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화 흰개미 소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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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마지막 멤버는 약속 시각보다 무려 20분이나 더 늦게 왔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약속 시각보다 더 일찍 나온 것을 고려하면 거의 40분 이상을 기다렸다는 소리였다.
헌터보다 훨씬 더 일찍 온 짐꾼들은 무거운 장비를 진 채 1시간이 넘게 대기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현찬이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아, 이거 죄송. 죄송.”
“최휘문 씨. 제가 늦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지 않았나요.”
계속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양문수조차 표정을 굳힌 채 그를 질책했다. 헌터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큰돈이다. 특히나 B랭크 헌터들은 그야말로 고급인력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들에게 오랜 시간을 가만히 기다리게 하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늦은 장본인인 최휘문은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고작 이 정도 늦은 거 가지고 뭘 그러세요?”
“최휘문 씨가 늦으면 기다리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저기 보세요. 저희를 도와줄 짐꾼 여러분들도 지금 최휘문 씨 때문에 무려 1시간 가까이 저 상태에서 스탠바이 중입니다.”
짐꾼.
짐을 나르는 이 사람들은 헌터의 랭크가 낮아서 사냥이 힘든 자들이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다른 헌터들이 사냥하고 나온 부산물을 챙겨주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아씨. 저딴 짐꾼들이 기다리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요?”
마치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치는 최휘문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짐꾼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표정 관리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괜히 기분 나쁜 기색을 내비쳤다가 B랭크 헌터에게 찍히면 그들만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최휘문 씨. 말조심하세요. 저 사람들도 저희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갈 동료입니다.”
“아 동료는 무슨. 어차피 사냥은 저희가 하고 쟤들은 그냥 편하게 물건이나 줍는 역할인데.”
짐꾼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최휘문보다 나이가 많았다. 개중에는 가정이 딸린 40~50대 중년의 남성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최휘문은 그들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은 것이다.
‘하아.’
양문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였지만, 역시나 막상 닥치고 보니까 그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저대로 놔둬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도록 하죠.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심하네요.”
현찬은 파티 리더인 양문수가 저렇게 말하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최휘문은 거만하다. 젊은 나이에 벌써 B랭크 헌터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당연했다. 돈도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다. 사고를 쳐도 소속된 클랜에서 뒤를 봐주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누구도 따끔하게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의 인성이 글러 먹게 된 것이다.
‘그나마 강현찬 씨가 예의가 발라서 다행이야.’
듣기로는 최근에 화제가 되는 역대급 신인 헌터라고 한다. 훈련을 끝마치고 수료와 동시에 B랭크 자격증을 받았으니 아마 성장 가능성은 그보다 더 높겠지.
소문에 의하면 엄청난 영령과 계약을 맺었고 A랭크 몬스터인 기간테스도 혼자서 사냥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무언가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본래 그런 사람일수록 거만할 확률이 높았지만, 양문수가 본 현찬은 아주 예의 바르고 싹싹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경 쓸 거리가 줄어들었으니까.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둘이 싸우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그나마 불현듯 드는 걱정은 현찬과 휘문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까 하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강하면서 거만한 휘문은 자신보다 기수도 낮으면서 같은 등급을 받은 현찬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테니까.
‘아니면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생각이 정답이었다. 휘문은 현찬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같은 파티의 여성 헌터에게 눈길이 간 상태였으니까.
결국, 첫발부터 무언가 삐끗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티는 본격적으로 사냥을 개시했다.
[흰개미소굴]
매우 거대한 땅속을 배경으로 하는 게이트다. 몬스터의 수준은 대부분 6등급답게 매우 강력했으며 심지어 그 수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여러 명의 헌터들을 대동해야만 클리어가 가능한 어려운 게이트였다.
현찬 또한 게이트에 관해 미리 정보를 찾아보았기 때문에 지금 들어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전날 갔던 1인용 게이트인 [환영굴]과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곳.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사실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짐꾼이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B랭크 몬스터 하나에 걸려도 순식간에 갈려 나간다. 물론 이곳에 모인 헌터 5명이 그들을 지켜주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갑시다.”
현찬을 포함한 헌터 5명과 그 뒤를 따르는 짐꾼 7명.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눅눅한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동굴. 아니, 개미굴이었다.
“전투 준비!”
양문수의 외침과 동시에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의 어둠 너머 그 안에서 침입자의 존재를 인식한 거대 흰개미들이 이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일반 몬스터인 병정개미가 단단한 턱을 딱딱거리며 위협을 가했다.
평소에 자주 보았던 자그마한 개미가 아니라 그보다 수만 배는 거대한 개미다. 한 놈 한 놈이 거의 어린아이 몸집만 한 놈들이라 방심하면 위험하다.
마법사 클래스의 남성, 문정훈이 주문을 발동시키자 거대한 불덩어리가 그대로 거대 흰개미들을 집어삼켰다. 그런 화염을 뚫고 들어오는 녀석들은 양문수가 방패로 막았고 그 빈틈을 현찬과 휘문이 찌르며 녀석들을 쓰러뜨린다.
도적 클래스인 정다희는 간혹 뒤쪽 통로에서 나타나는 녀석들을 처리하거나 일행들이 놓친 병정개미들을 중점적으로 사냥했다.
바닥에 개미 사체가 쌓였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짐꾼들이 나설 차례였다. 그들은 챙겨온 공구를 이용하여 부지런히 개미의 껍질를 벗겨내고 마석을 채취했다.
