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화 투전승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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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에 동승신주(東勝神州) 오래국(傲來國) 화과산(花果山) 꼭대기에 거대한 돌이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그 돌이 좌우로 깨지며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신묘한 원숭이가 태어났다.
성격은 비록 이상하다고는 하지만 원숭이가 지닌 힘은 진짜였다.
원숭이는 매우 머리가 영민해서 도사로부터 72개의 술법을 순식간에 익혔으며 그 뛰어난 육체와 타고난 전투 감각, 각종 신묘한 도술을 이용해 자신의 적들을 하나하나 박살냈다.
때로는 위험한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원숭이는 결국에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고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것이 바로 나, 손오공 님이란 말씀!]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계속 유지한 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손오공을 보며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구 전체를 통틀어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손오공은 유명하다.
중국 신화에서 최고로 친다는 옥황상제(玉皇上帝)조차도 손오공을 대하기 꺼릴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말 다 했다.
손오공으로부터 빌린 힘. 몸 안에서 용솟음치는 이 뜨거운 힘은 지금 당장이라도 현찬에게 자신의 고삐를 풀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야~ 설마 내가 관심 있는 인간에게서 내 이름이 나올 줄 몰랐단 말이지. 덕분에 우연히 찾아왔어.]
[웃기시네. 언제쯤 자신을 부르고 있을지 대충 다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헤르메스는 그런 손오공에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손오공은 우끽! 거리며 일부러 원숭이 흉내를 냄으로써 헤르메스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쳤다. 그 광경에 헤르메스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리며 솟아올랐다.
[너무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친구. 천계에서 서로 장난치며 놀았던 우정이 이렇게 쉽게 변하기야?]
[끄응.]
사실 헤르메스도 손오공이 정말로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싫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모든 신력을 이용해서 손오공을 쫓아냈을 테니까. 그러려고 부른 게 <아테나>가 아니었는가. 다만 헤르메스의 처지에서는 손오공이 현찬을 눈독 들이는 꼴이 뭔가 아니꼬웠다.
[누가 뭐라고 해도 현찬의 메인 계약자는 나거든?]
[알고 있다고~ 누가 뭐라고 한 적 없거든? 게다가 나는 나름 신사적인 원숭이라서 남의 계약자를 멋대로 빼앗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개과천선했다고.]
손오공의 말은 사실이다.
그가 왕년에는 정말로 온갖 장소에서 깽판을 부리며 난리 쳤지만, 삼장법사를 만나면서 그는 달라졌다. 그에게 시달렸던 <염라대왕>이나 <사해용왕>이 지금의 손오공을 보고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칭찬을 했을 정도.
[애초에 나보다 더 위험한 녀석이 있잖아?]
[…….]
헤르메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손오공은 ‘그 녀석’에 비하면 양반이 아니던가.
천계에서 곧잘 3대 트릭스터(Trickster)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
도둑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
화과산의 원숭이 두목 <손오공>
사기와 기만의 신 <로키>
헤르메스와 손오공이 장난을 아무리 잘 친다고 하더라도 이 둘이 절대로 넘보지 못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북유럽 신화의 <로키>다. 이 녀석은 정말로 자신이 재미만 있다면 같은 가족이라 불리는 신들까지 등쳐먹을 정도로 위험하다.
천계에서 나름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로키의 장난을 보면 헤르메스마저도 가끔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었으니까.
[그 친구가 귀가 참 밝지. 그렇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헤르메스는 결국 손오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손오공이 문제가 아니었다. 로키 녀석이 현찬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헤르메스는 어떻게든 현찬을 녀석의 마수로부터 지켜내려 노력해야 했으니까.
[알았다. 알았어! 나중에 더 부르게 해 줄게!]
[역시 결정이 빨라서 좋아.]
그리고 손오공이 바라는 점을 꿰뚫어 본 헤르메스는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대신 너도 잘 막아야 한다?]
