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비상의 시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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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2차로 고깃집에서 최고급 한우를 쏜 현찬은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현찬은 자신을 조금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현찬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그 때문인지 단순히 게이트 처리 관련해서 일거리를 받으러 왔을 뿐인데도 여전히 다양한 클랜에서 현찬을 찾아와 자신의 클랜으로 들어오라며 영입 제안을 했다.
“강현찬 헌터 님……!”
“저희 클랜에……!”
“아주 좋은 조건으로……!”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어떤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언어의 나열들이었다.
“아, 안 한다고요!”
아직은 혼자서 다니겠다고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지만, 저들은 매우 끈질겼다. 그야말로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 현찬은 도망치듯 헌터 협회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협회 내부에서만큼은 저들도 어쩔 수 없는지 입맛을 다시며 현찬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와. 무슨 좀비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를 보는 거 같다.]
최근 헤르메스는 현찬의 도움으로 TV를 자주 시청하다 보니 이런 지식들이 늘었다. 헤르메스의 말대로 협회 입구에서 진을 치고서 오매불망 현찬이 나오길 기다리는 클랜의 사람들을 보면 진짜 좀비 영화의 한 장면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어우. 끔찍해라.”
현찬은 한번 몸을 떤 후에 B랭크 게이트를 하나 선택했다. 게이트는 랭크가 높아질수록 남아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이는 고랭크 헌터들의 숫자가 적다 보니 게이트의 클리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 때문인지, 혹은 덕분이라고 해야 하는지 현찬이 B랭크 게이트 임무를 받는 데에는 딱히 차질이나 경쟁을 빚는 경우는 없었다.
현찬이 선택한 게이트는 B랭크 1인용 게이트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가려고?]
“응.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차 가는 거야.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그리고 B랭크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도 전체적으로 어느 수준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아무리 현찬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게이트와 던전은 절대로 방심을 해서는 안 되는 곳.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고 하더라도 목숨의 위험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준비는 항상 철저해야만 했다.
“B랭크 게이트 정보는 여기 있습니다.”
안내원은 현찬에게 친절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강현찬 헌터님. 혹시 장비는 있으신가요? 저희 협회에 들어오신다면 지금 바로 무료로 B+랭크급 장비를 대여가 가능한…….”
“됐어요.”
현찬은 재빠르게 거절했다. 안내원마저 현찬에게 저런 제안을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정기원실장의 입김이 강하게 닿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현찬을 협회로 데려오기 위해 혈안이 된 듯했다.
[인기인은 피곤하구나.]
“그러게.”
현찬은 쓰게 웃었다. 장비야 굳이 대여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헌터가 되면서 기본적으로 지급이 된 장비가 있으며 비록 현찬이 쓰기에는 랭크가 낮지만 그럼에도 신품이라 못 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찬은 장비의 등급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보통 헌터라면 무기에 꽤나 집착을 한다. 좋은 무기를 가져야만 몬스터의 사냥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현찬의 경우에는 다양한 영령의 힘을 <차용> 할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그 힘을 이용하면 생전에 영령이 사용하던 무기를 불러내는 것도 간단한 일이었다.
물론 좋은 장비를 가졌다면, 영령이 사용하던 물건을 무기에 덧씌워서 더욱 강하게 바꾸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현찬은 아직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돈을 많이 번다면 좋은 무기를 구매할 생각도 있지만.’
혹여나 운이 좋을 경우에는 게이트 내부에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흔히 게이트 내부에서 얻는 아이템을 <유물>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다른 세계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라 그런지 지구의 물건과는 질 적인 측면에서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했다.
1급부터 10급까지 나누어져 있는데 최소 3급 <유물> 하나만 얻어도 헌터 인생이 핀다고 할 정도였다. 들리는 바로는 암시장에 풀린 3급 유물이 무려 750억 원에 거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1급 유물은 대체 얼마나 비싼 건지.’
그것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유물이라는 것도 쉽게 나오는 게 아닌지라 현찬은 괜한 헛된 망상을 그만두었다.
“가자.”
[좋았어! 가즈아!]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속세에 오염되어가는 신의 모습에 현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혹시나 현찬이 헤르메스를 <소환>하는 단계까지 갔을 때, 과연 현세에 강림한 헤르메스가 어떤 행동을 벌일지 궁금함이 일었다.
‘진짜 주식이나 가상화폐 하는 건 아니겠지?’
장난꾸러기이자 호기심이 왕성한 헤르메스다.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게 걸렸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헤르메스 성격상 돈을 다 따버릴 것 같다는 점이다.
‘뭐, 내가 소환을 할 정도가 되려면 꽤나 오래 걸리겠지만.’
눈에 불을 켜고서 현찬을 영입하려는 클랜의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현찬은 협회의 후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갔다. 협회에서 헌터들은 물론 그곳에서도 몇 명의 클랜 소속이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B랭크 헌터인 현찬은 그들의 눈을 속여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이트가 있는 곳은 차로 20분 정도 되는 거리네.’