“후우. 저희는 일단 휴식을 취하죠.”
이 주변 일대의 흰개미들은 다 정리를 끝마친 상황. 정다희의 스캔에 의하면 몬스터의 흔적이 없으니 아마 한동안은 안전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휴식을 취하던 중 양문수가 현찬에게 웃으며 말했다.
“강현찬 씨는 오늘 저희 파티와 처음일 텐데도 상당히 합이 잘 맞으시네요. 게다가 실력도 대단하시고.”
“아.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영령과 계약을 맺었는지 알 수 있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비밀이라서요.”
“그렇군요.”
양문수는 딱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헌터가 자신의 영령 정체를 숨기는 경우는 적지만 확실히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대부분 영령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길 원치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양문수는 현찬도 딱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아 무슨 비밀이긴 비밀이야? 저거 딱 봐도 영령이 구리니까 쪽팔려서 말 안 해 주는 거잖아.”
갑자기 분위기에 초를 치는 한마디. 열심히 일하던 짐꾼들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헌터들도 모두 망언을 한 최휘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작 모두의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는 현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껄렁한 태도로 말을 찍찍 내뱉었다.
“거 참. 영령 하나 알려주는 거로 되게 까칠하게 구네.”
“최휘문 씨!”
“아저씨.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좀 작게 말해요. 뭣 하면 개미들이라도 부르게?”
“…… 지금 강현찬 헌터 님께 무슨 예의 없는 행동입니까. 사과하세요.”
“사과는 무슨 얼어 죽을 사과. 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어? 거기 짐꾼 아저씨. 말해 봐. 내가 틀린 말 했냐고?”
“네? 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짐꾼 한 명이 당황하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엔 너무나도 그의 지위가 나약하고 별볼일 없었기에 그는 얼버무리는 방법을 택했다. 다만 그것이 최휘문의 심기를 거슬렸다.
“아 모르긴 뭘 몰라? 아저씨 학교 안 나왔어? 어?”
“아, 아뇨 그게…….”
짐꾼 아저씨는 당황스러워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애한테 반말을 들으면서 쩔쩔매야 하는 처지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상대는 갑이었기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화를 삼켰다.
결국, 보다 못한 현찬이 나섰다.
“야. 괜한 사람 잡지 말고 당사자랑 이야기하지?”
“뭐래.”
“그런 그쪽은 대체 얼마나 잘난 영령을 뒀기에 그렇게 남한테 함부로 대하는 건데?”
현찬은 그렇게 말했으면서 휘문의 영령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했다. 확실히 젊은 나이에 B랭크 헌터를 할 정도라면 왕급 영령이지만, 여타 왕급 영령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사람과는 격이 다르네.]
헤르메스도 휘문의 영령을 느꼈는지 그렇게 말했다.
“듣고 놀라지나 마라. 내 영령은 왕급 영령 중에서도 고려의 왕인 <충혜왕>이다.”
정작 휘문도 자신의 영령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모양인지 오히려 자랑스럽게 밝히는 게 아닌가?
“…….”
“…….”
“…….”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놀라기도 했다. 왕급 영령이라고 기세 좋게 말한 그 왕이라는 인물이 충혜왕이었으니 오죽하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다들 그래도 헌터로서 먹고 살며 영령에 대한 정보도 나름 알고 있기에 역사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풍부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충혜왕이 어떤 인물인지.
한반도 역사에서 최악으로 손꼽히는 고려의 폭군.
그 악행으로 유명한 조선의 연산군조차도 충혜왕에게 한 수 접어들 정도로 막장인 왕이었다.
그런데 정작 충혜왕과 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니 한심하게 보일 수밖에.
하지만 현찬은 왜 B랭크 헌터나 되는 최휘문이 이런 성격인지 알 것 같았다. 헌터는 영령과 계약을 맺고 그 힘을 다룰 수 있다. 특히나 <빙의> 단계에만 가도 그 영령과 동화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향에 영향을 받는 거다.
원래 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철부지에 여자만 밝히는 충혜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왜? 질투 나냐? 너희들은 꿈도 못 꿀 사람이야. 알아?”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던 정다희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진짜 끼리끼리 논다더니 아주 개판이구나. 꼴에 왕급 영령이랍시고 참. 아무 여자한테 껄떡대면서 나대는 이유가 있었네.”
그 말이 최휘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껄떡대? 이게 예전부터 예뻐서 봐줬더니 기어오른다?”
휘문은 현찬이 합류하기 전에 몇 차례 이 팀과 함께 던전을 탐색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몇 번이고 정다희에게 수작질을 걸었지만, 그것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 부분을 남들 앞에서 까발리니 당연히 격하게 반응을 할 수밖에.
하지만 정다희도 그에게 맺힌 것이 많았기 때문에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휘문을 쏘아보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그쪽 오늘도 약속 시각에 늦은 것도 밤새 룸에서 여자 끼고 술 처마시다 늦잠자서 그런 건 아니고?”
“이, 이익!”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휘문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화나지만 뭐라고 말은 못 하겠고, 결국 휘문은 행동으로 나서고 말았다. 그대로 손을 치켜 올려 정다희의 뺨을 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 휘문의 손을 잡은 것은 바로 현찬이었다.
“야.”
현찬은 더는 파티의 분위기를 망치며 망아지처럼 날뛰는 휘문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적당히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