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56화 (56/265)

# 56

56화 운명의 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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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부르는구나.”

실을 만지던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경직했다. 그러나 경직은 짧았다. 새하얀 손의 주인은 다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실을 풀어헤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검은색 댕기가 흔들렸다. 그녀는 손으로 계속 실을 만지고 있었지만, 눈은 지금 다른 세계를 보고 있었다.

아시아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반도.

그녀가 바라보는 그곳에서 지금 운명의 소용돌이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최근 신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각성자 ‘강현찬’

이 땅에 나고 자라온 존재인 그녀 또한 그 이름을 알았고 현찬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다만 모든 신들이 그를 탐낼 때 그녀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 그의 곁에는 그녀로서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가 현찬을 지키듯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그와 동등한 존재가 하나 더 추가된 상태다.

그것 때문인지 어지간한 신급 영령들은 그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도 딱히 큰 관심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운명이, 뒤틀리는구나.”

감고 있는 실이 조금씩 엉키며 꼬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실이 꼬였다는 것은 운명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앞으로 하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좋지 않아."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계에 신의 힘이 사용된 것. 그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것이 정식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힘을 사용한 신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헤르메스.

아폴론.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손오공.

신급만 무려 다섯이다. 이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힘은 힘을 부른다.

특히나 이런 것에 민감한 존재들은 하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그들이 자극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문제는 녀석들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갖 혼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들. 다른 세계의 침략자들. 그들이 모두 한반도라는 자그마한 극동의 땅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원래라면 별 탈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야 할 순리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이 막히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 모든 일의 중심이자 핵인 현찬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그녀.

운명과 길흉화복의 여신 <감은장아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을 만나기 위해서.

&

헤르메스는 고개를 들었다. 경계서다 포식자를 발견한 미어캣처럼 노트북을 만지다가 갑자기 고개를 짓쳐 드는 헤르메스를 보며 현찬은 의아했다.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라서.”

“그래?”

헤르메스가 자연스럽게 대꾸하자 현찬은 별말 없이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그런 현찬의 곁에서는 에크티가 포도알을 하나씩 집어서 현찬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현찬이 입에서 과일을 씹는 동안 에크티는 깃털로 이루어진 커다란 부채를 꺼내 현찬의 얼굴에 살살 흔들어 주었다.

그야말로 귀족들도 울고 갈 호화로운 대접!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현찬도 결국 적응의 생물인 인간인지라 지금은 자연스럽게 에크티가 해주는 수발을 받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그런 현찬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그렇게 대접받으니까 좋으시겠어? 나중에 밤에 자리 비워줄까?”

“네가 눈에 불 켜고 지켜볼 거 같으니까 싫어.”

“현찬 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런 건 좀 신경 써라.”

에크티는 다 좋은데 수치심이나 그런 것이 거의 결여됐다는 것이 문제다.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충성심이 그보다 앞서니 생기는 문제였다.

현찬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한 군식구가 늘었다는 생각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결국, 조금 전 헤르메스가 보인 의심스러운 반응을 기억에서 지운 채 침대에 몸을 더 파묻었다.

현찬이 자신에게 관심을 접자 헤르메스는 조용히 헛기침하며 눈앞에 나타난 인물과 얼굴을 마주쳤다.

[그래서. 나를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지?]

헤르메스가 현찬에게 들리지 않게 심언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저승사자 강림도령.]

차사본풀이에 나온다는 저승차사 강림도령.

몸에 딱 맞는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허공에 둥둥 떠 있다가 바닥에 착지하며 헤르메스의 맞은편에 앉아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영령이 계약자도 없이 이렇게 현계에 나타날 줄이야.]

[나는 조금 특별하거든. 다른 사자들과 다르게 이승을 자유롭게 오가는 직책이다 보니 제한이 거의 없지. 그보다 요즘 시대의 집은 참 들어오기 쉬워. 일문전신, 뒷문전신은 커녕 조왕신(竈王神)조차 없으니 말이야.]

강림차사는 ‘다만’ 하고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칭찬은 됐어. 그보다 내 계약자의 수명이 다해서 데려온 건 아닌 것 같고. 보아하니 내가 목적인 거 같은데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다시 한번 물어도 될까?]

[본래라면 너의 계약자가 목적이었지만,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쪽에 이야기하는 편이 나에게도 더 편하겠지.]

강림차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마 전, 길잃은 영혼들을 이끌어 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악마 <푸르카스>에 붙잡힌 영혼들을 인도해준 일. 녀석을 쫓아내고 남은 영혼을 헤르메스가 보내준 것에 대해서 강림은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감사의 인사는 됐어.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니까.]

헤르메스는 딱히 누군가에게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죽었음에도 강제로 묶여 이승을 방황하는 영혼들이 딱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줬을 뿐이니까. 다만 강림의 입장에서는 흔들리는 세계의 균형을 헤르메스가 어느 정도 맞춰주었으니 고마워할 법도 했다.

[같은 일 하는 영령끼리는 돕고 살아야지. 안 그래?]

헤르메스는 딱히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자를 명계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헤르메스와 죽은 사람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차사 강림은 서로 하는 일이 비슷했으니까.

강림은 헤르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쪽에서 편하게 대해준다면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겠군.]

강림은 본론을 꺼냈다.

[최근 이 나라에 이상한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지 않나?]

