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화 빅 웨이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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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영웅급 영령은 힘을 <차용>할 때 주로 자신이 생전 사용하던 무구나 갑옷을 사용할 수 있다.
영웅급 영령이 사용하는 무구는 보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기에 특히나 영웅급 영령이 헌터들의 사이에서도 주목받는 이유였다.
영웅들이 사용하던 무구를 빌려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전투력은 엄청나게 올라가니까.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이 넘치는 헌터들에게는 가장 꿈에 그리는 것들이리라.
아서 왕의 엑스칼리버(Excalibur)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이와 같은 것들은 영령들이 사용하는 무구의 대표적인 예시였다.
하지만 영웅급 영령 중에서도 몇몇 독특한 영령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무구나 방어구를 불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불러내는 것은 자신이 이룩했던 위대한 일.
자신이 달성했던 <업적> 그 자체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물론 불러내는데 드는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많다. 하지만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위력은 어지간한 영웅들이 사용하는 무구들 그 이상의 효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안시성(安市城)>
당나라의 군세를 막아냈던 안시성주 양만춘만이 불러낼 수 있는 최고의 요새.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하게 방어전을 펼쳤던 그 성이, 약 1500년의 세월이 흘러 현대에 다시 그 웅장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력을 머금은 성의 높이만 10여 미터에 달하고 둘레는 수 킬로미터가 넘는다. 덩치가 5M가 넘는 진흙의 괴물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성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 헌터들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하늘 높이 솟아오른 성을 보았다.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와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당연히 1세대 헌터라고 불리던 강덕수였다. 누구보다도 노련한 그는 주변에서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헌터들을 고함을 치며 닦달했다.
“야 이 멍청한 놈들아! 뭘 가만히들 있냐! 이렇게 방어선이 생겼으면 당연히 끼고 싸워야지! 퍼뜩 저 위로 안 올라가?!”
“네, 넷!”
“알겠습니다!”
강덕수의 고함에 주위의 헌터들이 헐레벌떡 안시성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벽의 위로 올라온 헌터들은 저 멀리까지 보이는 풍경에 감탄했다. 높다고 생각은 했지만 올라오니 확실히 장난이 아니었다.
성벽의 위에는 높이만 3M나 되는 거대한 북이 있었다. 현찬은 그것을 울렸다.
두웅!
둔탁하고 투박한 소리가 성벽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 기묘한 힘의 파동이 퍼져나가자 헌터들은 자신의 몸속에서 차오르는 힘에 이상하게 생각했다.
[성주의 북을 들었습니다. 용기가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모든 스텟이 3% 증가합니다.]
“헐.”
“미친?”
성벽으로 올라온 모든 헌터들은 자신의 스텟이 증가한 것을 보고 감탄했다. 단지 북 소리를 들었음에도 스텟이 오르고 지금 당장이라도 저 괴물들과 싸우고 싶은 호승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찬은 고작 한 번만 울릴 생각이 없었다.
둥! 둥! 둥!
세 번 더 울리는 북소리.
[성주의 북을 들었습니다. 모든 스텟이 5% 증가합니다.]
[성주의 북을 들었습니다. 모든 스텟이 7% 증가합니다.]
[성주의 북을 들었습니다. 모든 스텟이 9% 증가합니다.]
[용기가 상승합니다.]
[호승심이 증가합니다.]
[상태이상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함께 힘을 실어 넣어주는 거대한 북소리에 헌터들의 용기는 하늘을 찔렀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두려워해서 벌벌 떨던 겁쟁이들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당나라의 대군을 보고도 필사적으로 싸우던 고구려의 훌륭한 무인들뿐이었다.
“와라! 이 괴물들아!”
“백 마리든 천 마리든 얼마든지 몰려와 보라고!”
용기를 얻은 헌터들은 성벽 아래로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몬스터들도 성벽이 가까워지자 다가오는 속도를 올렸다. 덩치가 5M가 넘는 거구의 몬스터들 수백 마리가 동시에 달려드는 광경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이 오금이 저렸지만, 누구도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공격해라!”
“가장 먼저 올라오는 녀석들부터 노려!”
“여기는 반드시 지켜낸다!”
성벽을 필사적으로 오르려는 몬스터들과, 그런 몬스터들을 상대로 마법과 가진 스킬을 모두 쏟아붓는 헌터들. 그리고 후방에서 화력을 지원해주는 군대까지.
대통합 이후, 헌터의 시대가 열린 후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성전이 벌어졌다.
&
[YNT뉴스 속보입니다. 현재 수원시를 차지한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무리를 지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헌터들이 그런 몬스터들을 저지하며 막고 있는데요. 현장에 나가 있는 김두종 기자와 연결하겠습니다. 김두종 기자?]
[예. 여기는 현장에 나와 있는 김두종 기자입니다. 현재 헬기 위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습니다.]
[현재 어떤 상황이죠?]
[수원시 내부를 차지하고 있던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갑자기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이 떼로 몰려들어 피난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김두종 기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카메라가 그곳을 집중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성벽을 끼고서 몬스터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괴물들은 덩치가 크고 그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카메라의 화면의 7할을 채웠다. 어떻게 보면 몬스터들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은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갑자기 거대한 벽이 세워지더니 이내 견고한 성으로 변했습니다. 헌터들과 군인들이 성을 끼고서 필사적으로 몬스터들을 저지하고 있고, 수원의 시민들은 그 틈에 안전하게 대피하는 중입니다.]
