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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42화 (42/265)

# 42

42화 람브로눅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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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소식을 받은 협회의 헌터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도깨비 <두두리>의 계약자인 황설영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녀는 현찬에게 다가와 물었다.

“강현찬 헌터 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이 녀석이 저를 습격한 녀석 중 하나입니다.”

“다른 자들은…….”

황설영은 주변에 널린 시체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상황은 대충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것 같군요.”

황설영은 현찬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를 챘다.

“이쪽은 일단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현찬은 황설영에게 가볍게 인사하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현찬의 뒷모습을 보며 협회의 후임 헌터 중 하나가 황설영에게 물었다.

“저대로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이번 사태에 관해 확인하려면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은데.”

‘게다가’하고 후임은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바닥에 쓰러진 채 타버린 시체 9구와 끔찍한 몰골로 변한 보르프스키를 보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헌터로서의 각성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영령과의 계약 덕분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거지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특히나 각성 전까지 자신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그것은 더욱 크다.

“됐다. 보내도 돼. 오히려 지금 붙잡았다가는 우리에 대한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야.”

황설영은 현찬이 어떤 상태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을 헤아렸던 황설영은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지도 않고 현찬을 보내주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가장 심란한 것은 현찬일 테니까.

한편 황설영의 배려로 자리에서 벗어난 현찬은 탈라리아를 펼쳤다.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은 차가울 정도로 냉정했고 꼬박 하루 동안 헤파이스토스의 <빙의>한 리바운드가 뒤늦게 몰려와 육체가 비명을 지르며 휴식을 원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현찬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원룸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지듯이 쓰러져 잠에 빠져든 것이 그가 마지막에 한 행동이었으니까.

&

[일어났어?]

“어.”

현찬은 무려 3일 동안 푹 잔 덕분인지 눈을 떴을 때는 상당히 개운한 느낌이었다. 현찬은 몸을 일으켰다. 나름 심란했던 기분도 자고 나니까 잔잔해졌다. 괜히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헤르메스가 물었다.

[어때. 이제 괜찮아?]

“어. 푹 쉬니까 괜찮아졌어. 생각도 정리됐고.”

물론 아직 헤파이스토스와의 계약을 통한 리바운드의 여파가 몸에 남아 있어서 신체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이미 인간을 초월한 회복력을 지닌 현찬에게 있어서 얼마 안 가서 금방 사라질 통증들이었다.

오히려 일주일은 갈 거라고 예상했던 리바운드가 3일만 가서 다행일 정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네.]

헤르메스도 현찬을 많이 걱정했었기에 현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삶에 있어서 첫 살인, 그것이 절대로 가볍지 않음을 헤르메스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로 생각했어.”

대통합 이후로 세상은 변했다. 게이트가 생겨나고 그곳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들을 죽이는 헌터들이 등장하고 그런 헌터들을 지원해주는 영령도 나타났다.

세상은 변했다.

너무나도 많이.

예전의 21세기와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이 그때보다 더 많이 죽어 나가는 혼란스러운 시대다.

<문>을 통해 이어진 다른 세상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이종족들.

대통합 이후로 영령들과 함께 나타난 악령들과 괴물들.

수많은 헌터들과 사람들을 죽인 몬스터들을 신성하게 여기는 괴이한 종교단체의 등장.

타국의 유망주 헌터를 납치하거나 암살하려는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

물론 대통합 초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양반이다. 처음 대통합이 일어났을 때는 세상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아직 지구 곳곳에서는 몬스터에 의해 희생자들이 나오거나 혹은 악령과 계약한 각성자들이 테러 활동을 벌인다.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헌터가 된다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를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인류를 위협하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도 있었으니까.

영령들의 계약자들을 증오하는 악령들은 이 세상을 좀먹는 암세포였고 또한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들의 계약자는 인류의 적이었다.

“유명한 헌터가 되면 그저 승승장구하는 일만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그렇게나 만만한 곳이 아닌가 봐.”

오히려 유명해졌기 때문에 더 많은 적들이 현찬을 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까지 온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반대로 없던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고 현찬은 멈춰 서지 않는다. 오히려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밟으며 치워버리면 그만이니까.

헤파이스토스와의 계약을 통해 현찬은 한차례 더욱 성장했다.

“그보다.”

현찬은 침대에 고이 둔 검을 보았다.

아름다운 황금 무늬가 새겨진 새까만 도신을 지닌 검. 보기만 해도 시선이 빨려들 것만 같은 신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검 [테레이오스테(Teleióste)]를 보며 현찬은 문득 떠오르는 것 하나가 있었다.

[테레이오스테(Teleióste)] 자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이 총 2개.

하나는 <불카누스(Vulcanus)>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황금인형 소환>이었다.

[황금인형]이라고 하니 헤파이스토스의 곁에서 그를 보좌해주던 다섯 명의 미녀가 떠올랐다. 각자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던 금발의 여인들.

비유적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신이 만든 조각상이 아니던가.

‘해볼까?’

딱히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현찬은 소환하기로 했다.

“소환. [황금인형]”

[테레이오스테(Teleióste)]를 손에 쥐고서 마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느낌을 그대로 형상화하며 직접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현찬의 앞에서 화려한 금빛의 가루들이 휘날리며 한 자리에 뭉치더니, 이내 한 명의 소녀로 모습을 바꾸었다.

백색의 원단에 황금색 실로 짜인 그리스 시대의 의복인 도릭 키톤(Doric Chiton)을 입고 있는 몸은 현찬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자그맣다.

