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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58화 (58/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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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운명의 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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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장아기는 한국 신화에서 나오는 유명한 여신이다.

일반인들이라면 조금은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령과 계약을 맺으려는 헌터들이나 혹은 이제 막 각성을 끝낸 지망생의 경우에는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모든 헌터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영령은 바로 신급 영령.

그 신급 영령 중에서도 한국 신화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하며 힘을 지닌 것이 바로 감은장아기라는 여신이었으니까.

당연히 헌터가 되며 각종 신화나 설화에 관해 사전조사 했던 현찬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 감은장아기가 지금 현찬의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그것이 본체가 아닌 자신의 힘을 본뜬 분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하늘을 뚫고 땅을 뒤덮을 정도였다. 온갖 행운과 불행의 기운이 한 곳에 엉켜서 이루어진 거대한 힘의 격류는 현찬의 몸을 강하게 두들겼다.

‘엄청나군.’

분신이 이 정도인데 과연 본체의 힘은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현찬이 살짝 힘을 불러일으키려는 순간 에크티가 앞으로 나섰다. 과연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인 헤파이스토스의 걸작답게 에크티는 자연스럽게 현찬에게 가해지는 힘의 압력을 흩어 내주었다.

헤르메스도 그런 에크티의 곁에 서서 감은장아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막아주었다.

“너무 기세가 흉흉하지 않아? 초면부터 강하게 나오는데?”

헤르메스의 말에 감은장아기는 그제야 자신의 힘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단아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계에는 처음 와본지라 기운의 조절이 미숙한 점 양해 바라옵니다.”

처음 풍겼던 강렬한 기세에 비하면 그녀의 태도는 매우 부드럽고 예의가 넘쳤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고귀한 느낌이 절로 묻어나올 정도. 그 자연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헤르메스도 더 날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감은장아기가 적대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좋은 의도로 찾아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숨긴 자였으니까.

“그래서. 내 계약자는 무슨 용무로 만나러 온 거지?”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힘을 파악하고 있었다.

엄청난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도 직접 자신의 힘을 하계로 강림시킨 여신의 행동을 보면 분명히 무언가 뚜렷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나쁜 의도로 왔다면, 대항할 수 있을까?’

헤르메스는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계약한 게 아테나였지만 아직 현찬은 아테나의 힘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었다.

‘둘이 붙는다면 이쪽이 지겠어.’

아테나의 힘을 사용하는 현찬이 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감은장아기가 규격 외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계에 오면서 힘 일부를 손해 봤다고 쳐도 이 정도라니. 대체 무슨 방법으로 나타난 거야? 뭐 꼼수라도 부린 건가?’

헤르메스는 자신의 권능을 발동하며 감은장아기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다른 존재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감은장아기가 넘어온 것은 그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최소 셋. 지원해준 자가 더 있다. 그것도 감은장아기와 비교해도 절대로 꿀리지 않는 동등한 신들이.

헤르메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감은장아기가 이렇게 현대에 막대한 힘을 지니고 강림할 수 있던 건 총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감은장아기는 온갖 행운과 불행,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행운의 힘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인지로는 도저히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그 행운의 힘은 가히 세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이기에 여타 신들에 비교해 그녀가 힘을 다루는데 제약을 덜 받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

감은장아기가 한국 토속 신이며 그녀가 이렇게 힘을 다루는 장소가 바로 한국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신은 각기 자신의 전승을 지닌 공간에서 그 힘을 다루는데 제약이 매우 감소하게 된다. 당장 헤르메스만 해도 유럽으로 간다면 지금보다 더 힘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

감은장아기는 혼자만의 힘으로 힘을 사용한 게 아니다. 그녀를 곁에서 지원해준 다른 여신들이 더 있었다.

자청비.

바리데기.

삼신할미.

한국 헌터들이 모르는 이름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신급 영령들.

그녀들의 도움 덕분에 감은장아기는 이렇게 자신의 힘을 지상으로 가져올 수 있던 것이었다.

즉, 그녀는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것. 무려 4명의 신의 힘이 한데로 합쳐진 화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시 묻지. 내 계약자에게는 무슨 이유로 찾아왔지?”

헤르메스의 질문에 감은장아기는 입을 열어 아름다운 곡조 같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선, 제 소개를 하죠. 저는 운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감은장아기라고 합니다. 비루하지만 신이라는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최근 이 한국 땅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감은장아기는 흑요석처럼 검고 깊은 눈동자로 현찬을 직시하며 물었다.

현찬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고 계시는지요?”

“…… 그래.”

현찬의 반말에도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은 지 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릴 뿐.

“신의 힘을 빌리는 존재. 신과 계약한 존재. 당신의 이름은 얼마 전부터 계속 들었답니다. 방구석에서 그저 실만 만지는 저 같은 신에게도 들려올 정도로 신계에서, 영령들의 세계에서 당신은 유명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현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령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하니 낯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지만 은근한 자부심도 샘솟았다.