[물론이지. 나도 모처럼 이렇게 멋진 계약자 덕분에 하계에 힘을 쓸 수 있게 됐는 데 그 녀석 때문에 다 망치기는 싫거든.]
둘이 모종의 거래를 맺는 것을 보며 아테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계 최고의 트릭스터 3명 중 2명이 손을 잡고서 나머지 한 명과 대적하려고 하다니 만약에 여기가 신계였다면 모든 신이 기겁하고 도망을 쳤을 광경이다.
[자. 이야기는 이쯤 됐고. 계약자와 대화를 나눠 볼까?]
“둘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현찬은 손오공과 헤르메스가 나누는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고 해서 딱히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고 그 예상은 역시나 들어맞았다.
[뭐,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회포 좀 푼 거지. 개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신에게도 있구나.”
[우리에게도 인격이라는 것은 있으니까.]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아래에 있는 아마르 알 하진과 그를 포함한 데스페라도의 마지막 조직원들이다.
놈들은 현찬이 가만히 공중에 떠 있음에도 반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오공>의 신위에 짓눌려서 그저 멍하니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서 있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마르 알 하진은 혀끝을 살짝 깨물어 정신 차렸다. 비릿한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얼어붙었던 그의 몸이 겨우 해동되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채찍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부하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유일하게 이 자리에서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신뿐. 이대로 싸웠다가는 승산이 없다. 도망을 치는 수밖에. 다행히도 그에게는 아직 <노예 각인>을 남겨놓은 부하가 남아 있었고 이는 아직 유효하게 작용했다.
‘최대한 못 움직이는 척하면서 기회를 살핀다.’
아마르 알 하진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햇빛 탓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찬은 지금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지금 현찬은 자신과 계약한 영령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이다!’
최대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관건. 샤샥. 아마르 알 하진의 발끝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 가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을 밟고 떠 있던 현찬이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아마르 알 하진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어깨에 여의금고봉을 비스듬하게 걸치고 눈을 가늘게 뜨는 현찬의 눈동자에는 황금의 불길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억!’
아마르 알 하진은 입만 열지 않았지 속으로는 비명 지르며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자신의 발이 아주 살짝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현찬은 그것을 바로 포착해서 그의 곁으로 이동한 것이다.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아마르 알 하진을 가장 경악하게 만든 것은 현찬의 반응속도가 아닌 바로 그의 움직임. A랭크 헌터에도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아마르였다. 실제로 B랭크의 헌터와 싸워서 이기기까지 했다.
나름 실력에 자부심이 있던 그였다. 그런데 현찬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다.
현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소리다.
아마르 알 하진은 눈을 빠르게 굴렸다.
‘무기를 휘두를까? 거리는 가깝다.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야.’
상대는 방심하고 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으면서 현찬은 그 어떠한 경계의 자세조차 취하지 않고 서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빈틈투성이였다. 아마르 알 하진은 거기서 혹시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있는 힘껏 무기를 휘두른다면, 치명적인 일격만 제대로 먹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생긴다.
‘어쭈?’
물론 현찬은 그런 아마르 알 하진의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야. 이 친구. 이 상황에서도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데?]
손오공은 지금 아마르 알 하진이 무슨 행동을 취할지 오히려 기대된다는 반응이었다. 현찬은 그런 손오공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딱히 궁예의 힘을 사용해서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의 행동이나 모습, 채취, 반응을 통해 그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예측할 뿐이다.
<손오공>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뛰어난 눈이 있었으니까.
<화안금정(火眼金睛)>
요술로 변한 요괴의 본질조차 꿰뚫어 보며 천 리 밖의 벌레의 모습조차 볼 수 있다는 손오공이 가진 능력이었다. 현찬의 검은 동공 안쪽에서는 금빛의 섬광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것은 조금 전부터 아마르 알 하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아마르 알 하진은 현찬의 빈틈을 노리며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휘둘렀다. 단단한 몬스터의 비늘을 수백 개를 이어 붙여 만든 이 채찍은 닿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갈가리 찢어버리거나 뜯어내는 매우 끔찍한 무기였다.
