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48화 (48/265)

# 48

48화 밀려오는 문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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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環頭大刀)를 손에 쥔 현찬은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냉정해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심연 속의 불꽃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테리 쿠아시는 그 눈빛을 보며 등골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젠장! 범상치 않은 놈이다.’

그는 현찬이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의 계약자인 걸 모른다. 단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받고 테러를 일으키는 것이 테리 쿠아시의 목적일 뿐이었다.

원래라면 한국은 상당히 치안이 좋은 곳이라서 그들이 활동하기 힘들었지만, 최근 수원 게이트 사태 이후로 빈틈이 상당히 많이 생겼다. 테리 쿠아시도 그 틈을 비집고서 몰래 입국했고 테러 활동을 벌였다.

어차피 한국에는 별것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달려온 테리 쿠아시의 입장에서는 오랜 평화에 찌든 한국의 헌터들은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약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테리 쿠아시는 자신이 현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고 폐공장에 나타났다. 이곳에 숨어있는 데스페라도 조직원들은 찾은 것은 둘째치고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그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6자루의 비도.

저것에 부하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가 지금 사지 멀쩡하게 서 있는 것도 결국 현찬이 그를 아직 공격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은 그렇다 쳐도 테리 쿠아시는 현찬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알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의도치 않은 자비를 받은 테리 쿠아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입을 열며 아랍어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뭣들 하느냐! 지금 녀석에 나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가 기회다! 모두 폭탄을 터뜨려! 우리들의 신들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쓰러진 자들에게 하는 소리가 아닌 그들과 계약을 맺은 아랍 출신의 <악령>들에게 외치는 소리. 테리 쿠아시의 외침에 바닥에 쓰러져서 피를 흘리던 부하들의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어?”

현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국어가 아닌 유창한 아랍어였다.

테리 쿠아시의 두 눈동자가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여졌다. 설마 현찬이 자신이 하는 말을 전부 다 알아들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부하들이 움직이기 전에 현찬의 비도가 먼저 빛을 내뿜었다. 6자루의 비도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져 나갔다. 허공에 그어지는 복잡한 거미줄 같은 섬광. 그리고 뒤이은 비명소리!

“아악!”

“크아악!”

현찬의 비도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데스페라도 조직원들의 힘줄을 끊었다.

[계약자가 바라기에 적당히 자비를 베풀었다.]

“고맙습니다. 연개소문 님.”

죽이지는 않는다.

저들이 다른 이들에게 준 고통은 고작 죽음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현찬의 단호한 의지를 읽어낸 테리 쿠아시는 자신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초승달처럼 검신이 휘어진 샴쉬르가 빛을 번뜩였다. 그는 비록 테러를 일삼지만 이렇게 보여도 B랭크 헌터. 쓰러진 녀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아무래도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인가 보군.]

“그거야 이쪽이 바라던 일이죠.”

가만히 항복해서 끌려가겠다고 했으면 이 타오르는 분노를 풀 방도가 없지 않은가. 현찬은 비도를 뒤로 물리고 손에 쥔 환두대도를 고쳐 쥐었다. 테리 쿠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현찬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현찬을 중심으로 바깥쪽을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검신에 반사해 현찬의 눈을 감게 만들었다.

순간 밝아진 빛에 현찬은 눈을 찌푸렸고 그곳에서 빈틈이 드러났다.

“지하드(성전)를 위하여!”

테리 쿠아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현찬의 목을 향해 샴쉬르를 휘둘렀지만.

그의 몸은 뒤로 튕겨 나가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퍼억!

“커헉!”

등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과 복부를 도려내듯이 찌르는 뜨거운 통각에 테리 쿠아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분명히 완벽했다.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고 빈틈을 만들었으며 그 틈새 사이로 독사의 이빨을 찔러 넣었으니까.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그 미래는 당연히 그의 예상대로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금 어떠한가.

당한 것은 바로 그였다.

‘반격, 반격해야…….’

테리 쿠아시는 힘줘서 벽에 박힌 몸을 빼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휘청였으며 결국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충격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샴쉬르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팔이 축 늘어지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런 테리 쿠아시에게 현찬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을 수확하러 오는 사신처럼 보였다. 번뜩이는 낫에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환상이 테리의 망막에 스쳐 지났다.

“허억. 허억. 주, 죽여라.”

“죽여?”

현찬은 테리 쿠아시의 말에 코웃음 쳤다. 대체 왜 현찬이 테러리스트가 바라는 대로 해줘야 한단 말인가.

“죽음으로서 내게 자비를 구하지 마.”

몸에 힘이 없어서 자결조차 못 하는 테리 쿠아시는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현찬을 올려다보았다. 현찬은 그런 테리 쿠아시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그는 결국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

현찬은 지금 협회 서울지부 안쪽에 있었다.

신고를 받고서 폐공장으로 국가 소속 헌터들이 출동하고 이번 테러 사건에 관해 상당한 정보를 알고 있는 유력한 용의자인 테리 쿠아시를 체포해 데려온 것이 조금 전이다. 테리 쿠아시는 지금 심문실 안쪽에서 몸이 결박당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말해라. 이번 사태의 사주가 대체 누구지? 너희들의 목적은 뭐냐?”

“…….”

테리 쿠아시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오히려 심문하는 사람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 녀석들은 엄청난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때린다고 해서 제대로 술술 불 녀석도 아니었기에 그 답답함은 더 컸다. 그것은 특수 유리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을 열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강현찬 헌터님이 모처럼 잡아 와준 중요한 증인인데.”

