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빅 웨이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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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새 부리 가면을 쓴 자는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현찬이 보스 몬스터와 싸우는 광경을 관전했다.
강렬한 바람이 그의 검은 로브를 크게 휘저으며 마치 옥상에서 밀어낼 것 같은 위태한 모습을 연출했지만, 그의 두 다리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단하군.’
새 가면이 현찬을 보고 내린 첫 감상.
공들였던 계획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새 가면은 현찬이 보여주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좁은 나라에 저 정도의 인물이 있었다니.’
지난 번 강남에서 벌인 폭주의 사태는 협회의 빠른 대처로 인해 별다른 피해를 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름 공을 들여서 게이트 폭주를 일으켰다. 애초에 강남은 일종의 눈속임이고 진짜 목적이 바로 수원이었으니까.
한 달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장 위험한 녀석들이 서식하고 있는 차원과 연결을 감행했다.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에 새 가면이 바라던 계획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고 그는 크게 만족했다.
저 멀리서 성벽이 솟아오르기 전까지.
다수의 사망자와 함께 막대한 피해를 만들어야 했던 몬스터들은 갑자기 등장한 성벽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죽어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멀리서부터 뛰어온 한 사람. 현찬이 등장하며 보스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콰과광!
귀를 찢는 충격이 퍼져나가고 건물의 귀퉁이가 부서지며 먼지구름이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그 내부에서도 계속 폭음이 연달아 울리면서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암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찢겨 나갈 정도의 충격. 그 만큼 현찬과 보스몬스터 둘의 대결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막상막하라거나 혹은 현찬이 밀린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시종일관 현찬이 녀석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휘둘러지는 거대한 다리를 몽둥이로 흘려내고는 왼 주먹을 쥐어 내지른다. 퍼억! 검은 진흙을 때리는 기묘한 느낌이 손을 간질였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힘을 주며 밀어낸다. 그러자 녀석의 다리가 부러지며 끔찍한 소리를 내뱉었다.
우워어어어어!
보스 몬스터가 입을 벌리며 거대한 진흙을 토해냈다. 현찬이 뒤로 물러서자 진흙은 아스팔트와 인도를 녹였다. 녀석은 현찬을 쫓으며 고개를 돌려 계속 진흙을 토해냈다.
현찬은 이대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힘들다는 걸 깨닫고 몽둥이를 허리춤에 맨 후 등에 지고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활임에도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활을 어떻게 쏘아야 하는지의 의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었으니까.
헤라클레스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경험은, 현찬의 몸을 통해서 현실로 구체화 된다.
현찬은 화살 통에서 빠르게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고서 바로 쏘았다.
피슝!
화살을 쏘았을 뿐인데도 그 위력이 자못 대단해서 마치 총을 쏜 것만 같았다.
일직선으로 쭉 뻗어져 나간 섬광은 그대로 보스 몬스터의 눈 하나를 뚫고 들어갔다.
놈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더욱 흉포하게 변해 그 분노와 증오를 현찬에게 쏘아냈다.
하지만 녀석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사용하는 활이 무엇인지.
쿠어? 우워어어어어!
‘됐다.’
현찬을 향해 재차 산성 액을 쏘아내려고 한 녀석은 갑자기 터져버린 눈으로부터 퍼져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머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향감각이 상실되고 뜨거운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점점 번져간다.
괴물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히드라의 독]
헤라클레스의 화살촉에 발라져 있는 독의 정체다.
12개의 시련 중 하나인 히드라는 그 피 자체가 끔찍한 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독이 얼마나 강하냐면 신들조차 히드라의 독을 두려워했을 정도다.
한 전승에서는 성벽에 히드라의 독이 발린 화살을 쏘았을 뿐인데 독이 퍼지면서 성벽 위의 병사들이 전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헤라클레스의 스승인 불사신 케이론 또한 이 독 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불멸을 포기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 정도로 끔찍한 독이 발라진 화살이다. 그것을 제대로 맞았으니 보스 몬스터가 맥을 못 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크어어어!
독이 점점 퍼지며 다리까지 영향을 주는지 녀석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옆으로 기울어졌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나머지 현찬이 아닌 이상한 곳에 검은 산성 액을 마구 흩뿌리고 있었다.
현찬은 다시 몽둥이를 쥐었다.
녀석이 맥을 못 추고 당황하는 이 타이밍이야말로 가장 공격하게 적합한 순간이었다.
뿌득!
몽둥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손아귀와 몽둥이의 손잡이 부분이 맞물렸다. 현찬은 자신의 힘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양만춘>과 계약을 한 상태로 계속 <안시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헤라클레스>와 이중 계약까지 했으니 그 한계가 점점 다가온 것이다.
‘이 한방으로 모든 걸 끝낸다!’
현찬은 두 손으로 쥔 몽둥이를 있는 힘껏 보스 몬스터의 머리에 휘둘렀다.
콰앙!
헤라클레스의 몽둥이와 괴물의 머리가 서로 부딪치자 주변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충격파만으로도 주변 건물 외벽의 유리들이 모조리 부서졌고 보스 몬스터의 머리는 그대로 산산히 조각나 바닥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가 웅덩이처럼 번졌고 독에 괴로워하며 발악하던 몸통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잠잠해졌다.
무리를 이끌던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때마침 안시성의 성벽을 넘으려던 다른 개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아무튼, 기회다! 지금 바로 몰아붙여!”
명령을 내려주는 개체의 부재로 인해 혼란에 빠진 몬스터들은 그대로 성벽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 헌터들에 의해서 하나둘 정리당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하늘이 자신들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몬스터들을 죽였지만 몇몇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현찬이 무언가를 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빠가 해냈어.’
