요?”
“제 영령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얘가 좀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촉이 엄청 좋아서 어지간한 것들은 다 맞춰요. 그런데 딱히 경고하지 않고 친해지면 좋다고 말하니 저야 그 말을 믿고 따르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김은혁에게는 자신의 영령에 대한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현찬은 그가 단순히 특별한 영령과 계약을 맺어서 S랭크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현찬이 지금까지 만나왔던 그 어떠한 헌터들보다 영령과의 유대감이 짙고 끈끈했다.
그것이 그를 S랭크 헌터로 만들어준 최고의 원동력이 분명하다.
달인급 영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령과 동조율이 높아지면 어지간한 헌터들도 B랭크 까지는 강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으니까.
“자신의 영령을 믿으시네요.”
“그건 강현찬 헌터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야 그렇죠.”
둘은 동시에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몇 년을 함께 보낸 친구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김은혁 헌터님은 어떻게 협회 내부의 스파이를 색출할 생각인가요? 그보다 협회 내부의 스파이에 관한 이야기를 저 같은 외부인에게 막 함부로 꺼내도 괜찮은 건지도 궁금하네요.”
현찬이 지금까지 협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해준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스파이의 존재는 협회에 있어서 일종의 치부였다. 그것을 숨기면 숨겼지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에이. 그런 거야 뭐 상관없어요. 무엇보다 이놈들의 목표가 강현찬 헌터님임을 고려하면 본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도리니까요. 저희는 강현찬 헌터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건 김은혁 씨 본인의 의지인가요? 아니면 협회의 생각인가요?”
“둘 다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둘은 어느덧 헌터 협회에 도착했다. 이미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은 저물고 하늘 위에는 싸늘하고 어두운 밤공기만 남았다. 예전에 볼 수 없던 아름다운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묘한 감성에 빠져들 것 같았다.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좋은 자리 예약해 놨습니다. 거기서 구경하시면 될 겁니다. 장소는 조금 전에 말 한 그곳이니 저는 먼저 들어가서 배신자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뭐, 그거야 그렇다 쳐도 대체 배신자들을 어떻게 따로 불러낼 생각인가요?”
그들이 나오란다고 냉큼 나올 인간들도 아닌 데다가 눈치도 없지는 않을 텐데 과연 쉽게 따라 나올까? 하지만 어쩐지 김은혁이라면 없던 방법도 만들어서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저는 제가 잘하는 걸 해야겠죠.”
“잘하는 거라면?”
은혁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대답했다.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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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나왔네.”
인적이 후미진 공원과 맞닿아 있는 인근의 야산. 그곳에서 현찬은 정말로 김은혁의 말마따나 정해진 장소로 모습을 드러낸 협회 내부의 관계자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숫자는 총 5명. 다들 상당히 옷을 깔끔하게 입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걸 보면 아마 협회 내부에서도 나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나왔다는 점에서 김은혁이 말하던 스파이가 분명하겠지.
‘헤르메스. 무슨 방법을 써서 저 녀석들을 끌어들였는지 알 거 같아?’
[음. 아무래도 나와 비슷하게 정신계열 능력을 지닌 것 같은데.]
‘정신계열?’
[그래.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최면처럼 강력한 것이 아니야. 오히려, 조금 더 자연스럽고 교묘한 거에 가까워.]
헤르메스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현찬은 더더욱 은혁이라는 인물과 그와 계약을 맺은 영령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가 비록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그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정보량이 늘었지만, 그의 영령이나 능력은 아직 모르는 상태.
이렇게 좋은 구경 자리를 마련해 줬으니 분명히 무언가 현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리라.
“대체 강현찬 헌터가 어디 있다는 거지?”
“따로 우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나온 5명의 남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우리가 왜 나와 있는가? 우리가 대체 왜 이곳에 모여 있는가? 이 자리에 모인 5명은 모두 협회에 심어진 스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그들이 속았다고 느낀 것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현찬의 예상대로,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하늘에서 김은혁이 뚝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배신자들은 몸을 흠칫 떨며 김은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김은혁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가, 강현찬 헌터!”
“대체 왜 여기에?!”
“응?”
그들의 입에서 나온 현찬의 이름에 오히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현찬이 의아했다. 자신은 여기에 있고 지금 저 배신자들이 마주 본 남자는 S랭크 헌터인 김은혁인데 대체 왜 현찬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김은혁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당신들이 협회에서 저를 팔아넘긴 배신자들이군요?”
김은혁은 평소의 경박한 말투 따위는 집어 던지고 더 정중한 현찬이 사용하는 말투로 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현찬의 성대모사라도 하는 것처럼 말투나 목소리의 어조가 매우 흡사해서 듣던 현찬도 놀랐다.
“크윽! 젠장! 이미 들킨 건가!”
“쳐라!”
본색을 드러낸 배신자들은 각자 몸에 숨겨놓은 무기를 꺼내 쥐고 김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니 저들도 상당한 전투력을 지닌 헌터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순식간에 김은혁을 포위하고서 서로 합공 하는 모습을 보니 전투에도 나름 조예가 깊어 보였다.
하지만 김은혁은 그들보다 몇 수는 더 위였다.
“오?”
[그런 거였군.]
김은혁의 움직임. 그것은 오늘 엘리트 오크 부락에서 현찬이 보였던 움직임과 매우 흡사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휘두르는 자세나 움직임은 분명히 현찬이 평소에 보였던 움직임이었다.
비록 그 힘이 현찬보다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현찬이라고 착각할 법했다.
김은혁은 시종일관 배신자들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현찬과 헤르메스는 그제야 그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감이 왔다.
“저거. 그거 맞지?”
[응. 맞아.]
헤르메스는 현찬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기야.]
사기.
타인을 속이는 행위.
하지만 사기라고 해서 일반적인 사기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계약자를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영령의 사기는 보통 사전적인 사기와는 궤를 달리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저 영령. 어쩐지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드나 했더니 생전에 그야말로 최고의 사기꾼이었어.]
그리고 저 영령 또한 헤르메스의 정체를 알지는 못할지언정 자신과 비슷한 과라는 것을 인지했기에 현찬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고 은혁에게 함께 하라고 했던 것이리라.
[영령 중에서 최고의 사기꾼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지.]
조선 시대 팔도를 돌아다니며 온갖 장난과 사기를 일삼은 괴상한 선비.
젊었을 적 무과에 합격하여 가진바 무력 또한 범상치 않았으며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은 누군가를 속여먹는 그의 잔머리였다.
사기꾼 분야에 있어서 거의 전설이라 치부 받는 인물.
주인 없는 평양 대동강 물을 악덕 상인들에게 비싸게 팔아넘긴 최고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
그 희대의 사기꾼이 바로 S랭크 헌터 김은혁과 계약한 영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