“황설영 헌터님이 죄송할 필요는 없죠. 누가 했더라도 저 녀석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정기원 실장의 <서희>의 힘으로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일차적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고 이차적으로 테리 쿠아시의 신앙심과 광기가 너무나도 강했다.

결국, 정기원 실장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아직 테리 쿠아시를 제외한 데스페라도의 조직원들이 국가 곳곳에 잠입해 있다는 거고 조만간 동시다발적인 거대한 테러를 일으킬 거라는 점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곳곳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붙잡히고 있었지만 전부 다 잡은 것은 아니었기에 시민들의 불안감은 나날이 증폭되어만 갔다.

“심각하네요. 시간은 촉박한데 상대방은 입을 열지 않으니.”

<서희>의 능력으로도 캐는 것이 한계가 있는데 저런 녀석이 고문한다고 과연 입을 열까?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황설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국민을 인질로 삼는 비겁한 테러리스트 녀석들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있는 테러리스트를 흠씬 두들겨 패서라도 불게 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다.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절망스러운 상황이 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마음이라도 편했으리라.

“저기요. 그러면 제가 한번 해 봐도 될까요?”

깊은 상념에 빠져든 황설영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현찬의 말이었다.

“네? 강현찬 헌터님이 말인가요?”

“네. 한번 해봐도 될까요?”

“하, 하지만…….”

설득에 있어서 거의 최고봉인 <서희>조차 실패했는데 현찬이라고 성공할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황설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믿기지 않으시겠죠.”

“아, 아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게 아닐까 해서…….”

얼굴을 붉히며 필사적으로 손을 젓는 황설영의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요? 어차피 이 이상 딱히 방도가 없는데 제가 나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혹시 알아요? 저와 계약하신 신님이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도움을 주실지?”

황설영은 그래도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찬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를 믿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황설영 헌터님?”

“네, 네? 아! 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없어서.”

황설영은 자신이 현찬을 너무 뚫어지게 바라봤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발갛게 상기된 볼을 손으로 만지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타일렀다.

‘정신 차려라. 황설영! 대체 뭐 하는 추태야!’

겨우 냉정함을 되찾은 황설영은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찬 헌터님께서 그렇게 바라신다면 하셔도 됩니다. 저 범죄자를 잡아 오신 분이시니 그럴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죠.”

일단 이 자리에서 나름 지위가 높은 황설영의 허가가 떨어졌기 때문에 현찬은 바로 문을 열고 심문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테리 쿠아시는 현찬을 알아보고는 눈을 부릅떴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수 교대입니다. 이 녀석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아랍어에 능한 심문자는 ‘나도 못 했는데 댁이 어떻게 할 거냐?’라는 시선을 던졌지만, 그도 이미 지친 상태라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딱히 현찬이 하나 안 하나 거기서 거기였기에 그로서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심문실에는 현찬과 테리 쿠아시 단둘이 남았다.

현찬은 그와 마주 보듯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들었어.”

“…….”

“뭐, 그렇게 계속 다물고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네 입을 여는 것이 아니니까.”

“……?”

테리 쿠아시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현찬은 씨익 웃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카두케오스(caduceus)] 지팡이를 꺼내 최면을 건다면 쉽게 정보를 얻겠지만 지금은 바깥에 보는 눈이 많다. 게다가 이 지팡이의 경우에는 헤르메스의 상징에 가까워서 현찬이 누구와 계약을 맺었는지 들킬 가능성도 있었다.

방법이 꼭 최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르메스. 내가 말했던 사람으로 부탁해.’

[어. 미리 준비해 뒀어. 근데 얘 진짜 사람 맞아? 좀 정신병 있는 거 같은데.]

‘원래 그러니까 그러려니 해.’

이번에 부르려는 영령은 왕급 영령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영웅급 영령들도 귀엽다고 봐주는 헤르메스가 이번만큼은 그 반응이 살짝 이상했다.

[진짜. 이 녀석, 대체 어떻게 되먹은 게 자의식이 어지간한 영웅보다 높은 거야?]

특히나 어지간한 영령들이라면 계약 못 해 환장하는 현찬과의 계약마저도 헤르메스가 직접 찾아가서 설득해야 겨우 넘어왔을 정도. 그만큼 헤르메스의 입장에서는 다루기 귀찮은 영령이었다.

계약이 완료됐음을 직감한 현찬은 자연스럽게 계약한 영령의 힘을 <차용> 했다.

“이름.”

“…….”

“테리 쿠아시. 나이는 38살. 아프간 반군 출신으로 용병 일을 했고 헌터로 각성. 지금까지 다양한 헌터들을 살해하며 명성과 힘을 키워왔군.”

“……!”

테리 쿠아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뭉그러뜨리며 이성을 되찾았다.

‘아니, 아닐 거야. 지금 것은 나를 조금만 조사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다. 저걸로 나를 떠보려고 해도 소용없어.’

하지만 현찬에게서 풍기는 묘한 힘은 그를 자꾸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지? 왜일까. 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도 마치 온몸이 발가벗겨진 느낌이 드는 걸까.

이것은 마치.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테리 쿠아시는 그제야 현찬이 조금 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의 왼쪽 눈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황금빛 안대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입은 계속 다물어도 돼.”

현찬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질문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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