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계약파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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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는 계약을 주관하는 계약의 신이다.
이 계약이라는 것은 서로 상호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를 의미하는 데 이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약속이고 서로를 신뢰로 묶는 연결고리다.
그것은 <각성자>와 <영령>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각성자는 영령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힘을 빌린다. 영령은 각성자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생전에 지내던 현실에서 자신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쌍방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이며 이것이 그들이 맺은 일종의 <계약>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계약>을 주관하는 것이 바로 헤르메스였다.
즉 헤르메스는, 마음만 먹는다면 영령과 각성자 간의 계약을 무효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헤르메스의 권능-계약파기>
헤르메스를 <소환>하는 단계에 도달하면서 얻게 된 새로운 권능.
물론 상당히 제약이 많은 능력이다. 일단 헤르메스를 <소환>하는 단계에 도달하면서 겨우 얻게 된 것도 있지만 상대방 영령의 격이 일정 수준만 되어도 들어가는 마력의 양이나 부하가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횟수 제한까지 있으니 오히려 계륵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쪽도 나름의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사용하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인 기술.
정말로 확실하게 짓밟을 상대가 아니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기에 그만큼 발동했을 때 효과는 확실하다.
상호 간의 계약을 그야말로 강제로 파괴하는, <영령>과 <각성자>에게 가장 흉악하고 끔찍한 흉기. 그 파괴의 권능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계약파기라는 거창한 이름에 반해 눈에 확 띄는 큰 시각적인 효과는 없었다.
다만 이것은 현찬의 시선에서만 그러했을 뿐. 아마르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
“아, 아아아! 으아아아!”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은 절대 굴하지 않겠다고 독기를 가득 품은 채 말하던 아마르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절규를 토해냈다.
지금 그는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맛보고 있었다.
영령과의 계약으로 인해 얻었던 힘들이 바람 앞의 한 줌 모래처럼 사라져가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준 능력, 권능, 힘들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느낌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에 버금갔다.
“아아아! 안 돼! 그만둬! 그만두라고!”
아마르는 영령과 나름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상당히 계약의 수준이 깊었다.
그것을 전부 다 해지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기에 하나씩 차근차근 잘라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마르 알 하진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끝에서부터 야금야금 도려내는 느낌을 줬으니까.
파앗!
결국, 아마르는 자신과 계약한 영령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느끼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허탈하리라. 아니 그런 수준을 넘어서 공허할 것이다. 지금까지 영령의 힘을 이용해서 온갖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사람이 영령을 빼앗겼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장기의 일부가 사라진 것에 버금가리라.
[이 녀석과 계약한 영령이 엄청 시끄러운데?]
헤르메스가 그렇게 물었지만, 딱히 이쪽에 큰 피해는 오지 않는다.
<계약파기>는 이름만 들으면 매우 사기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것도 그렇게 만능은 아니다. 아무리 영령들의 사이에서도 격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 또한 영령이다.
지금은 현찬이 헤르메스의 힘을 매우 잘 다루기에 가능했고 상대가 그래도 왕급 영령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지 영웅급 영령만 돼도 강제로 계약을 끊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시해. 어차피 온갖 악행 저지른 놈인데 그런 말을 들어줄 필요도 없어.’
[오케이.]
헤르메스도 사실 그냥 해 본 소리였다.
제까짓 게 노예 왕조 8대 왕이라고 노발대발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쪽은 신인데.
“어때? 이래도 아무렇지 않아?”
현찬은 차갑게 웃으며 아마르에게 물었다.
아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현찬에게 기어 올 뿐이었다. 영령과 강제로 계약을 해지당한 충격에 빠진 그는 현찬의 앞까지 기어오더니 이내 머리를 푹 숙이며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죄송, 합니다. 부디…… 부디 자비를…….”
“…….”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아마르를 보며 현찬은 기가 찼다.
지금까지 자신보다 약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테러를 벌여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런 녀석이 이제 와서 영령이 사라졌다고 죄송하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비는데 과연 진심이 들어가 있을까?
저것이 정말로 죄송해서 사죄하는 건가?
그 뻔한 속내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자비?”
현찬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는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줬어?”
그들이 절규를 내뱉으며 살려달라고 빌었을 때 아마르는 무기를 휘둘렀다.
채찍을 휘두르며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
그리고 피와 시체로 가득한 공간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보며 뿌듯해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을 죽이고 미친 듯이 웃은 녀석이 자비를 구해?”
그는 용서받지 못한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설사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지 못할 것이다.
“그, 그걸 어떻게……?”
“내게는 전부 보이거든.”
현찬에게는 보인다.
전부 보였다.
아마르의 등 뒤에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들이.
아마르에게 살해당해 여전히 고통이라는 늪에 빠져서 절망에 사로잡힌 그들의 모습이.
현찬의 눈에는 전부 보였다.
헤르메스와 지나치게 동조율이 높아진 현찬에게도 저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들이 어떤 심정을 품고 있는지도 절절하게 현찬의 마음에 전해졌다.
그러니 아마르는 용서받지 못한다.
[불쌍한 아이들.]
헤르메스는 영혼들에게 측은한 시선을 던지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정해진 천수를 채우지도 못한 채 비운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자들.
헤르메스가 비록 저들을 인도해줘야 하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연민의 감정을 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너는 앞으로도 영원히 영령과 계약이 불가능할 거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약자의 자리에서 살아갈 거야.”