그 위력은 몸이 튼튼한 헌터라고 할지라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정도로 흉악하다.
‘됐다!’
아마르 알 하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거리가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되는 인물이면 채찍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상대방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채찍은 허공에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뱀처럼 몸을 뒤틀더니 그 날카로운 아가리를 현찬의 몸통에 때려 박았다.
쩌엉!
거대한 소리와 함께 현찬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아마르 알 하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공격이 먹히지 않았어!’
그의 혼신이 담긴 일격은 현찬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이는 <손오공>이 지닌 특성 중 하나인 동두철액(銅頭鐵額)의 힘이었다.
현찬은 아마르 알 하진의 공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헌터들 중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에 매길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격은 빠르고 매서웠으며 무엇보다 손속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직격당한 현찬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스텟창.’
이름 : 강현찬.
레벨 : 81
클래스 : 계약자
근력 : 1221(+2012)
체력 : 1482(+1520)
민첩 : 1543(+1720)
마력 : 1511(+1923)
스킬 : <계약(contract)>, <영령 빙의>, <헤르메스의 권능-계약>, <헤르메스의 눈>, <소환-헤르메스>
<차용> [탈라리아(Talaria)]
<차용> [페타소스(Petasus)]
<차용> [카두케오스(caduceus)]
현재 계약한 영령 : <손오공>
<차용>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차용> [황금쇄자갑]
<차용> [자금봉시관]
<차용> [보운리]
스킬 : <동두철액銅頭鐵額>, <화안금정火眼金睛>, <태산압정泰山壓頂>, <근두운>, <분신술>, <변신술>, <도술>, <봉술>, <정신법定身法>, <태산밀기>...
동해 용왕에게서 얻은 황금쇄자갑이라는 보물과 몸 자체가 철보다 더 단단한 손오공의 동두철액이라는 특징이 겹쳐지다 보니 어지간한 물리적인 공격에는 그야말로 면역에 가까울 정도로 피해가 없었다.
심지어 엄청나게 성장한 현찬의 스텟과 손오공과 계약으로 인해 추가로 늘어난 스텟 덕분에 현찬의 맷집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게 되었다.
현찬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황금쇄자갑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발악은 이제 끝이냐?”
“빌어먹을!”
아마르 알 하진은 결국 마지막 수단을 썼다. 그의 마지막 <노예 각인>이 새겨진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 부하는 그대로 자신의 몸에 부착된 폭탄을 터뜨린 것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아마르 알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가진 능력인 <노예 각인>의 효과 중 하나였다. 각인이 새겨진 노예는 주인인 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이 능력을 이용해서 수틀리게 된다면 노예를 자폭시켰다. 폭탄이 터지더라도 자신은 피해 보지 않게 되니까.
[이 자식이.]
현찬은 폭연을 손을 저어 흩어냈다. 손오공은 이를 갈았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손오공이지만 그에게 약점이 딱 2개가 있었으니 바로 불과 매연이었다.
그것은 그가 팔괘로(八卦爐)에서 정말로 죽을 뻔했을 때 생겼던 트라우마가 아직 남은 탓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물건인 폭탄은 그가 싫어하는 이 두 개를 동시에 유발하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터진다면 천하의 손오공이라도 놀라게 되는 것이다.
아마르 알 하진은 이미 자리를 떴다. 우거진 숲이라면 현찬의 눈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항상 그랬을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도망쳤겠지. 죄를 저지르고 사람을 죽이면서 그것에 좋아하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을 비웃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이쪽의 성질을 제대로 건드려줬으니 현찬은 진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와라. 근두운.”
현찬의 발 아래에 새하얀 구름이 생겨났다. 현찬은 그것의 위에 가볍게 올라탔다. 아주 부드러운 솜을 밟은 것 같은 푹신함이 보운리를 통해서 발바닥에 느껴졌다.
“가자.”
현찬의 신형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