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투전승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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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밤은 도시보다 더욱 빨리 찾아온다.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은 산등성이로 얼굴을 숨기고 푸른 하늘은 마치 타오르는 밀밭처럼 주황색으로 화려하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며 심해의 차가운 바다의 빛을 띠며 틈새 사이로 어지러운 별빛이 총총히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 잉크처럼 무겁고 칙칙한 어둠이 낮고 짙게 내리깔린 숲속에서 아마르 알 하진은 달리고 있었다.
헌터로 각성하면서 급격하게 증가한 그의 뛰어난 오감 덕분에 그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하며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쉴 틈 없이 미친 듯 뛰었으며 계속 헐떡이는 숨은 폐가 갈라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칠었다.
“허억. 허억!”
하지만 아마르 알 하진은 다리를 멈추지 못했다.
그것은 조금 전부터 그를 쫓아오는 두 개의 황금색 광휘 때문이었다.
그것은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를 가더라도, 어디에 숨더라도 저 한 쌍의 황금빛은 계속 그를 쫓아왔다.
‘헉! 헉! 제기랄!’
그렇기에 아마르 알 하진은 달렸다. 저 꿈에 나올까 무서운 한 쌍의 불빛을 피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그는 달리는 와중에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면, 그곳에서 조금 전까지 뒤따라오던 한 쌍의 불빛이 허공에 떠 있었으니까.
아마르는 이를 악물고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불빛이 여전히 존재했다. 옆을 돌아도 똑같았다. 뒤를 돌아보아도 그랬다.
그는 이미 포위당했다.
족히 수백 쌍이 넘는 황금빛이 아마르 알 하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
계속.
“으아아아!”
아마르 알 하진은 가지고 있는 모든 폭탄을 던졌다. 콰과과광! 주황색 짐승이 검은 대지를 밝게 비추고 숲의 한 귀퉁이를 집어삼키며 불을 내지른다.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돌풍이 한차례 몰아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런데도 주변에 떠 있는 황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르 알 하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 황금색 불빛은 단순한 빛이 아닌 자신을 쫓아오는 악마의 눈동자라는 것을.
화안금정으로 인해 황금색 빛을 내는 손오공의 눈동자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명이 아닌 수백 명이.
분신술.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자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술법이었다.
분신의 각 능력은 몇 명의 분신을 유지하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수가 많을수록 약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나쁘게 작용하지 않는다.
아마르 알 하진은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현찬과 똑같은 모습을 한 분신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으니 그는 도망가지도 못한 채 자리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피하는 것은 글렀다. 결국, 아마르는 채찍을 쥐었다.
“으아아! 죽어라! 죽어!”
현찬에게 몇 시간 동안 쫓기며 시달렸던 아마르 알 하진은 입에 거품을 물며 주변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아직 폭발의 충격으로 불타던 나무들은 몬스터의 부산물로 이루어진 강력한 채찍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마르 알 하진을 중심으로 반경 10m 이내에 있던 모든 장애물이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 주변에서 계속 황금빛 눈동자로 아마르를 주시하고 있던 현찬의 분신들 또한 맥없이 쓸려나갔다.
“허억. 허억. 헉!”
아마르 알 하진은 한바탕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고 난 후에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정신이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린 상태에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현찬이 아직도 그를 계속 농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는 알고 있다.
현찬은 자신을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쉽게 잡을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현찬은 아마르 알 하진이 그야말로 벼랑의 끝에 몰릴 대로 몰려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다가 절망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저항감마저도 모두 밟아 으스러뜨리려는 것이다.
‘감히!’
아마르 알 하진은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현찬이다. 그는 강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르는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쉽게 질 것 같으냐!’
그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신념이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가 고작 영령을 잘 만나서 승승장구하는 자에게 질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찬은 그런 아마르 알 하진을 비웃었다.
저놈은 대체 뭐가 잘났다고 이 상황에서 분노한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뻔뻔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 어처구니없는 당당함과 자신의 죄를 모르는 뻔뻔함이 역겹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 않은가.
“너는 화를 낼 자격이 없어.”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자들은 데스페라도의 테러로 가족들이 상처입은 피해자들이다. 제 딴에는 무언가 신념이나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찬의 입장에서는 결국 그는 테러리스트고 악당일 뿐이었다.
“닥쳐라!”
아마르 알 하진은 사방에 몰려있는 현찬의 분신을 향해 공격을 계속 퍼부었다.
퍼버버벙! 그 많던 분신들은 바람 앞의 낙엽처럼 처량하게 쓸려나갔다. 분신들은 한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변하며 사라졌다. 하지만 정작 현찬의 분신을 쓸어내는 아마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그는 자신이 지닌 마력과 모든 체력을 소진했다. 지금 이 자리에 가까스로 서 있는 것도 용했다. 이제 그는 현찬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다 끝났냐?”