[…… 뭐, 그렇긴 하지.]

무엇보다 대부분 일이 현찬과 연관된 것들이 태반이기에 헤르메스의 입장에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게이트 폭주를 시작으로 다른 조직들의 습격이나 온갖 사건, 사고가 벌어졌으니까.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너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까.]

강림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보다도 이런 사태에 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헤르메스였으니까.

[하계에서 각성자들을 통해 신의 힘을 행사하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지. 하지만 그쪽은 너무 독특한 케이스야.]

다른 영령들과 계약을 맺게 해주는 신이라니.

상식을 벗어나도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헤르메스 그 자체의 힘이라면 모를까 다른 신의 힘까지 하계에서 사용되니 당연히 순리가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헤르메스의 권능-계약> 자체 때문에 순리가 어긋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힘을 사용할수록 힘을 느끼고 그것에 관심 두는 존재들이 늘어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리라.

힘에 취한 자들이 한곳에 모이다 보면 결국에는 운명의 비틀림이 일어나게 된다.

[앞으로도 이러한 것들은 계속 늘어나겠지.]

강림은 침대 위 누워있는 현찬에게 눈길을 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닌 <사자의 눈>을 통해 보는 현찬의 내면에는 지금까지 거쳐 간 존재들의 잔류 힘들이 희미한 향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스의 신들은 둘째 치고서라도 투전승불이 된 원숭이의 힘까지. 강림은 내심 크게 감탄하며 눈을 돌렸다.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또한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멈추기라도 하게?]

[그럴 리가. 마땅한 계약자가 없는 내가 어찌 너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계약자를 구하면 되잖아?]

[마땅한 존재가 없어. 요즘 시대에는 그런 인재는 남아나질 않으니까. 너의 계약자를 제외한다면 말이야.]

[미안하지만 현찬은 내 계약자라 쉽게 내어줄 생각이 없어.]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욕심은 일찍 버리는 게 속이 편하거든.]

강림도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다른 차사들보다 이승을 자주 오가는 그의 처지에서는 현찬이야말로 계약자로 삼기에 가장 최고의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준 신급에 준하는 그라고 하더라도 경쟁 상대가 저런다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네 계약자가 나를 불러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뭐, 나도 그 정도까지 막을 생각은 없어. 나는 쿨한 신이니까.]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군. 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강림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헤르메스도 귀를 세우며 경청의 태도를 보였다.

[신들의 힘이 모이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문제지. 그쪽에게 그 일들을 해결하라고 강제할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경고는 하겠어. 앞으로 너희들에게는 계속 온갖 일들이 닥칠 거야.]

신의 힘에 취한 자들이 한 장소에 모이다 보면 ‘순리’가 뒤틀린다. 그리고 순리가 뒤틀리면 운명에 영향이 가고 ‘뒤틀림’이 발생하게 된다. 이대로 가게 된다면 기간테스가 나타났던 게이트 사태보다 더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계약자를 아끼는 영령이라면 이런 상황에 걱정을 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거 마음에 드네.]

헤르메스는 씨익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바라던 일들이 있을까.

[영웅은 심심한 일로 태어나지 않아. 온갖 사고와 역경을 뛰어넘어 그 한계를 돌파해야만 완성된다.]

그리고 헤르메스가 생각하는 현찬은 고작 이런 일로 쓰러질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것들을 뛰어넘고 정복하며 자신의 힘을 세계 천하에 떨칠 영걸이었으니까.

[강림. 너도 알고는 있겠지. 이 세계는 아직 완전하게 ‘통합’이 된 게 아니야.]

[그렇지.]

헤르메스의 말에 강림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20년 전 일어났던 <대통합>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다며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는 알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아직도 실시간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끝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도 몰라.]

[그래서…….]

[영웅이 필요한 법이지.]

혼란한 세상에는 그것을 막아줄 영웅이 필요하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라면 더더욱.

[한때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타락해버린 자들도 많지. 영령 중에서도 온갖 괴상한 녀석들과 계약을 맺으며 뒤틀린 녀석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반대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온갖 이상한 놈들이 있다면 그런 녀석들을 잡는 자도 필요한 법이야.]

[그것이 순리에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망가질 순리야.]

‘그리고’라고 하며 헤르메스가 씨익 웃었다.

[순리? 그까짓 게 망가지는 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세상은 이미 바뀔 대로 바뀌었다. 영령인 그들이 지상에 그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순리고 운명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들은 더는 통제를 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간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어. 너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

강림은 그 어떠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헤르메스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게 너의 대답임을 알겠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부정은 하지 않지.]

하지만.

[다른 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그건 나와 내 계약자가 알아서 헤쳐갈 일이야.]

[응원하지. 그리고 다른 신들을 조심해라. 나로서는 막지 못할 내 윗선들도 너의 계약자에게 관심두고 움직이고 있어.]

[충고 고맙네.]

그럼 이만, 이라며 강림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헤르메스는 그저 눈웃음으로 그를 배웅해 주었다.

강림이 떠나고 헤르메스는 몸을 뒤로 뻗으며 바닥에 누웠다.

현찬은 그런 헤르메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지루해?”

“엉.”

“그럼 산책이라도 할래?”

현찬의 제안에 헤르메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그의 입가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즐거움이 가득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거 좋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보다도 헤르메스에게는 지금 당장 즐거움이 최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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