[김두종 기자. 지금 저 성은 대체 뭐죠?]
[아, 지금 저 성은 한 헌터가 영령의 힘을 빌려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아, 네. 지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자로부터 새로운 소식입니다! 현재 저 성은 최근에 큰 이슈가 되었던 강현찬 헌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현찬 헌터가요?]
[네. 그렇습니다. 강현찬 헌터가 나서서 성을 만들었고, 그것을 거점 삼아서 다른 헌터들이 방어를 하고 있습니다.]
강현찬.
그 이름이 또다시 나오자 당연히 인터넷은 떠들썩하게 변했다.
- 와. ㅁㅊ대체 영령이 누구 길래 맨땅에 성을 만듦?
- 신급 영령의 계약자라는 말이 구라가 아니었구나.
- 설마 그 말을 안 믿은 흑우들 없제?
- 현찬붐은 온다.
- 성을 만들다니 그냥 혼자서 공성전도 하겠네.
농담 삼아 그렇게 말을 하더라도,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공성전이 TV의 뉴스화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성벽을 어떻게든 오르려고 발악을 하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괴물들.
그리고 그런 몬스터들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창과 칼을 휘두르는 헌터들.
허공을 가르는 다양한 마법들이 지면이나 몬스터에게 닿아 폭발하며 번쩍이는 섬광을 만든다.
그야말로 영화에서만 보던 광경이 펼쳐졌다.
그 광경을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성벽을 넘으려는 몬스터들과, 그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헌터들의 치열한 싸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엄청난 긴장감을 주었다.
TV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실시간 LIVE로 중계를 하고 있었고 시청자의 수가 100만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이러한 전투를 보고 있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해외의 뉴스 매체에서도 실시간으로 수원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성전을 다루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 우리나라 헌터들 힘내라!
- 저런 몬스터들에게 지지 마라!
- 와. 진짜 나라면 저기서 오줌 지릴 자신 있다.
- 저런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싸우는 헌터들이 대단한 거 같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헌터들을 응원했고 싸움은 점점 치열하게 흘러갔다.
성벽에 바로 붙어서 기어오르려던 몬스터들은 근접 전사계열 헌터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고서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몬스터들의 시체가 쌓이다 보니까 그것을 발판으로 삼고서 다른 몬스터들이 성벽을 오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마법사! 누가 지속성 마법으로 해자를 파!”
“젠장! 주술이나 도술, 마법 계열 영령의 힘이라도 죄다 쏟아부어!”
마법사 몇몇이 땅 마법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성벽 바로 앞에 구덩이를 파서 만들려고 했지만, 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몬스터들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어지간한 구덩이로는 효과조차 보지 못했다.
이윽고 곳곳에서 성벽 위까지 손을 뻗는 몬스터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탱커들은 앞으로!”
“잡히지 않게 조심해라!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고 사람들의 거친 호흡 소리와 땀 냄새가 성벽 위를 가득 메웠다.
정말로 놀랍게도 공성전이 시작되면서 아직까지 헌터들 중에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부상자는 있지만, 그들은 빠르게 힐러들의 치료를 받아 다시 용감하게 싸웠다.
이는 성벽이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현찬이 펼친 대규모 버프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직 몬스터들의 숫자는 많이 남았는데 점차 성벽 위로 올라오는 녀석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양만춘 님!”
[그래. 알겠다.]
스킬.
<끓는 기름>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항아리가 기울어지더니 그곳에서 뜨겁게 끓는 기름이 몬스터들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기름 붓기에 당황했지만, 그것이 아군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치이이익!
쿠워어어어!
끓는 기름에 닿은 몬스터들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다가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자신의 동족들과 충돌하며 넘어졌다.
보통 불 마법에 적중당해도 끄떡 않는 몬스터가, 고작 끓는 기름에 아파하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저것은 실제 기름이 아닌 <양만춘>의 힘으로 구현된 일종의 마력이 담긴 스킬이었기 때문에 피해를 주는 것이 가능했다.
콰과과광!
성벽 너머의 전차가 불길을 뿜었고 몬스터들을 향해 포탄이 쏘아졌다. 성벽 위의 망루에서 군인들이 기관총을 마구잡이로 쏘아댔고 그에 질세라 헌터들도 악과 깡으로 싸웠다.
“조금만 더 버텨라! 놈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백전노장인 강덕수의 외침에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헌터들이 이를 악물고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 전까지 주변의 시야를 가득 메우던 4급 몬스터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얼마 남지 않았어!’
대부분의 헌터들이 마음속으로 그런 희망을 품고 있을 때였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울음소리가 수원시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서 성벽 위의 헌터들을 강타했다.
[상태이상 공포에 저항합니다.]
“우악?!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현찬과 힐러들의 버프로 인해 헌터들은 이 소리에도 겁먹지 않았지만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수원을 바라보았다.
“저, 저기 봐!”
“미친.”
한 헌터의 발작과도 같은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재차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모습을.
조금 전에 몰려온 몬스터들보다 그 수가 족히 배는 많은 녀석들. 하나하나가 강력한 녀석들이 무려 1천에 가까운 수를 유지한 채 이쪽으로 멀리서부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절망의 끝에 이어지는 새로운 절망.
제2차 웨이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