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화 빅 웨이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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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정말로 해냈구나.”
기자들에게 시달리다 겨우 벗어난 현찬에게 다가와 이한율이 건넨 한 마디였다. 그녀는 정말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현찬이 이러한 업적을 혼자서 해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말 했잖아.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아니, 보통은 그걸…… 하아. 뭔가 너를 보면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이 이상 무언가를 말해도 소용없음을 아는 한율은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나름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영웅급 영령과 계약을 맺었으며 대한민국에서 5대 클랜 중 하나인 황룡 클랜에 들었고 젊은 나이에 A랭크 헌터가 되어 유명세를 듬뿍 받았다.
스스로도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인기가 좋다고 자부했으며 또래 중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은근히 품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찬을 보면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한율이 몇 년을 거쳐서 달성한 단계를 현찬은 한 달도 걸리지 않아서 이룩했고 지금은 오히려 이한율보다 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질투심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찬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A랭크를 달성하고도 다른 A랭크 헌터들처럼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하지도 않으며 주변에서 치켜세워주는 대다수의 헌터들처럼 거만하거나 오만한 느낌들도 없었다. 예의가 바르고 부드럽다. 그런 점이 현찬을 호감이 가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세기의 영웅님? 이제 어쩌실 생각이야?”
“어쩌기는.”
장난스러운 한율의 물음에 현찬은 재차 바리게이트 너머의 수원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인을 제거해야지.”
“그래.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충분히 쉬었어.”
사실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그나마 조금의 피로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영웅급 영령이었던 <척준경>과 계약 이후 미약하게나마 남은 리바운드의 영향일 뿐. 그마저도 빠르게 회복되어 지금 현찬의 몸 상태는 아주 쌩쌩했다.
다만.
현찬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멀리 보이는 빌딩의 숲을 노려본다.
“아무래도 저쪽에서도 제대로 화가 난 것 같네.”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길 봐.”
현찬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수원시 도심의 깊은 곳에서부터 진흙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도시 내부를 배회하거나 간혹 한두 마리가 방어선으로 흘러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이질적인 움직임.
그것을 눈치챈 이한율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은 몇몇 고랭크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맞아.”
이한율의 불길한 예상을,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보아하니 저쪽이 먼저 선수를 치려는 것 같네.”
쿠워어어어어어!!
수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몸이 잘게 울릴 정도로 거대한 울음소리. 못해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녀석의 분노에 찬 고함은 너무나도 거대했으니까.
녀석은 분노했다.
자신의 땅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동족들을 죽이고서 도시의 바깥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 갈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저 멀리서부터 와글와글 모여 있는 먹잇감들. 놈들을 지금 당장 잡아먹을 것이다. 놈들을 짓밟고 찢어발기며 뜨거운 피를 흩뿌릴 것이다.
그런 무리의 우두머리 의지를 느꼈는지 몬스터들이 하나둘 수원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목표는 바로 헌터들과 군인이 머무는 최후의 방어선.
하나하나가 집채만 한 덩치를 지닌 몬스터들이 엄청난 수를 이루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왜애애애애앵!!
“비상! 비상! 몬스터들이 온다!”
“젠장!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쉬는 사람 전부 다 이쪽으로 모아! 여기가 뚫리면 끝이야!”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탱크들이 줄지어 방어선에 섰다. 하지만 그들이 쳐놓은 바리게이트는 괴물의 크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난감에 가까웠다. 헌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 B랭크 이상의 헌터들은 전국 곳곳에서 이곳으로 모인 상태. 그들 또한 전투 준비에 임했다.
“시민 여러분!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여기는 위험합니다!”
“모두 차분하게 지시를 따라주세요!”
경찰들이 모여 있는 시민들을 대피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그 수가 워낙 많다 보니까 전부 다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에는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과 군인들이 지금 멀리서부터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야 한다는 소리.
그들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개체마다 건물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며 부수는 놈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무려 수백 마리. 심지어 아직 도시 안쪽에는 얼마나 되는 몬스터들이 더 있는지 짐작조차 불가능한 상태.
싸우면 죽는다.
하지만 싸우지 않는다면? 도망친다면?
헌터들은 신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므로 도망친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겠지. 뒤에서 아직도 피난을 가는 시민들은 무참히 살해당할 것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이 멍청한 놈들아! 모두 자리를 지켜!”
그때 장내에 울려 퍼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A랭크 헌터인 강덕수였다.
“너희들이 겁먹으면 어쩌자는 건데! 정신 차려라! 우리가 물러나면 다 죽어!”
“하, 하지만…….”
강덕수의 외침에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못했다. 성격이 불같은 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려고 했지만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리는 사람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뭐냐. 최무진. 너도 왔었냐?”
5대 클랜 중 하나인 세인트 가디언 소속의 A랭크 헌터 최무진. 인상이 좋은 중년인 그는 허허로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곳에 우리가 빠질 수나 있겠냐. 그렇게 화내지 마라. 다들 무서워서 그런 거니까.”
“칫. 요즘 헌터들은 말이야, 다 나약해 빠졌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초짜들뿐이야.”
“우리 때와는 세월이 틀리잖아.”
강덕수와 최무진. 이 둘은 <대통합>과 동시에 각성을 한 1세대 각성자이자 오랫동안 헌터로서 활동해 온 최고의 베테랑들이었다. 헌터업계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둘이 한자리에 모이자 다른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덕수야.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앞에 나서줘야 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최무진의 뒤로는 세인트 가디언 클랜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강렬한 기도를 뿜어내는 헌터들. 그중에서는 이름을 알리며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저기 봐. 이번에 영웅급 영령에 힐러 클래스를 지닌 서다은이야.”
