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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57화 (57/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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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운명의 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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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보다 밖에 나갈 수 있을까?”

말을 먼저 꺼낸 건 현찬이지만 막상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아닌 것 같았다.

현찬이 그냥저냥 한 인지도를 지닌 헌터였다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현찬은 지금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현찬이 길을 걸으면 일단 기본적으로 기자들이 따라붙고 그 주변에는 현찬을 감시하는 협회나 클랜의 인물들이 깔린다. 그리고 현찬을 알아보고 사인해달라는 일반인들까지 합세한다면 그야말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톱인 연예인을 방불케 한다.

그런 상황이 불 보듯 뻔한데 헤르메스를 데리고서 과연 밖을 평범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까 하는 게 현찬의 걱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냥 헤르메스 혼자 다니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들 정도. 물론 그것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헤르메스가 무슨 장난이나 사고를 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가만히 있던 에크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현찬님. 그렇다면 저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에크티, 너도?”

“예. 집에 식재료들이 다 떨어졌기에 보충이 필요합니다.”

“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냉장고를 채운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현찬 혼자서 살았을 때는 밥도 건성으로 먹다 보니 식재료가 그렇게 빠르게 줄어드는 일은 없었지만 이렇게 새로운 식구가 늘어나니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복장은…….”

그걸로 괜찮겠냐고 묻기도 전에 에크티가 걸친 옷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천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다른 옷으로 변하는 모습은 꽤 신선했다. 이것도 아마 헤파이스토스의 작품 중 하나이리라.

“이렇게 바꾸면 되는 겁니까?”

“응. 그거면 충분하네.”

에크티의 복장은 바깥에서 나름 젊게 입고 다니는 대학생의 복장과 비슷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느낌. 무엇보다 옷걸이인 그녀가 워낙 예쁘다 보니 길을 걷는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옷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리라.

‘음. 이렇게 셋이 나간다면 더 장난 아니겠는데.’

헤르메스와 에크티의 외모는 연예인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떻게 보면 다른 의미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현찬까지 가세하면 당연히 길을 걷기만 해도 온갖 시선들이 몰릴 것이다.

어디 시선뿐일까? 그야말로 파도와 같은 인파가 길을 막아설지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곤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만약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재미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헤르메스와 동조율이 높아지며 생기는 장난스러운 생각이었다.

현찬은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어떡하지 고민하는 순간 헤르메스가 답을 냈다.

“나라면 가능해! 사람들의 시선만 피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내 권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 정확히는 카두케오스 지팡이의 능력인 ‘최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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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민 일보 소속 기자 곽문고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읽던 신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카페의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동료 기자가 물었다.

“왜 그래? 강현찬 헌터라도 나왔어?”

지금 둘은 현찬의 원룸 근처에서 현찬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현찬을 먼저 발견할 경우 어떤 특종을 잡게 될 줄 몰랐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집까지 찾아가고 싶었지만, 현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참았다. 대한민국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신급 계약자에게 밉보이는 순간 그들은 몰매를 맞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밖에서 계속 상시 대기를 하는 것뿐이다.

지금도 이 카페에서 가장 싼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서 둘이서 거의 6시간 이상 죽치고 있으니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있을 수 있는 게 바로 대한민국의 기자들이 아니던가.

조금 전 동료의 질문에 곽문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착각했나 봐. 나온 사람이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해서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히 방금 강현찬 헌터가 나온 걸 본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보면 아무도 없던 것이다. 오히려 ‘맞아. 내가 착각 한 거였어.’라며 스스로 납득 시키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쯤 나올까?”

“그건 나도 모르지.”

둘은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커다란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혹시나 나올지 모르는 현찬을 기다리며.

&

“어때? 괜찮지?”

“응. 그러네.”

헤르메스가 사용하는 광역 ‘최면’은 일종의 인식 저해였다. 비밀을 엄수하는 마법사 영령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고 거기에 헤르메스의 권능이 더해지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현찬과 헤르메스, 에크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효과가 엄청 좋네.”

현찬은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최면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강한 건 아니다. 사람들이 이쪽을 보더라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기초적인 능력이었으니까. 기자나 일반인들에게는 효과가 있겠지만 각성을 한 헌터들에게는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게 현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따보니 웬걸? 현찬의 주위를 지켜보는 헌터들조차도 현찬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현찬이 움직이는 데도 평소라면 쫓아왔을 기척들이 그대로 있다는 점에서 저들이 현찬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했다.

헤르메스가 그런 현찬을 보며 턱을 들어 올리며 콧대를 세웠다.

“헤헹. 어때? 아무리 각성자인 헌터라고 하더라도 내 능력의 앞에서는 꼼짝 못 한다고!”

“대단하십니다. 헤르메스 님.”

옆에서 에크티가 무표정한 얼굴로 영혼 없는 칭찬을 했지만, 헤르메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물론 저쪽이 마력이 많은 고 랭크 헌터이거나 아니면 영령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이런 사소한 최면 정도는 곧바로 이상함을 깨닫고 파훼하겠지.”

하지만 대상을 감시하는 일에 마력을 쓸 일도 없거니와 영령의 힘을 사용할 일도 없다. 저들은 결국 자신들이 최면에 걸려서 현찬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 현찬의 원룸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밀려와 현찬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때? 재밌지?”

헤르메스의 질문에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밌다.”

“좋았어.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볼까?”

헤르메스는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마천루가 가득한 21세기의 세상은 헤르메스로서는 모르는 것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다.

