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화 게이트 사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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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수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뒤에 있던 헌터들이 말렸다.
“강현찬 헌터 님!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저 안쪽에는 이보다 더한 녀석들이 우글우글한다고요!”
조금 전 현찬의 무력을 봤음에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어쩌면 그만큼 지금 수원을 잠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에 대한 두려움이 큰 걸지도 몰랐다.
[나 때와 비슷한 상황이구나. 계약자여.]
몬스터가 주는 공포심에 물들어 있는 군인과 헌터들을 보며 <척준경>이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도 지금 보고 있는 현대의 풍경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려가 여진과 전쟁을 벌일 때 영주성에 포위되어 갇힌 적이 있었다.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와서 영주성을 공격했으며 이미 병력에 큰 손실을 본 고려군은 농성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떤 채 어떻게든 버티며 시간을 끌려고 할 때.
오직 척준경만이 그곳에서 유일하게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딱 이러했다.
“만약 나가 싸우지 않았다가 적의 병력이 갈수록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며 외부의 원병까지 오지 않으면 우리는 고스란히 죽을 것입니다. 전날 싸움에 이긴 것을 공이 이미 보셨으나 오늘 또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테니 공들께서는 성에 올라가 구경하시오.”
즉 요약하자면 이거다.
가만히 있으면 다 죽을 테니 다들 내가 하는 거나 잘 봐라.
그것은 얼핏 보면 미쳤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척준경은 정말로 그 말을 남기고서 별동대를 이끌고 성문을 뛰쳐나가 여진족들을 베었으며 순식간에 여진족들의 수급을 취해 2만의 병력을 물리친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정사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
그만큼 척준경이란 인물이 살아있을 적에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척준경>의 힘을 고스란히 받는 사람이 바로 현찬이었다.
현찬은 잔뜩 겁에 질린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가는 건 저 혼자만으로 충분합니다. 생존자들은 제가 지켜낼 테니 여러분들은 그냥 구경이나 하세요.”
어떻게 보면 광오한 말!
하지만 그 누구도 현찬에게 불만을 내뱉거나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바로 코앞에서 현찬의 무위를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를 공포로 몰고 간 몬스터를 단칼에 제거하는 힘.
게다가 새하얀 무복을 걸치고 있는 현찬에게는 그들이 항거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쥐가 고양이를 걱정한 꼴이라고.
자신들의 걱정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고.
[결국, 중요한 것은 그거다. 단 한 명의 영웅이 전황을 뒤바꿀 수 있다는 거지.]
‘그렇군요. 충고 고맙습니다.’
[무얼. 그저 나를 이렇게 불러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네.]
‘그러면 가죠.’
[좋네.]
현찬은 폐허로 변한 수원시를 향해 한 줄기 질풍이 되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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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B랭크 헌터 박해일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정말 온갖 욕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수원은 몬스터들에 의해 함락되었고 소수의 생존자는 어떻게든 한곳으로 뭉쳤지만 몬스터 때문에 어디로 가지도 못한 채 빌딩 하나에 갇혀 지내고 있었으니까. 최대한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서 빌딩의 지하에 숨었다.
생존자들을 이끌고 탈출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이 주변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은 B랭크 헌터인 그조차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녀석들이었으니까. 이미 여럿의 헌터가 녀석들을 잡겠다고 도전했다가 녀석들의 배속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바깥으로 나간 사람들의 최후 또한 그들과 같았다.
처절한 비명, 뼈가 씹히는 소리, 흩어지는 피 보라와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으니 남아있는 자들은 두려움에 덜덜 떤 채로 그저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전부 죽을 테니까.
‘구조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지금은 가까스로 들키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다.
조금 전부터 이 주변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의 기척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니까.
마법사 클래스를 지닌 헌터 한 명이 간이 결계를 쳐서 놈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불빛조차 없는 어두운 실내. 그곳에 한 데 모여 웅크리고 있는 100여 명 사람. 이들이 뿜어내고 있는 절망의 기운. 박해일은 자신도 거기에 전염되어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죽음이 마치 코앞에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불쾌한 기분.
그들이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바로 구조대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구조대는커녕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매 초마다 피가 말리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애가 탈 수밖에.
‘설마, 버려진 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
애써 고개를 저으며 아닐 거로 생각해보지만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가능성을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다.
전대미문의 게이트 사태다. 이 상황에서 헌터들과 군인을 수원으로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인력의 낭비였다. 이곳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의 수준은 딱 봐도 매우 강력했으니까.
‘지금이라도 혼자 도망을 칠까?’
