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59화 운명의 힘 (4)
_
현찬의 전혀 꿀리지 않는 태도에 감은장아기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녀의 손에는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현찬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꽃이 쥐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현찬이 감은장아기의 성미를 건드린다면 혹시라도 그녀가 욱하는 기분으로 이 꽃을 휘두른다면 현찬은 반항조차 못 하고 죽고 만다.
그 정도로 흉흉한 물건에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데도 현찬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라며 배짱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아무리 저런 흉악한 물건을 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현찬은 감은장아기가 자신에게 대답을 확실하게 듣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물론 그의 생각이 100% 들어맞을 거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찬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
그리고 현찬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감은장아기는 현찬의 배짱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니까.
‘곤란하게 됐다.’
감은장아기도 현찬이 저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이 꽃은 일종의 협박 수단. 그녀가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서천 꽃밭의 꽃으로 남을 죽이는 건 그녀의 성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꽃을 챙길 수 있도록 허락해준 자청비의 개인적인 부탁도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너에게 혹시 모르니 꽃밭에서 꽃 한 송이 정도 꺾어갈 수 있게는 해줄 게. 하지만 그 강현찬이라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애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혹시 모르니까.’
괄괄하고 활달한 자청비의 성격상 그녀 또한 현찬과 계약을 탐내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혹시나 감은장아기가 현찬에게 무슨 짓을 할지 걱정돼서 이런 말을 꺼냈겠지.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감은장아기 본인에 대한 걱정이었다. 비록 여러 신이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규칙을 뒤틀면서 현실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룰 위반이었으니까.
감은장아기는 최대한 신경 쓰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현찬의 계약에 별다른 욕심이 있기보다는 이 세계의 꼬여가는 운명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본 현찬이 이 세상을 위협으로 몰고 갈 인물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서 가차 없이 현찬에게 죽죽이 꽃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세상을 향한 선의이자 운명의 뒤틀림에 스러져 갈 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살릴 길이었으니까.
운명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은장아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현찬의 저런 태도를 보면 대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그의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길 원했지만, 현찬은 녹록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참, 사람 말을 안 듣는 거 같은데, 원하는 게 대체 뭔데?”
“확신입니다.”
“확신?”
“네.”
감은장아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 힘을 다룰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관한 확신을 얻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싶은데?”
현찬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감은장아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질문에 답했다.
“시험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걸맞은 존재인지에 대한 시험.”
“신의 시험이라. 그래. 그렇다 쳐. 그러면 그 시험은 대체 뭔데? 뭐 누굴 쓰러뜨리면 되나?”
“그렇게 심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시험은 간단합니다. 그저 저의 질문에 몇 가지 대답을 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
어떻게 보면 아주 쉬워 보인다고 볼 수 있었다.
그저 묻는 것에 대답만 해주면 되니까.
하지만 사실 이런 시험이야말로 가장 심오하고 복잡하다. 무언가 뚜렷한 목적이나 방향 의식이 잡히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감은장아기의 생각에 반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현찬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기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이다.
“뭐, 좋아. 얼마든지 해주지.”
하지만 현찬의 대답은 매우 호쾌했고 시원했다.
자신은 전혀 걸릴 것이 없다는 태도에 오히려 그 상황을 지켜보는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현찬아.”
“괜찮아.”
걱정이 가득 담긴 헤르메스의 표정에 현찬은 그저 웃어 보였다.
그 당당한 태도에 헤르메스는 현찬을 믿기로 했다. 현찬은 그의 계약자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헤르메스는 현찬을 믿어야만 했다.
게다가
‘현찬이라면 내 걱정 따위는 그저 가볍게 날려버릴지도 모르니까.’
인간에 관해 많은 것을 봤고, 인간이라면 눈 감고도 잘 안다고 자부하던 헤르메스였음에도 현찬은 늘 그에게 새로움과 의외성을 선물해주었다.
그렇기에 현찬이라면, 그라면 헤르메스의 예상을 뛰어넘고 이런 상황도 가볍게 극복해 보일 거라고 믿었다.
“자. 물어봐. 무슨 질문이든지 곤란하지 않은 선에서는 대답하지.”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 힘 때문에 세상에 혼란이 찾아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언젠가는 찾아올 혼란이라며?”
“그것이 앞당겨지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그것에 관해 답을 하자면 물론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지. 아무리 그래도 피해자가 생기니까. 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마치 나 때문에 혼란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거 같네. 실질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혼란을 초래하는 녀석들 아닌가?”
물론 그 근본적인 원인은 현찬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둑이 부자의 돈을 탐내서 도둑질했다고 그것이 돈 많은 부자의 죄가 될 수 없듯 결국 진정으로 나쁜 자들은 현찬의 힘을 탐내 혼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다.