비록 헤르메스가 현찬의 곁에서 많은 것을 보았고 육체를 얻고 나서는 인터넷 웹 서핑으로 다양한 것들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직접 겪어보는 것은 또 다르다. 헤르메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서 이번 도시 투어는 현찬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흠. 나는 딱히 생각한 것은 없는데.”

굳이 간다고 한다면 에크티가 식재료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마트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내 옷도 사러 가자! 아웃렛인가 하는 곳은 무척 커서 옷도 팔고 식재료도 판다면서?”

“음. 뭐 그러면 되겠다.”

현찬도 그거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옷걸이가 좋은 헤르메스나 에크티의 옷을 골라주는 것도 나름의 재미도 있을 것 같았고.

“그러면 가자.”

그렇게 인간과 신 그리고 인형이라는 기괴한 조합의 쇼핑이 시작됐다.

&

쇼핑이라고 하더라도 거창한 것은 없었다. 헤르메스는 자신이 보면서 마음에 드는 옷들을 닥치는 대로 구매했고 옷에 대관해서 잘 모르는 에크티의 경우에는 헤르메스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것을 입게 했으니까.

단지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다면 인식저해 탓에 옷을 계산하려고 해도 점원이 현찬을 보지 못했던 것뿐. 물론 헤르메스가 최면의 정도를 조절해서 잘 대처했다. 식재료의 경우에는 많이 사고 싶었지만, 원룸 냉장고의 크기가 별로 크지 않다 보니 살 수 있는 양이 제한되었다.

그래도 식재료 고르는 것 자체가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건지 에크티는 어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중간에 출출해져 푸드 코트에서 밥을 먹고 남은 시간에는 넓은 아웃렛의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헤르메스도 이런 장소는 별로 오지 못했기 때문인지 신기해하면서 즐겁게 돌아다녔고 에크티도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싫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아테나는 별거 아닌 거로 너무 들뜬 게 아니냐며 헤르메스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현찬이 보기에는 아테나가 헤르메스를 상당히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빨리 아테나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옷 사기와 장보기가 끝나자 현찬과 에크티의 두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들로 가득했다.

“음. 앞으로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차 한 대는 사 둬야 하려나.”

신체 능력이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현찬이나 에크티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짐을 드는 것이 딱히 힘들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집도 이제 여럿이서 지내기에는 좁다고 느껴질 정도니 이사의 필요성도 점점 절실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헤르메스는 현찬과 에크티에게 짐을 모조리 넘기고 자신은 간식거리를 손에 쥔 채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며 하늘이 주황색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홍조 띤 구름은 바람을 타고서 빠르게 시야 너머로 건너가고 인적이 없이 바람만 부는 공원의 한 가운데에서 헤르메스는 앞서나가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 시대는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해서 마음에 들어.”

큰 즐길 거리 없이 전쟁과 싸움이 판치던 그리스 시대와 비교하면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끝이 없이 물건이 나오는 화수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끝이 없을 것 같은 신비로움의 연속은 헤르메스에게 있어서 매우 커다란 오락거리였다.

“현찬아. 나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들어.”

“그래.”

“사람들이야 뭐, 예전에 비하면 도덕이니 양심이니 그런 걸 더욱 높게 치면서도 실제로 더 이기적으로 변한 건 걸리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정말로 재미있어.”

볼거리도 많고 즐길 거리도 많고 다양한 먹거리들도 많았다.

과학이 발달하고 마차 대신 자동차가 움직이며 하늘을 나는 철 덩어리도 있다.

왕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발달했으며 시민들의 대표를 뽑는 것도 흥미롭다.

모순점도 많고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추잡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임을 나타내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아니던가.

“그러니 나는 이 세계가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현찬아. 너도 그렇지?”

“그래.”

현찬에게도 이 세상은 소중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으니까. 애착이 깊다면 당연히 헤르메스보다 더 깊을 것이다.

그러니 지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현찬의 각오를 느낀 헤르메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계약자가 저렇게 나서니, 그와 계약을 맺은 영령으로서 계약자를 전력으로 지원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쇼핑은 즐거웠어.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놀았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추억놀이도 이제 끝이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바쁜 일들이 계속 이어질 테니까.

“조금 전부터 계속 우리를 지켜보던데. 나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헤르메스의 말에 지면이 쩍 하고 갈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 지면의 공간이 좌우로 열리면서 그곳에서 온갖 청아한 기운이 분수처럼 샘솟고 있었다.

마치 사늘한 산바람을 맞은 것 같은 상쾌함. 파도의 포말이 해변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것 같은 시원함.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기운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하지만 이것은 본래 힘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고 희박한 것. 아마 원래의 기운을 쐬었다면 어지간한 헌터들조차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것이리라.

헤르메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 설마 벌써 이 땅의 토속 신이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걸. 그것도 영체가 아닌 본신 일부를 강림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신급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신급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자신이 강림할 땅에서 오랫동안 나고 자란 토속신이라면.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본신의 일부를 현세에 강림하는 것 자체가 신력의 소모가 막대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데만 엄청난 세월이 걸린다. 거기에 더해서 ‘순리’를 거스르는 짓이기 때문에 일종의 페널티까지 받을 정도.

그런 온갖 불이익을 떠맡으면서도 막상 강림할 수 있는 시간은 짧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직접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무언가 절박하거나 긴급하다는 소리겠지.

균열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단아한 한복을 입고 있는 미인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그녀의 주위로 온갖 이로운 기운들이 몰아치고 있었다.

“강현찬이라는 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복과 운명, 행운의 여신.

감은장아기.

현찬을 만나기 위해 그녀가 직접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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