현찬이 손을 젓자 주변에 포진했던 모든 분신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 모든 것의 본체인 현찬뿐. 화안금정이 더욱 강렬한 황금빛을 토해내며 아마르를 압박했다.
“네놈은 결코 나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없…….”
퍼억!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아마르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여의봉. 어찌나 힘 조절을 절묘하게 잘했는지 아마르는 바닥에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아마르의 머리 위로 현찬의 여의금고봉이 잔상을 남기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벅!
"크헉!"
쉬지 않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연타에 아마르는 정신차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절하거나 바닥에 쓰러진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현찬은 그에게 절대로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봉술이 얼마나 신묘한지 아무리 몸을 강하게 두들겨도 아마르가 기절하며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저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서 몸을 살짝 뒤트는 게 전부였다.
보통 데스페라도 조직원 중에서 악질적인 녀석은 사로잡히더라도 스스로 자결할 수단은 남겨놓는다.
하지만 현찬은 아마르에게 그런 것이 절대로 없음을 확신했다.
제 목숨을 바칠 녀석이라면 부하들을 이용해서 자폭테러 같은 일을 벌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현찬은 더욱 마음을 놓고 녀석을 두들겨 팼다.
아마르 알 하진의 얼굴은 너무나도 얻어맞은 나머지 못 알아볼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입술은 터지고 코에서는 쌍코피가 흐른다. 양쪽 눈은 부어올라서 제대로 시야조차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처참할 몰골이 되었음에도 현찬은 자비가 없었다.
“끄윽!”
아마르는 결국 무릎 꿇었다. 현찬은 그런 아마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냐?”
“……!”
현찬의 말에 아마르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찬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반응에 현찬은 여의금고봉으로 어둠이 짙게 깔린 산등성이 너머를 가리켰다.
“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네가 시간을 끄는 걸 모르는 줄 알았어?”
아마르는 철저한 녀석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계획이 모든 것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으며 그 상황을 대비하려 늘 보험을 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보험이 지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시간 안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직접 움직이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부러 사방으로 폭탄을 던지며 소음을 일으킨 이유 또한 바로 먼 곳까지 신호를 보내고 이쪽에 자신이 있음을 알렸던 것.
하지만 현찬은 그것을 전부 눈치챘다.
손오공의 힘을 <차용> 함으로서 얻은 <화안금정(火眼金睛)>은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을 마치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으니까.
“흐, 흐흐흐! 크흐흐! 그래! 알아서 뭐 어쨌다는 거냐! 네놈은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현찬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아마르는 입가에 피 섞인 침을 흘리며 미친 듯 웃었다. 그는 확신했다. 현찬은 지금 이 자리에 다가오는 존재의 진정한 실력을 모른다고. 알았다면 당장에 도망을 갔을 테니까.
“네놈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마! 그래. 네놈은 강하다! 이 나라에서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 오만함이, 네놈의 그 아둔함이 오늘 너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크하하핫!”
“시끄러워.”
현찬은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아마르의 머리를 여의봉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터엉! 청명한 소리와 함께 아마르는 뒤로 자빠지며 기절했다. 현찬은 그런 아마르를 무시하며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호오? 꽤나 움직임이 날래구나. 범상치 않아 보여.]
손오공은 상대방이 아마르와는 급이 다른 자라는 것을 깨닫고 흥미가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몸 풀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길 바라는 그의 감정이 현찬에게 전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그는 어느 순간 바로 현찬의 앞에 착지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덩치는 작았고 피부는 주름이 너무 져서 마치 마른 건포도를 보는 듯했다.
그런 노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낫을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인은 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아마르를 보며 혀를 찼다.
“멍청한 놈. 그 간단한 일조차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아마르를 힐난하던 노인은 현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 늙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도저히 허약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흉흉한 눈빛은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훨씬 더 정정함을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그래. 애송이. 보아하니 네 녀석이 우리들의 대업을 망쳤겠지?”
현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의금고봉을 고쳐 쥐었을 뿐.
큭큭 거리며 웃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됐으니 말이 어찌 필요하겠나. 하지만 애송아. 너는 잘 못된 선택을 했다. 너는 나를 보자마자 도망갔어야 했어.”
노인의 등 뒤로 검은 무언가가 몽실 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검고 탁하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그 탁한 기운은 이내 악마의 형상을 이루었다.
“나 72악마 푸르카스의 계약자인 나와 만난 것이 네놈 인생 최후의 실수일 게다.”
솔로몬의 72악마. 그중에서 50위를 차지하는 악마 <사신(死神) 푸르카스(Furcas)>
데스페라도의 간부 중 하나인 그가 직접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행차한 것이다.
어지간한 영웅급 영령에 맞먹는다는 <악마>
그중에서도 푸르카스의 계약자 ‘수르마 알 에가르’는 1세대 각성자이자 자신과 계약을 맺은 악마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노인이었다.
현찬은 그런 수르마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현찬의 등 뒤에서 손오공 또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할 만하지.]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할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