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새로운 경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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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역시 나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 현찬아, 너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우리 아빠도 속여먹을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사기꾼 해도 잘 해 먹겠다.]
“칭찬이냐 욕이냐. 묘하게 기분 나쁘네.”
헤르메스의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넘기며 현찬이 고개를 젓는 순간 아테나가 빽 소리쳤다.
[인간! 감히 날 속인 것이냐!]
“속이다뇨. 저는 아테나 님을 속인 적 없습니다.”
그렇다. 현찬은 그 어떠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면 영민한 아테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묘하게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 계약 완료야.]
헤르메스의 힘으로 아테나와도 계약을 맺게 된 현찬.
파아앗!
아테나의 힘 일부가 현찬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신을 소환할 때마다 느끼던 감각. 하지만 아테나는 현찬이 지금까지 만난 신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헤르메스는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아쉬움이
아폴론은 가만히 있어도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충만감이
헤파이스토스는 그야말로 심장이 뜨거워질 정도의 열망과 열기가
그리고 아테나는 절대로 질 것 같지 않은 용기와 머리가 맑아지는 총기였다.
현찬의 두 눈에서 찬란한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신급 영령과의 계약을 통해 현찬은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 현찬의 머릿속으로 다양한 정보들이 들어왔다.
[전투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장기계약을 맺었습니다.]
[아테나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모든 스텟이 대폭 상승합니다.]
[전투에서 승리를 보는 눈이 활성화합니다.]
[신들이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매망량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괴물들이 당신을 적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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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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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그라지고 현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눈 앞에 펼쳐진 정보들의 향연에 일순 머리가 아파졌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조금 차분해지자 다시 눈을 떴다.
새롭게 얻은 능력인 <헤르메스의 눈>은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지나치게 방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담기 때문에 머리에 큰 무리가 갈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 능력을 얻자마자 어떻게 다루는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어 현찬은 멀쩡할 수 있었다.
[더 강해졌구나.]
“그러게. 네 덕분이야. 헤르메스.”
[내 덕분이지!]
아테나가 소리치자 현찬은 ‘네네, 알겠습니다’라고 대충 맞장구쳐 주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희대의 굴욕을 맛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계약은 마쳤고 그녀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계약을 주관하는 것이 바로 그녀와 동급인 헤르메스다. 헤르메스가 가진 계약의 힘이란 천하의 제우스조차 쉽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테나라고 해서 딱히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헤르메스. 이제 네 모습도 보이네.”
현찬은 영체로 존재하는 헤르메스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중성적인 목소리와 장난꾸러기인 성격을 가진 헤르메스답게 그는 미소년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잘생겼다.
똘망똘망한 눈과 오뚝한 코, 입가에 지어진 미소. 약간 웨이브 있는 갈색 머리카락과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과 다리. 머리를 조금만 더 기르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중성적인 미를 뽐내고 있었다.
남자라고 생각하면 남자로 보이고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여자로도 보이는 미소년.
키도 현찬보다 작아서 겨우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 어떻게 보면 말썽꾸러기 동생을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후훗. 어때. 멋지지? 늠름하지? 남자답지?]
“어, 음. 그래. 응. 그런거…… 같네.”
[계약자여. 왜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하는가. 딱 봐도 비리비리하고 약해 보인다고 말을 해야지!]
아테나가 옆에서 거들자 헤르메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비리비리하긴 뭘 그래! 이 근육녀가!]
[뭐라! 이보다 더 균형 잡힌 몸매가 어디 있다고 그러는데! 너야말로 아버지나 삼촌들 그리고 다른 신들과 비교하면 아주 삐쩍 마르지 않았느냐!]
“어휴.”
둘이 또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현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조금 전부터 틈이 날 때마다 서로를 물어뜯었다. 확실히 올곧은 아테나와 장난꾸러기 헤르메스는 서로 성격이 상극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둘이 확실히 제우스의 피를 이은 남매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남매라면 무릇 이렇게 서로 싸워야지. 이게 참남매지. 현찬은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그만 싸우고, 헤르메스. 나 이제 너 <소환> 할 수 있는 거 같아.”