“정당한 방법으로 신들의 힘을 다루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힘에 대한 대가가 따르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죠.”

현찬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현찬이 헤르메스의 힘을 각성하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자주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었다.

“당신의 힘 자체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함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주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죠.”

감은장아기는 현찬을 보되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현찬이 지닌 운명, 그의 영향력, 그가 주변에 끼치는 영향을 보고 있었다.

현찬 자체만으로는 그야말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순리에 어긋나지 않은 가장 안정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잔잔한 호수 같은 현찬의 주위에는 거대한 파도와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중심만이 고요한 태풍의 눈. 그것이 감은장아기가 보는 현찬이라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신의 존재는 결국에는 주변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정말로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겠죠.”

“너. 지금 너무 많이 말하는 거…….”

“이 정도면 별다른 영향이 없습니다. 딱히 걸리는 것도 없고요.”

헤르메스가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가차 없이 그 말을 끊었다. 현찬도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당신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현찬이 헤르메스가 아닌 다른 신과 계약을 맺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 계약한 신이 모든 계약을 주관하는 헤르메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확히는 헤르메스의 힘을 통해 다른 신들과도 계약을 맺고 다양한 영령들의 힘을 다루는 것.

이 좁은 땅에만 신의 힘이 몇 번이나 드러났다. 영웅들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들보다 격이 한참 높은 신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은 조용하게 느껴지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가 터질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그 뜻을 이해한 현찬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확실히, 이 땅의 신인 그녀로서는 현찬이라는 인물에 관해 파악하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했다.

하지만.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헤르메스가 이를 드러내며 그녀에게 위협을 가했다.

“비록 그쪽이 꽤 막대한 힘을 끌어다 썼다고 해도 이쪽은 정식적인 계약이라는 통로로 힘을 다룰 수 있어. 내가 작정하고 너를 막아선다면 너는 결국 네가 바라는 목적을 이루지도 못한 채 힘만 잃고서 다시 신계로 쫓겨날 텐데, 목이 너무 뻣뻣한데?”

헤르메스는 현찬과 즐거웠던 쇼핑의 날이 이렇게 마무리된다니 매우 기분이 저조했다. 평소라면 별로 드러내지 않을 적대감을 그대로 감은장아기를 향해 날카로운 바늘처럼 쏘아붙였다.

헤르메스의 말에 감은장아기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그만큼 급한 일입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손해를 감수하고서 여기에 나타났겠지.”

“그렇게 잘 아신다면 지금 저를 막아서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싸우면 지겠지. 한 판 붙으면 이쪽이 밀려.”

그런데, 하고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이쪽은 도망치면서 시간만 끌어도 충분할 텐데.”

“…….”

“그쪽, 별로 여기에 오래 머물 수는 없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에게 가해지는 부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마땅한 계약자 없이 현계에서 힘을 사용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

감은장아기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과연, 신계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헤르메스 님답군요. 하지만 저희도 바보는 아니랍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저고리의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어딘가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꽃이었다. 검은 줄기와 붉은 꽃잎을 지닌 그것은 단순한 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위협적인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 꽃을 알아본 헤르메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천 꽃밭의 꽃…….”

헤르메스가 씹어 먹듯이 중얼거렸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그리스 계열의 신화의 신인 그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서천 꽃밭. 현찬도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루게 해준다는 그야말로 최강의 꽃밭. 신계에서도 취급이 매우 조심할 정도로 위험한 꽃밭에서 감은장아기는 한 송이 꽃을 가져온 것이다.

“이 꽃은 죽죽이 꽃이라 합니다. 바라는 대상을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 수 있죠.”

“그걸 사용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고 하는 짓이냐!”

헤르메스가 고함을 터뜨렸다.

서천 꽃밭의 꽃을 꺾어온 것도 모자라서 그것을 현세에서 사용하겠다니?

신들 사이에서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을 쉬쉬하는 꽃밭의 꽃을 대체 어떻게 가져왔는지도 의문이다.

‘자청비 짓인가.’

자청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감은장아기가 현세에 분신으로서 강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직접 도와주었고 서천 꽃밭의 꽃을 가져다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신이니까.

본래라면 서천 꽃밭의 꽃감관은 <사라도령>과 <한락궁이>지만 자청비는 워낙 뛰어난 신이기 때문에 서천 꽃밭의 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을 즉사시키는 죽죽이 꽃이라니.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헤르메스는 이를 갈았다. 그냥 본인의 힘도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거기에 서천 꽃밭의 꽃까지 가져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은 외통수에 몰렸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설마 저쪽에서 저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서 찾아올 줄이야. 이렇게 되면 마땅한 대비를 하지 못한 이쪽이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걱정 어린 얼굴로 자신의 계약자인 현찬을 돌아보았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는 정말 ‘엇’ 하는 순간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현찬은 그 어떤 동요도 표정에서 드러내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혼자서 자꾸 뭐라고 하는데.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오히려 감은장아기의 협박이 우습기라도 하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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