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53화 투전승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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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아. 내가 너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수르마 알 에가르.
악마 <푸르카스>의 계약자이자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마이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키 보다 더 큰 거대한 낫이다.
헌터들은 보통 대중적인 무기를 쓰고 영령에 따라서 조금 독특한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낫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저런 무기를 만드는 사람도 없어서 사용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거대한 낫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아주 먼 과거부터 많은 헌터들을 사냥하고 그들의 목을 베어 왔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목 베기의 수르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데스페라도의 간부 중 하나였던 그가 3년 전부터 어디에서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어 소식이 뜸하던 차에 갑작스럽게 한국에 등장했다.
수르마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목을 풀었다.
“최근 할 일 때문에 바빠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상대가 이 정도라면 몸풀기 정도로 적당하겠어.”
현찬과 수르마의 거리는 약 30m.
갑자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 주변 일대를 휘감았다. 까맣게 탄 재들이 날리며 주변에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수르마는 마치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변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정신 차려보니 현찬의 머리 위에서 낫을 내리찍고 있었다.
챙!
여의금고봉과 낫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와 함께 불꽃을 만들어냈다. 수르마는 첫 공격이 빗나가자 바로 다음 공격으로 들어갔다. 그의 검은 낫이 밤의 어둠에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더니 이내 열 개의 칼날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현찬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의금고봉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거나 쳐 냈으며 심지어 중간에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허허허! 이거 참 재미있구나!”
수르마는 현찬이 쉽게 쓰러지지 않자 오히려 기뻐했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이렇게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몸소 행차했는데 고작 송사리 같은 녀석과 싸우면 수지타산이 안 맞지 않는가.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수르마가 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에서 뭉게뭉게 대던 검은 기운이 수천 마리의 뱀으로 변하며 현찬의 몸을 물어뜯으려 했다. 현찬은 여의금고봉으로 바닥을 쿵 찍었다. 그러자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뱀들이 모두 어둠으로 흩어졌다.
현찬의 반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토양이 울긋불긋 일어나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토룡 한 마리가 솟아오르며 수르마를 물어뜯으려고 입을 벌렸다.
“헛?!”
수르마는 설마 현찬이 저런 반격을 가할 줄 몰랐는지 숨을 집어삼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자그마한 체구가 마치 검은 팽이처럼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더니 이내 그곳에서 거대한 검은 참격이 뿜어져 나와 토룡을 정수리부터 꼬리까지 갈라버렸다.
바닥에 착지한 수르마는 두 손으로 낫을 쥐며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이놈.’
그는 조금 전의 움직임으로 빈틈이 생겼는데도 현찬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음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주름 많은 얼굴에 그 수를 더욱 늘렸다.
‘감히 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고?’
그가 누구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100명이 넘는 헌터들의 목을 베었고 그보다 더 많은 일반인을 죽였다.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를 두려워했으며 한때는 이름만 대도 사람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유명했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
비록 조직 사정 때문에 3년 전부터 활동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가 이룩한 악업은 감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으득!
“그렇게 여유 부린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수르마는 더 여유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 나름 싸울 만한 상대를 만났다고 봐주며 싸운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탓에 오히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며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니까.
“오너라. 악마. 푸르카스여. 비명과 절망을 양식 삼아, 이 자리로 내려오라.”
드드드드!
수르마 주위로 거대한 검은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지면이 잘게 떨리며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용오름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구쳤다. 그 안쪽에서 수르마의 모습이 점차 기괴하게 뒤틀렸다.
현찬보다 작았던 그의 몸집이 풍선처럼 점점 거대해졌다. 그가 걸친 남루하고 헐렁했던 옷들은 오히려 몸에 꽉 낄 정도로 작아졌으며 어떤 부분은 찢어지기까지 했다. 수마르의 삐쩍 말랐던 몸은 근육이 흉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의 온몸에 검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바로 피 웅덩이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시뻘건 그의 눈동자였다,
“크흐흐흐흐!”
목울대를 따라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어둡고 음침하며 거북한 소리. 듣기만 해도 몸 위에 벌레들이 미친 듯 기어 다니는 것처럼 오한이 돌았다.
검은 용오름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수르마는 그야말로 악마의 계약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애송아. 이젠 본격적으로 간다.”
그렇게 경고를 날린 수르마가 상체를 낮추었다.
“흡!”
수르마가 숨을 집어삼키며 몸에 힘을 주었다. 지면에 닿은 그의 다리 근육이 벌크업 된 것처럼 두껍게 부풀어 올랐다. 엄청난 압력이 지면을 짓누르자 그를 중심으로 땅이 거미줄처럼 금이 쩍쩍 갔다.
콰아앙!
그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폭발이 일어나며 수르마의 몸이 마치 포탄처럼 정면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지나가는 땅은 불도저로 밀고 간 것처럼 뒤집혔고 강렬한 바람이 모든 것을 휘감으며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야말로 거대한 해일이 코앞으로 들이닥치는 것만 같은 긴박감 속에서 현찬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줄어들어라. 여의.”
여의봉의 크기가 성냥개비처럼 작아지더니 현찬은 그것을 자신의 귀 위에 올리고 몸을 뒤로 훌쩍 날려 거리를 더욱 벌린 채 두 손을 넓게 벌려 직접 수르마를 노려보았다. 네놈 따위는 맨손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건방진 놈!”
수르마는 자신의 이 강렬한 맹진을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막으려는 현찬의 태도에 분노를 터뜨리며 더욱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거대한 산에 터널처럼 구멍을 뚫는 이 돌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네놈의 그 오만함을 죽음으로 갚아주마!’