다은은 현찬이 있을 거로 예상하는 수원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치열하게 유지되었던 싸움은 결국 보스 몬스터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분열된 몬스터들을 헌터들이 전부 다 정리함으로써 끝났다.
“으아아!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죽을 줄 알았는데, 싸워서 이겼다! 와아아아악!”
“강현찬 헌터 만세! 신급 영령 만세!”
“강현찬! 강현찬!”
싸움에서 승리한 헌터들은 현찬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고 그것은 군인들이나 헬기에서 상황을 중계하고 있던 기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월드컵 우승을 방불케 하는 광경.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이번 싸움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어? 근데 강현찬 헌터는 어디 갔지?”
“나는 모르겠는데. 너는?”
“나도 모르지. 아까 성벽 밖으로 나간 건 봤는데 아직 안 온 건가?”
모두가 현찬을 찾고 있을 때 현찬 본인은 보스 몬스터를 막 쓰러뜨리고서 게이트의 핵까지 파괴한 후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어후. 죽겠다.”
[이런. 이런 거로 지쳐야 하겠나. 뭐, 그래도 계약자도 고생한 것 같으니 넘어가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으니 다음번에는 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지?]
“노력하죠.”
현찬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싸움은 끝났지만, 그것이 남긴 열기는 아직도 저 하늘에 높게 떠오른 태양처럼 현찬의 몸을 계속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더 많은 싸움을. 더 치열한 투쟁을. 헤라클레스와 계약을 맺은 영향인지 현찬은 지금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투기를 억누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현찬은 조금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잘 사용하던 검이 부러진 것이다.
현찬이 사용하던 검은 막 헌터 자격증을 받았을 때 국가에서 지원해준 B랭크 클래스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본적인 무기였다. 이것으로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를 씌워서 사용했는데 조금 전 보스 몬스터에게 마지막 일격을 먹이다가 부러진 것이다.
지금까지 용케 부러지지 않고 견딘 검이 대단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이다.
“…… 시선?”
그 순간 감각에 걸리는 누군가의 시선. 이 도시에는 지금 사람이 현찬을 제외하고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야 했다. 그의 뒤를 따라온 자는 없었으니까. 현찬이 고개를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이런. 들켰나.’
새 부리 가면은 설마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자신을 찾아낼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 겉으로 보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지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사라졌다?’
바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저 아래에 있던 현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현찬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으니 멀리 움직이지 못했을 터. 위치를 파악하면 빠르게 피해서 도망을 칠 생각이었다.
“넌 대체 누구냐?”
“……!”
목 뒤를 싸늘하게 간질이는 나직한 목소리.
새 부리 가면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몸을 앞으로 던지면서도 바로 자신의 뒤에 있을 현찬을 향해 암기를 집어 던졌으니까.
하지만 현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손가락만 가볍게 움직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침들을 모조리 잡아냈다. 치이익! 장침을 붙잡은 현찬의 손바닥에 묘한 소리가 나면서 조금씩 타들어 갔다. 피부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주는 맹독이었다.
현찬, 아니 현찬의 몸 안에 있는 헤라클레스가 그런 새 가면을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 독으로 내게 영향을 주려고 한 거냐?]
헤라클레스를 죽이려면
[신조차 죽이는 맹독을 가져와야지!]
현찬이 허공에 뜬 새 부리 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현찬의 몸이 마치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나며 앞으로 뻗어져 나갔고 순식간에 새 부리 가면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현찬이 손을 뻗었다. 그대로 저 로브를 벗겨 정체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새 가면은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몸을 뒤틀며 현찬의 손아귀를 피해냈다. 그 움직임은 도저히 발판이 없는 허공에서 펼칠 움직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
“음?”
상대방의 그런 움직임에 현찬은 아주 순간 방심하고 말았고 녀석은 그대로 허공을 발판삼아 더욱 현찬과 거리를 벌렸다.
“어딜 감히!”
현찬은 건물의 벽을 밟고서 추진력 삼아 재차 새 가면을 쫓았다. 녀석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현찬을 잠시 바라보더니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까마귀의 날개처럼 활짝 펼쳤다. 그러자 로브의 틈새에서 검은 무언가가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더니 현찬의 주위에서 폭발했다.
퍼버버벙!
그것은 검은 연막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현찬의 시야를 집어삼키며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했다. 현찬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헤라클레스의 엄청난 근력이라면 고작 손을 젓는 것 만으로도 주위에 자그마한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조잡한 연막 따위, 종이처럼 가볍게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검은 연기는 마치 끈적거리는 아교처럼 현찬의 몸 주위에 달라붙었다. 손을 휘저어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뭉친다.
“이건?”
[독특한 마법적 처리가 된 물건이로군. 시야를 가리는 것 말고도 연기 자체에 수면 효과가 있고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어.]
현찬은 결국 더는 새 가면을 쫓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찬이 지면에 착지하고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현찬의 주위를 맴돌던 검은 연기는 서서히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계약자여. 이번에도 즐거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났으면 좋겠어.]
“네. 수고하셨어요.”
계약의 시간이 끝나자 헤라클레스가 떠나갔다.
“방금 그 사람은 대체 뭐였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상당히 수상쩍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조금 흥미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나름 큰 사고가 없는 지루한 하계라고 생각을 했지만, 저런 수상하기 그지없는 녀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헤르메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으니까.
[현찬아. 그보다 몸은 안 아파?]
“아.”
현찬은 이 상황에 대해 데자뷰가 느껴졌다.
영웅급 영령과의 이중 계약. 이것이 주는 리바운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현찬의 전신에 엄습해왔다.
“끄아악!”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한 현찬은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