[뭐? 벌써?]
<차용>과 <빙의>의 다음 단계인 <소환>.
이는 어지간한 헌터들조차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영령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체로 존재하는 그들을 이 현실로 직접 부를 수 있으니까.
물론 그 육체는 시전자인 헌터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영령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낼 수는 없지만, 헤르메스에게는 그 일부의 힘으로도 어지간한 자들은 다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단계를 현찬은 벌써 도달한 것이다.
이는 헤르메스의 도움이 아닌 현찬 스스로의 재능과 이해, 노력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결과물이었다.
“시작한다.”
<소환-헤르메스>
현찬의 마력이 쭈욱 빠져나간다. 현찬은 지금까지 다양한 영령들과 계약을 맺어오며 스텟을 증진했고 특히나 조금 전 아테나의 덕분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런데도 현찬은 헤르메스를 소환하는데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냥 영령도 아니고 무려 신을 소환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찬의 마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모자란 부분이 있는 법.
현찬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남은 마력을 전부 다 쥐어짰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마력을 최대한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하며 쓸모없는 낭비를 줄인다.
현찬이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현찬의 마력이 영체의 헤르메스에게 모이며 그의 육신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오, 오오!”
현실로 <소환>된 헤르메스는 자신의 손을 보더니 이내 자신의 몸 곳곳을 손으로 만져댔다. 감촉이 전부 다 느껴진다. 헤르메스는 즉시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원래라면 비춰 보이지 않을 모습이 거울 안에 멀쩡하게 보였다.
“정말로 해냈어!”
“후욱. 후욱. 어이구 죽겠다. 마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네.”
현찬은 투덜거리면서 침대에 엉덩이를 깔고 앉고는 [테레이오스테(Teleióste)]를 쥐며 숨을 골랐다. 신급 무기인 데다가 특성에 마력회복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현찬의 바닥났던 마력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영웅급 영령과 계약을 맺어도 부족하지 않은 마력인데. 역시 신급은 다르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한번 소환하면 앞으로는 계속 유지가 가능하니까.”
<소환>도 처음에는 힘들지 그다음부터는 쉽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높은 셈.
“그러면 다행이지.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로 마력 소모했다가는 내가 제명에 못 산다.”
“걱정 마. 죽으면 내가 바로 명계로 내려가서 너 끄집어낼 거니까. 누가 뭐래도 넌 내 거야.”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마라.”
조금 집착이 느껴지는 대사에 살짝 등골이 싸늘해졌다. 어떻게 보면 참 예쁘장한 소녀처럼 보이는 헤르메스가 저런 대사를 내뱉으니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정신 차려! 강현찬! 남자에게 대체 뭐 하는 짓인데!’
현찬은 왼손으로 자신의 뺨을 치며 자신의 성 정체성이 확고함을 재차 확인했다.
그보다 헤르메스가 있던 시절의 그리스에는 저런 미소년들이 많았단 말인가. 현찬은 왜 그리스 신화에 그렇게나 동성애자가 많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라클레스도 사랑했던 소년이 있지 않았던가.
‘음. 좀 무섭군.’
신들 사이에서도 동성애가 있었을 정도니 참으로 무서운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보다 헤르메스. 너 진짜 남자 맞아?”
헤르메스는 어떻게 보면 남자고 어떻게 보면 여자라서 성의 구분이 모호했다. 특히나 허리와 골반이 도저히 남자 라인이 아니었다. 머리도 너무 길이가 어중간하다 보니 좀 그렇기도 하고.
그런데 여자들을 상대로 야생의 살쾡이처럼 날카롭게 구는 행동을 보면 너무 수상쩍었다.
“뭐?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건데? 당연히 나는 남자야.”
[풉. 과연 그럴까.]