자신의 마음속의 악마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지킬 필요 없다고. 그대로 도망치라고.
혼자서 움직인다면, 이곳에서 탈출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특히나 그는 도적계열 클래스를 지니고 있다 보니 은밀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도망치면 살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해일은 쥐죽은 듯 가만히 있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부모, 늙은 노인, 대피 도중 상처를 입은 학생 등등.
그 모습을 눈에 담으니 도저히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박해일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자신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이 자리에 모인 헌터 중에서도 가장 랭크가 높은 박해일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친다?
그것은 이 사람들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애써 자신이라는 동아줄을 붙잡는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짓이었다.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들도 다 누군가에게 있어서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모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박해일은 너무나도 선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사람들을 돕는 걸 잘했기 때문에 이용도 많이 당했다.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천성이라는 것을 바꿀 수가 없었다.
‘대체 이놈의 천성이 뭐라고.’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바깥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쿵! 콰아앙!
쿠워어어어어!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 지면이 진동하고 몬스터들의 외침이 이곳까지 들려온다.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이 빌딩 내부가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을 정도. 소리의 근원지는 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푹 숙이던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공포, 절망, 패닉. 온갖 감정에 빠져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흑흑. 엄마!”
“으으으! 대, 대체 무슨 일이지?”
“괴물이야. 괴물이 우릴 다 잡아먹을 거라고.”
당황한 것은 박해일을 필두로 한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몬스터들이 이 근처를 배회해도 이렇게까지 시끄럽지 않았다. 즉, 처음 있는 일. 그들로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헌터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자신의 무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각자 계약한 영령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대로 가만히 몬스터들에게 당할 바에야,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 발악을 하겠다는 의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지하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며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고 헌터들은 각자 전투태세를 취했다. 뿌연 먼지 너머로 보인 거대한 실루엣, 저것은 분명히 바깥을 배회하고 있던 그 몬스터였다.
‘결국, 들킨 건가.’
이 근처를 기웃거릴 때부터 눈치챘지만, 막상 직접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박해일은 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아주 미약하지만, 희망이 있었다.
‘저들이 우릴 지켜주겠지’라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싸워야만 했다.
“다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박해일의 말에 헌터들은 고개를 저었다.
“박해일 헌터 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맞아요. 다 운이 없었던 거죠.”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열심히 불살라 봅시다.”
다들 두려워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박해일은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는 양손에 단검을 쥐며 앞으로 나섰다.
“갑니다.”
“네.”
헌터들이 연기 속의 몬스터에게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그 안에서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어?”
“응?”
헌터들은 당황했다.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등장한 것은 단 한 명의 사람이었으니까.
새하얀 도복에 한 손에 쥔 검. 그의 복색은 특이했지만, 그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연기가 가라앉으며 보인 풍경에, 전부 다 압도되었으니까.
지하의 천장이 무너지며 드러난 바깥의 풍경.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이 빌딩의 주변을 배회하며 먹잇감을 찾던 진흙 몬스터들의 시체로 즐비해 있었다.
B랭크 헌터 여럿이 덤벼도 한 마리를 제대로 쓰러뜨릴 수 없던 놈들이다. 그런 녀석들의 시체가 무려 수십 구. 상처를 보면 전부 다 일격에 당한 것이다.
그것도 바로 눈앞의 청년에 의해서.
‘맙소사.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소음이, 괴물들을 잡으면서 나온 소리였다고?’
박해일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A랭크 헌터 강현찬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강현찬!
누군가가 그런 기함을 토했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바로 며칠 전에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고의 신인 헌터이지 않은가. 신급 영령의 계약자이며 역대 최단기간 A랭크를 달성한 헌터.
그런 그가 구하러 왔다는 소리에 시민들이 모두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만세! 우린 이제 살았어!”
“흑흑! 드디어 돌아갈 수 있어!”
생존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현찬은 100여 명 시민을 보며 물었다.
“여기 혹시 정아영 양의 어머니 계신가요?”
“네? 저, 저인데요.”
현찬의 물음에 한 여성이 손을 들며 대답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현찬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어서 가시죠. 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아아. 무사했구나.”
아영의 어머니는 자신의 가족이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 상황에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던 박해일이 물었다.
“저, 저기 강현찬 헌터 님. 다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호, 혹시 정말로 혼자서 오신 겁니까?”
박해일은 자신이 묻고도 믿기질 않아서 다시 물었다.
아무리 A랭크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규격 외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다른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게 더 현실감 있으리라.
“네. 혼자서 왔습니다.”
하지만 현찬은 매정하게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혼자서도 충분하거든요.”
“…….”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