현찬은 카두케우스 지팡이 끝으로 아마르의 정수리를 쿡 눌렀다.
“자살도 할 수 없을 거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 도저히 죽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헤엄치며 살 거다. 그 안에 가라앉아 숨이 막혀도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렀던 죄업을 뉘우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도. 너는 평생 그렇게 살 것이다.”
언제나 꿈속에서 자신이 죽인 자들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시달리며 매일 악몽을 꿀 것이다.
그런데도 자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찬의 최면이 끝나자 아마르는 그대로 털썩 쓰러지며 잠에 빠져들었다.
[가자꾸나. 얘들아.]
헤르메스는 아직도 아마르의 주위에 몰려있는 원혼들에게 다가갔다.
손에 망자들을 저승으로 이끄는 카두케오스 지팡이를 쥐고 아직도 이승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며 자신들이 가야 할 장소로 인도해준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헤르메스의 인도로 인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그들은 모두 웃으면서 현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현찬은 그저 묵묵히 입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다른 곳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것이 현찬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직도 공포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르마였다.
[저 악마 녀석의 계약은 내가 강제로 끊어내기엔 너무 힘들어.]
헤르메스는 이번에는 <계약파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영웅급 영령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자랑하는 레메게톤의 72악마 중 하나를 상대로 강제로 계약을 해지시키기에는 아직 헤르메스의 힘을 다루는 현찬의 능력이 부족했다. 헤르메스의 본신이라면 가능했겠지만, 이곳은 하계, 그 힘이 제한받고 있기에 한계가 명확했다.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에게 맡기라고.]
이번에 나선 것은 바로 손오공이었다.
계약을 파기하는 권능이 상대방에게 먹히지 않는다면 그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까.
[예로부터 요괴나 악마 녀석들은 말로 해서는 잘 못 알아먹거든.]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이를 드러내며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들이 바로 요괴나 악마들이다. 난폭하고 사납고 제멋대로다. 특히나 자신의 이름값이 높다고 자부하는 녀석들이야말로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 녀석들은 좋게 타이른다고 해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고분고분 행동하지 않는다.
[저런 녀석일수록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눌러줘야 하거든.]
절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
손오공이 삼장법사와 함께 다니며 다양한 요괴들을 만나서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힉!”
손오공의 힘을 빌린 현찬이 다가오자 수르마가 기겁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것은 수르마와 계약을 맺은 악마 <푸르카스>도 마찬가지였다.
또다.
또 저거다.
끔찍한 두 개의 황금색 광휘를 눈에서 쏘아내며 자신의 영혼 한 줌마저 찢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괴물.
그 흉악한 기세를 뿜어내는 원숭이.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숭이의 얼굴의 양쪽에서 새로운 얼굴이 튀어나왔고 붉은빛 아지랑이 너머로 꿈틀거리던 황금의 광채가 3배로 늘어났다. 그의 어깨로 튀어나온 팔이 6개로 늘어나고 숨을 내쉴 때마다 지독한 유황 냄새가 <푸르카스>의 코를 찔렀다.
삼두육비(三頭六臂)
손오공이 사용할 수 있는 변신술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흉악한 형태.
그것이 비록 실체를 이룬 것이 아닌 누군가가 보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시각으로 주는 막대한 파괴력과 압박감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꿇어라.]
대기를 낮게 울리는 울음소리.
말 한마디에 담긴 엄청난 법력과 힘이 그대로 <푸르카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대항할 수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힘의 순리에 굴복한 푸르카스는 몸을 낮춰 고개를 숙였다.
6개의 황금빛 눈동자가 푸르카스를 주시했다.
[네놈의 계약자를 버리고 당장 꺼져라.]
[하, 하지만 제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차단한다면 저는 앞으로도 계약을 맺지 못합니다.]
계약의 해지는 상호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무리 푸르카스라고 해도 자기 멋대로 계약을 끊고 다른 이와 맺는 경우는 불가능했다.
계약의 신이 돕지라도 않는 이상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계약의 신이 있었다.
[이거면 됐지?]
헤르메스가 순식간에 계약을 끊어 주었다. 푸르카스가 만약에 하지 않겠다고 힘을 주고 버틴다면 헤르메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저쪽에서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때부터 헤르메스의 턴이었다.
“아아아아!!”
수르마는 자신의 몸 안쪽에 가득 찬 힘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주름진 그의 피부가 더욱 갈라지고 흉해졌으며 몸도 더 굽어 갔다. 그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바닥을 뒹굴었다.
푸르카스의 힘이 사라지자 수르마에게 속박된 원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아. 너희들도 가자꾸나.]
수르마는 아마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사람들을 덜 죽이지 않았다. 수르마의 주변에서도 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길을 잃고 푸르카스에게 속박되어 계속 고통을 받았다.
헤르메스는 그들 또한 가야 할 곳으로 인도를 해주었다.
영혼의 인도가 끝나고 현찬은 수르마와 아마르 둘을 속박했다. 이 둘은 이제 가진 힘을 잃은 채 자신들이 지금까지 잘도 짓밟아 온 약자의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괴로워 자살하려고 해도 현찬이 몰래 심어 놓은 최면은 그들을 계속 방해하리라.
천수가 다할 때까지.
“가자. 죗값을 치르러.”
이것으로 모든 죄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저들의 남은 삶은 이제 평생 스스로 죄를 뉘우치는 데 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