목 아래에서 가볍게 찰랑거리는 금빛 단발 그리고 그와 같은 색상의 호박 석처럼 영롱한 눈동자는 현찬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능하신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만든 황금인형 시리즈의 여섯째이자 막내인 에크티(Ekti)라고 합니다.”

“어. 그래. 만나서 반가워.”

마치 아름다운 리라 연주를 듣는 것 같은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정심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에크티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전능하신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인정하신 저의 주인님입니까?”

“주인님?”

21세기에서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단어를 들은 현찬은 순간 당황했지만,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그녀는 인형이었고 자신은 그녀의 소유주가 맞았으니 주인이라고 해도 좋았다.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크티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맞아.”

“황금인형의 막내 에크티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에크티는 우아하게 자신의 옷자락 끝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잡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예쁘다 보니까 그런 가벼운 행동 하나하나도 그림이 되었다.

‘와. 진짜 예쁘긴 예쁘네.’

무려 대장장이의 신이 자신의 혼신을 다해 만든 지고의 작품이다. 미적 기준에서 인간이 보아도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숙이던 고개를 든 에크티는 현찬을 보며 물었다.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너는 뭘 할 수 있는데?”

그놈의 주인님이라는 소리는 들을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주인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전능하신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전투에도 조예가 있으며 가사와 요리 외에 각종 잡무도 가능합니다. 원하신다면 밤 시중을 들 수도 있습니다.”

“어?!”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기쁜 얼굴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야. 표정 봐라 표정. 좋아죽네. 응? 좋아 죽어.]

“크흠. 흠. 아니, 그게 아니고.”

“혹시나 하는 임신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이 원하시지 않는 이상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없으며 제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것이 설사 저의 죽음이라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

꿀꺽.

현찬은 대답하지 않고 침을 크게 삼켰다.

[야!]

“아오. 깜짝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헤르메스의 발작과도 같은 외침에 현찬은 속으로 ‘얘 때문에 나는 평생 솔로로 늙어 죽을지 몰라.’라고 투덜대며 에크티에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음. 됐으니까. 아무튼, 밤 시중이고 뭐고 필요 없…… 음. 어.”

[대답 똑바로 안 해?]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리고 주인님이라는 말은 좀 오그라드니까 하지 말아줄래?”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내 이름으로 불러줘.”

“알겠습니다. 현찬 님.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오직 당신만의 것. 제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니까요.”

“음. 크흠. 그래. 알았어.”

눈에 확 띄는 미인이 자신의 것이라고 면전에서 말하니 현찬의 심장이 그야말로 8기통 엔진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이미 우울했던 기분은 다 날아 가버리고 없었다. 에크티가 다시 황금빛으로 사라지며 검으로 들어갔고 현찬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헤파이스토스 님. 감사. 감사합니다!’

현찬은 앞으로 산타할아버지 대신 헤파이스토스를 믿으라고 아이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설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휴.]

헤르메스만이 그런 현찬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부터 현찬이 일어나기까지 혹시나 자신의 계약자가 어딘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걱정을 하며 노심초사한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현찬아. 일단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진지한 말이야.]

“뭔데?”

평소에는 능글맞거나 장난기가 넘치는 헤르메스인데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일반적인 것은 아니리라. 현찬은 헤르메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을 믿지?]

헤르메스가 꺼낸 말은 조금 엉뚱한 소리였다. 신? 신을 믿느냐고?

“당연히 믿지.”

그 신 중 하나가 자신과 계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는가. 영령도 있고 괴물들도 있는데 이제 신이라고 없을까. 대통합 이후로 인류의 상식은 이미 뒤틀린 지 오래다. 괴물들도 재앙의 화신이라며 섬기는 사이코들이 있을 정도로.

[그거 알아. 너와 내가 계약을 한 이후로 이 땅에만 신이 2번 강림했어. 아폴론 형은 <문>때라 괜찮지만 나와 헤파이스토스 형은 다르니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신 정도 되는 자가 지상에 자신의 힘을 드러냈어. 현찬아. 너라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뽐내지 못하는 답답한 세계에 있다가 일부나마 지상에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그야 당연히…….”

현찬은 뒷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며 맞장구쳐 주었다.

[이 자그마한 땅에서 신은 존재해. 그런 신들 그리고 예로부터 존재해온 이 땅의 이매망량과 각종 신령과 요괴들이 모두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어.]

어디 한반도뿐일까.

가까운 나라인 중국의 신들과 일본의 토착 신들까지 현찬의 존재를 인지했다.

현찬은 의아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신급 영령들이 좋다고 계약을 해주겠다는 건데.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생각해봐. 신들 중 대부분은 너희들의 속된 말로 하면 인성이 아주 바닥을 기어. 그런 애들이 너를 배려해서 너에게 힘을 주려고 할까? 어떻게든 너의 몸을 차지하려고 하거나 강제로 너와 계약을 맺으려 들 수도 있어.]

그리고 그게 고작 신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면?

세 자릿수가 넘는 신들이 동시에 현찬에게 힘을 부여한다면?

오싹!

현찬은 등골이 사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급 영령을 <빙의>한 리바운드만 해도 엄청난데 그것의 수백 배가 몰려온다면?

현찬의 머릿속으로 바람이 가득 차서 펑! 터지는 풍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혹시나 다른 신들이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마.]

“…… 내가 애냐.”

[신들의 사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감히 쉽게 넘기지 못할 정도로 감미롭다는 것을 잊지 마. 신들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설마 벌써!]

헤르메스가 무언가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현찬은 자신의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 그것은 일찍이 용기와 지혜를 선사해주었던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한 신의 선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현찬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헤르메스가 이를 갈며 외쳤다.

[넌 또 왜 나타나는데! 아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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