<흑마광진(黑魔狂進)>
악마화한 그의 최종 필살기이자 지금까지 막아낸 존재가 없다고 자부하는 일격필살의 기술.
그의 육신은 검은 유성이 되어 현찬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퍼져나가며 현찬과 수르마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바닥에 쓰러진 아마르의 신체가 볼품없이 휘날렸고 불붙었던 나무는 강력한 파괴의 파동에 전부 전소되었다. 나무와 바위가 뿌리째 뽑히며 흙먼지와 함께 휘날렸고 주변 일대에 먼지구름이 뿌옇게 일어났다.
‘아니?!’
그 파괴의 중심 속에서 수르마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전력이 담긴 이 일격을 현찬은 정말로 무기도 없이 두 손으로 막아냈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라!’
그가 한 번 더 검은 마력을 몸에 두르며 한층 더 밀어내는 힘을 늘렸다. 쿠웅! 현찬의 두 발이 지면에 한 치 더 깊숙이 박혔지만, 그의 몸은 아주 조금이라도 뒤로 밀려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수르마의 몸이 바닥에 고랑을 만들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태산밀기>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노리는 <은각대왕>이 손오공에게 사용했던 <태산압정(泰山壓頂)>을 받아친 기술이었다. 이때 손오공은 각 어깨에 수미산과 아미산을 들고도 멀쩡하게 걸어갔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선보였다.
<태산밀기> 또한 바로 그것을 형상화한 기술이었다.
현찬이 발을 하나하나 내디딜 때마다 수르마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 나갔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저항하려 해도 현찬의 몸은 무슨 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크와아아아!”
결국, 수르마는 괴성을 내뱉으며 미는 것을 그만두고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현찬은 쩝 하고 입맛 다시며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 자식이!”
수르마가 분노를 터뜨려도 현찬은 신경 쓰지 않고 손오공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적응한 거 같네.”
[…… 호오? 벌써?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한 계약자네.]
자신의 힘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차용>의 단계를 전부 깨우친 현찬의 모습에 손오공은 나지막이 감탄했다. 현찬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손오공은 자신의 술법을 전부 <차용>하는데 한 세월이 걸릴 거로 예상했지만 그런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손오공은 그제야 왜 신들이 현찬을 눈독 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상을 벗어난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신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예상을 넘나드는 존재는 그야말로 영겁에 가까운 그들의 삶에 있어 언제나 최고의 활력소였다.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네 차례야.”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친구!]
현찬의 몸의 위로 더욱 강렬한 마력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수르마는 험악한 인상을 더욱 처참하게 구겼다. 현찬이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로서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네놈이 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숨통을 끊어주마.
수르마는 자신의 낫에 강렬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의 낫의 날 위로 검은 마력이 덧씌워지며 예리하게 변해 날의 길이를 더 크게 늘려주었다. 암흑 마력으로 이루어진 오라 블레이드. 닿는 것은 설사 다이아몬드라도 순식간에 썰어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수르마는 이대로 현찬의 목을 베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덜컥!
‘무, 무슨?!’
그의 몸은 마치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몸에 힘을 주고 무언가 해 보려고 해도 그의 강건한 육신은 마치 얼음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화르륵!
현찬. 아니, 현찬의 등 뒤에 떠오른 거대한 짐승 얼굴. 날카로운 이빨과 황금빛 털 그리고 그보다 더 눈부신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동자는 마치 하늘에 2개의 태양이라도 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원숭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 하나를 그냥 날려버릴 수 있는 신이 된 요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수르마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미친 듯이 내질렀다. 그와 계약을 맺은 악마 <푸르카스>도 마찬가지였다. 지옥의 뜨거운 겁화보다 더 강하게 몰아치는 그 광휘에 72주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푸르카스도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저것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가 보는 것이 결국 스스로가 보는 환상일 뿐이었음에도 지금까지 뜨겁게 타오르던 투기가 가뭄의 논바닥처럼 말라버렸다.
“아, 아아아…….”
털썩.
수르마가 무릎을 꿇었다.
지나친 공포에 그의 육신은 정신의 통제를 벗어난 채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그런 수르마를 내려다보며 현찬에게 <빙의>를 한 손오공은 싱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헹. 결국, 이거밖에 안 되는 거였네.”
자신의 힘 일부만 보여주었을 뿐인데도 수르마는 공포에 질려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았다. 나름 가볍게 몸 풀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그의 지나친 과대평가였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간 수르마는 변신하기 전보다 10년은 더 늙은 것처럼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참 성격 많이 죽었어.]
예전의 손오공이였다면 여의봉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때려 부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손오공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현찬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내주었다.
“으, 으윽.”
때마침 기절해 있던 아마르 알 하진이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현찬은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수르마의 멱살을 틀어쥐고 번쩍 들어 올려 아마르에게 다가갔다.
“수, 수르마 님?”
아마르 알 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에 당황했다.
자신을 도와주려 파견된 조직의 간부가 대체 왜 저런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주변은 왜 이렇게 폐허처럼 변했단 말인가?
아직도 제대로 상황파악 하지 못한 아마르의 머리 위로 현찬의 싸늘한 시선이 떨어져 내렸다.
“네가 그랬지? 내가 어떻게 해도 너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없다고.”
수르마를 아마르의 곁에 집어 던진 현찬은 아마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에게 진짜 절망이 뭔지 보여줄게.”
그렇게 말하는 현찬의 손에는 [카두케오스(caduceus)] 지팡이가 쥐여 있었다.
계약의 신 헤르메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현찬은 여기서 처음으로 선사했다.
<계약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