“당신은 그들을 막을 겁니까?”
“막고, 막지 않고 자시고. 어차피 녀석들은 나를 노릴 거잖아? 그렇다면 싸워야지.”
자신을 건드린 자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헌터가 되며 온갖 싸움을 거쳐야 하는 삶에 발 들인 시점에서 각오한 일이었다.
현찬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감은장아기는 다음 질문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 감은장아기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딱히 특별한 질문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질문들뿐이었으니까.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현찬의 대답 사이에서 무언가를 잡아내려고 하는 그녀의 의도가 명백히 전해졌으니까.
대답을 계속하며 문답을 지속하자 시간이 30분 가까이 흘렀다.
“이걸로 끝인가?”
“죄송하지만 아직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현찬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공원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서 가로등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그림자는 가로등의 빛에 길게 늘어지며 현찬의 몸에 닿았다.
짧게나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당연하게도 감은장아기였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단순한 질문.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벽을 마주한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찾아온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선택한다.
자리에서 멈추거나.
혹은 벽을 넘어서거나.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다.’라는 대답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런 대답이 옳은 대답이다.
하지만 현찬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에 현찬의 웃음이 녹아 들어간다.
“잊었어? 나는 헤르메스의 계약자야.”
그는 헤르메스의 계약자다.
계약의 신. 다른 영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헌터.
그게 바로 강현찬 그 자신이었다.
“나는 어떠한 난관이라도, 나 혼자서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찬이 얻은 이 힘도 오로지 현찬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도와준 동료가 있기에 계약을 맺은 영령들이 있기에 현찬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해내는 것은 좋다.
오롯이 그의 발걸음으로 땅을 밟아가며 걷는 것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공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내 대답은 이거야.”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넘어지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의 곁에서 비틀거리는 다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를 기꺼이 빌려주는 동료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타인과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나는, 아니 ‘우리’는 앞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든지 간에 전부 깨부술 거야.”
세상을 향해 선포를 내리듯이 말하는 현찬의 대답에 감은장아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며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그 침묵에 괜스레 불안해져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신력을 최대한 끌어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상으로는 고작 몇 초밖에 되지 않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그 시간을 잡아다 쭉 늘린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새롭게 바람이 불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하늘에는 점점 밝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밝은 달이 미소를 지으며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감은장아기였다.
그녀는 현찬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감은장아기는 현찬을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만난 현찬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다양한 인간을 봐온 그녀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감은장아기는 자신의 무례에 사과를 올렸다.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솔직히 첫 만남 때부터 난데없이 시험을 운운한 점은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신이다. 인간인 그의 잣대를 그녀에게 들이댈 수 없는 노릇.
무엇보다 감은장아기 그녀에게도 그녀 나름의 심각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힘을 일부 잃는다는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현찬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런 의지는 높게 사 줄 만했다.
현찬이 사과를 받아들이자 감은장아기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요.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현세에 버티고 있는 것도 용했다. 다른 신들이 돕지 않고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하려 했다면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바로 하계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선물을 드리도록 하죠. 이것은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저의 소망이자, 방금까지의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한 사죄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현찬에게 가까이 다가온 감은장아기는 섬섬옥수를 뻗으며 그녀의 희고 가녀린 검지를 현찬의 이마에 톡 가져다 댔다.
[한국 신화. 행운의 여신인 감은장아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행운이 영구히 대폭 상승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다만 ‘순리’에 어긋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스텟이 상승합니다.]
[계약을 맺는 <영령>들과의 동조율이 상승합니다.]
[불행이 당신을 피해갑니다.]
.
.
.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보창의 향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
현찬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자 감은장아기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쿡쿡 웃더니 뒤로 살짝 물러났다. 마치 한 송이의 꽃이 잔잔한 호수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헤르메스조차 채 반응하지 못했다.
“이익! 내 계약자에게 꼬리를 쳐?!”
뒤늦게 헤르메스가 격렬하게 분노를 터뜨렸지만 이미 그녀는 떠날 채비를 끝낸 뒤였다.
“언젠가 인연이 있다면 또 뵙기를.”
쩌억! 그녀는 왔던 것과 같이 사라질 때도 허공에서 갈라진 공간 틈새로 사라졌다. 그녀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주변에 짙게 떠돌고 있던 농도 높은 행운의 기운들이 썰물 빠지듯이 사라졌다.
헤르메스는 노발대발했고 현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런 헤르메스를 진정시켰다.
“시간 늦었다. 빨리 들어가자.”
“하지만……!”
“치킨 시켜줄게.”
“난 간장이 좋더라.”
단순한 녀석.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헤르메스의 모습에 현찬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히 쉬었는데도 쉰 기분이 아니었지만, 현찬의 발걸음은 조금 전보다 더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