세인트 가디언 클랜 소속인 다은 또한 현장에 나와 있었다. 아직 그녀의 실력으로는 몬스터들과 싸울 수는 없지만, 그녀가 가진 치유능력이나 버프는 다른 헌터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 자처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아저씨들만 멋있게 말하지 말라고요.”
상황을 지켜보던 이한율도 나섰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같은 황룡 클랜인 김승태 또한 같이 있었다. 나머지 클랜원들은 다른 곳에 파견 간 상태라 둘밖에 없었지만, 둘만으로도 엄청난 전력이었다.
황룡 클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름이 있는 클랜에서도 상당수의 헌터들이 전선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것은 현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현찬 헌터도 있어.”
“들었어. 저 지옥 같은 곳에서 생존자들을 전부 무사히 구해냈다며? 그것도 혼자서.”
“맞아. 저 사람이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특히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역시나 현찬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수원 게이트 사태에서 주인공은 바로 현찬이었으니까.
현찬은 모두가 포기했던 순간에서도 혼자서 기적 같은 일을 일으켰다.
그 기적을 이 자리에서 다시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어쩌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현찬을 향한 기대감을 품게 했다.
[와. 사람들 시선이 장난 아닌데?]
“그러게 말이다.”
현찬은 이렇게까지 뜨거운 시선이 몰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곤혹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 몰래 다가온 이한율이 팔꿈치로 현찬을 툭 치며 귓속말을 전했다.
“뭐해? 다들 너만 바라보고 있잖아.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자리의 주역은 너니까 네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 줘.”
내가 과연 그래도 될까?
현찬은 그런 생각을 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현찬을 향해 열망이 가득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무장을 갖춘 군인들도, 랭크가 낮은 헌터들도, 심지어 A랭크에 엘리트라 불리는 헌터들까지 현찬에게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모두가 현찬을 인정한 것이다.
심지어 자존심이 하늘처럼 높다고 하는 A랭크 헌터들까지도.
물론 그중에서 화랑 클랜 소속의 헌터들은 별로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내가 해야겠구나.’
이렇게까지 바란다면 어쩔 수 없겠지.
현찬은 좌중을 쓱 훑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다은과 눈이 마주쳤는데 현찬은 당황하지 않고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어, 음. 갑작스럽게 이런 자리를 갖게 되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는 하네요. 아시는 분도, 모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부족하게나마 신급 영령의 계약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죠.”
현찬은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궁금할 겁니다. 저희가 과연 저 몬스터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저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몇몇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합니다.”
현찬의 말에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영웅으로 칭송받는 현찬이 살 수 있다고 하니 당연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 같았으니까.
“이곳에서 겁먹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도망가는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러분.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세요.”
“하, 하지만 어떻게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
현찬이 강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아무리 헌터의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동시에 넓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찬이라면 가능했다.
덩치가 자그마한 집채만 한 몬스터를 상대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바리게이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방벽이 있다면?
저 몬스터들도 쉽게 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장벽이 있다면?
그 누구도, 공략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다면?
‘헤르메스. 이번에는 나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야. 네 도움이 필요해.’
[그 말을 기다렸어. 친구.]
헤르메스를 통한 영령과의 직접 계약.
이는 헤르메스의 권능을 빌려 현찬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위의 계약.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신의 힘이 강림한다.
콰아아아!
“뭐, 뭐야?!”
“엄청난 마력. 이건 대체…….”
“이게 바로 신급 영령의 힘?”
현찬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에 같은 A랭크 헌터들마저 감탄했다. 이처럼 짙은 밀도를 지닌 마력은 그들로서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헤르메스. 준비됐어?”
[계약 완료야.]
“좋아.”
헤르메스의 말에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선의 최전방으로 나섰다.
스킬
<헤르메스의 권능-계약>
그리고 가볍게 발을 구른다.
쿠웅!
거대한 마력이 지면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점점 울긋불긋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현찬을 중심으로 솟아오른 토양이 점차 굳어갔다. 무른 지면이었던 그것은 순식간에 견고하게 뭉치고 압축되며 그 강도가 바위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변했다. 그것의 높이가 사람들의 머리에 다다르며 벽이 되었음에도 지면은 계속 상승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지형이 변하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지간한 상황에서 놀라지도 않을 자신이 있던 1세대 헌터인 강덕수와 최무진 또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미쳤군. 단 한 명이 이런 걸 가능하게 한다고?”
“역대급이라는 수식조차 이제는 부족할 지경이로군.”
그들의 눈앞에 우뚝 선 것은 바로 거대한 <성>이었다.
성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현찬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서기 645년.
당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불세출의 명장인 당 태종은 오랑캐의 위협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목으로 반도의 자그마한 나라인 고구려도 습격한다.
병력의 수에서만 봐도 당나라와 고구려의 격차는 거대했다.
실제로 진격해오는 당나라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고구려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그 영토를 유린했다.
하지만 단 한 명.
그 거대한 군세에 맞서서 싸운 자가 있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도 없고,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도 없죠.”
그 누구도 그가 당 태종을 막아서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 또한 바람 앞의 한 줄기의 촛불처럼 스러져갈 거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는 그 무지막지한 당나라의 군세를 막아낸 것이었다.
누구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여겼던 일을 그는 해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저희는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들에게 스러져갈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
‘정관의 치세’를 열어 뛰어난 당 황제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을 격퇴한 고구려의 영웅.
[우리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맞서 싸우리라.
안시성(安市城)의 위에 우뚝 선 현찬이 검을 뽑아 들었다.
“와라! 괴물들아! 너희들은 결코 이 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세계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방어전의 근원지.
그 견고했던 역사의 흔적이 사람들의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