이 상황에 끼어든 건 영체 상태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테나였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그녀의 반응에 헤르메스가 눈썹을 모으며 아테나를 노려보았다.
“너!”
[계약자여. 알고 있나? 저 녀석과 아프로디테 사이에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아테나!”
헤르메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지만, 아테나는 멈추지 않았다.
[알고 있는가?]
“어, 음. 들어본 적 없는데.”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아테나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 이야기의 전말을 말하자면 헤르메스는 사실 아프로디테에게 억지로 당한 것이다.]
“뭐?”
“아테나!”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낳은 자식.
하지만 이게 아들도 딸도 아닌 바로 양성이었다는 점이 참으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둘의 사이에서 태어난 게 사실은 아프로디테가 헤르메스를 덮친 거였다니!
“현찬아. 들어봐. 여기에는 아주 깊은 사연이…….”
“예쁘냐?”
“어?”
“예쁘냐?”
“예쁘냐니?”
“예뻤냐고. 아프로디테.”
“어, 음. 당연히 예쁘지. 미의 여신인데.”
헤파이스토스의 [황금인형]조차도 아프로디테의 외모를 본떠 만들었음에도 그녀의 미모에 미치지 못했다고 할 정도다. 아프로디테의 외모는 그렇다면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인가.
헤르메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현찬은 분노를 터뜨렸다.
“너는 그렇게 예쁜 여자랑 잤으면서…… 나한테는…… 이 비겁한 놈!”
이런 배신자를 보았나!
현찬의 분노는 그야말로 모든 솔로의 분노. 그것은 헤파이스토스가 다루는 화산처럼 뜨겁고 강렬했다.
“아니, 나도 당한 거라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자들을 피하라고 한 거지! 같은 남자로서!”
“닥쳐라, 배신자! 너, 너는 그렇게 예쁜 여신이랑 놀아났으면서…… 정작 나에게는!”
현찬은 분통을 터뜨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떨궜다.
헤르메스가 왜 여자를 상대로 그렇게 학을 떼는지 알게 된 것도 있고 여기서 화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좋았냐?”
“어?”
“좋았냐고.”
“아니, 그게.”
“솔직하게 말해라.”
“…….”
헤르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솔로 부대의 저주나 받아라.”
뚱한 표정으로 헤르메스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는 현찬과 어쩔 줄 모르며 당황스러워하는 헤르메스의 모습을 보며 아테나는 속으로 계획대로라며 작게 웃었다.
헤르메스 성격상 현찬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많이 경계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에게 빨리듯이 당했으니 헤르메스가 여자에게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나를 크게 골탕 먹였겠다!’
결국,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헤르메스를 향한 아테나의 소소한 복수였다. 그리고 그것은 크게 성공했다. 곤란한 헤르메스의 얼굴을 보니 방금까지 쌓였던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풀렸으니까.
그렇게 자그마한 해프닝이 끝나고 현찬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 협회에 들러야겠네.”
황설영 헌터에게 직접 온 문자.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아마 3일 전에 있었던 일들에 관해 묻고자 하는 거겠지. 저쪽에서 현찬에게 3일이나 준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배려를 받은 것과 같기에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나도 같이 갈까?”
“아니,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너는 모처럼 얻은 육체에 적응하고 있어.”
게다가 헤르메스까지 같이 대동하면 훨씬 더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현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헤르메스가 나타나면 대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나 정체를 캐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찬은 이왕 실체를 갖게 해 줬으니 집에서 TV도 보고 인터넷도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헤르메스가 원하던 것이기도 하고 현찬에게는 이제 아테나가 있으니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처가 가능했다.
“밥은 시켜 먹어. 돈은 두고 갈게.”
“응.”
헤르메스는 육체를 가지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식도락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현찬이 나가고 원룸에 혼자 남은 헤르메스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킨. 현찬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먹었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닭을 기름에 튀겨서 양념을 발라 만들었다는 요리. 상당히 맛있어 보였기에 바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헤르메스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