가려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야했다. 도심에 있는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최우선 토벌대상이 되다 보니까 남은 게이트는 주로 도시 외곽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깝다고 하더라도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 할 정도.
‘나도 차 한 대 사야하나.’
면허는 이미 딴지 오래다. 예전이라면 차가 없어서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B랭크 헌터라 자동차 정도는 쉽게 살 수 있었다. 확실히 개인 승용차가 있다면 게이트로 오가는데 상당히 편할 것 같았다.
현찬은 무슨 차를 살지 고민하며 헤르메스의 힘을 <대여>했다.
탈라리아.
헤르메스가 사용하는 하늘을 나는 신발. 현찬의 신발에 날개가 생겨나며 현찬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탈라리아를 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고 현찬은 빠른 속도로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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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인가.”
끊임없이 회전하는 나선의 푸른 문을 보며 현찬은 자신이 맞게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B랭크 1인용 게이트 <환영굴>
현찬이 처음으로 도전하는 B랭크 게이트였다.
“가 볼까.”
현찬은 망설임 없이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스치는 기묘한 감각.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몇 번이고 느꼈던 부하 현상이 몸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빠르게 적응되었고 현찬은 움직이는데 별 다른 지장이 없는지 몸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는 만전. 컨디션도 괜찮다.
스르릉.
허리춤에 걸어놓은 검을 뽑는다.
현찬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환영굴은 다른 게이트와 다르게 거대한 건물 내부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의 성을 보는 것 같지만 천장과 벽이 모두 거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독특했다.
사방에서 수백 명의 현찬이 모습을 비춰온다. 하지만 현찬은 안다. 이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 중에서 대부분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보라색과 푸른색의 조명이 어우러진 장소. 그곳에 비추는 수백 개의 거울. 마치 장소가 무한히 증폭되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현찬은 그런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고 몸을 긴장시키며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다.
[온다.]
캬아악!
헤르메스의 경고와 동시에 현찬의 왼쪽 유리에서 거울에 비친 현찬의 모습이 악귀처럼 변하더니 거울에서 튀어나와 현찬에게 달려들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현찬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몬스터의 이빨을 피했다.
환상굴의 6등급 몬스터 미러 비스트(Mirror Beast).
놈들은 거울 속에서 서식하며 자신들의 구역에 상대방이 나타나면 그 모습을 본따 방심을 유도한 후 갑작스레 튀어나와 잡아먹는 습성을 지녔다.
지금 현찬에게 달려든 거울속의 현찬 또한 바로 이 몬스터였던 것.
현찬은 뒤로 살짝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덜미가 물어 뜯겼을 상황! 현찬은 당황하지 않고 손에 쥔 검을 쥐어 그대로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놈들은 거울 밖으로 튀어나올 경우에 원래 전투 능력보다 상당히 힘이 감소한다. 놈들의 강점은 상대를 방심시킨 후 날리는 불의의 일격. 그것이 빗나간 이상 미러 비스트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봐도 좋았다.
푹!
키이익!
현찬은 비록 악귀처럼 변모했지만 자신을 닮은 몬스터를 죽인다는 감각에 조금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소리를 들은 녀석들이 이쪽을 향해 대거로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분명 현찬은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데 거울에 무수히 비춰 보이는 현찬의 모습 중에서 몇몇은 거울의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헤르메스. 이번에는 내 힘으로 계약을 맺을게.”
[좋아. 그래도 정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내가 나설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현찬은 정신을 집중하여 마력을 움직였다.
스킬.
[계약(contract)]
본디 계약이란 헤르메스가 주로 주관하던 부분이었다. 달인급에서 영웅급까지, 가능하다면 신급 영령까지 부를 수 있는 것도 다 헤르메스가 중간에서 중계를 해 주며 다리를 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기에 현찬은 이번에 헤르메스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계약을 하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계약 스킬을 발동시키자 현찬과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영령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현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자들. 평범한 인간은 그 곁에 있더라도 존재를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현찬은 전부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다른 이들이 전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담았다.
‘이번에 혼자 계약하는 영령은 왕급이다.’
달인급은 이제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기에 그 다음 목표는 왕급 영령. 영웅급 영령은 아직 현찬의 실력이 닿지 않아서 헤르메스의 도움이 필요로 했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왕급이어도 영령은 충분히 강하니까.
왕급 영령 중에서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영령이 필요로 했다.
‘역시. 아직 위대한 왕들은 나타나지 않는 건가.’
현찬에게 신호를 보내는 왕들은 대부분 역사 속에 존재하는 왕들. 그 중에서 한반도 땅에서 나고 자란 자들이 꽤나 많았다. 그 중에서 현찬의 관심을 한 번에 받는 존재가 있었다.
다른 왕급 영령들과 비교해도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영.
그것에 이끌린 현찬은 계약을 이행했다.
계약은 상호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현찬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건네고 자신과 함께 적들을 무찌를지 물어본다.
[좋다. 나 또한, 바라던 바였기에 그대를 찾아왔으니.]
‘됐어!’
상대 영령의 허락을 받았기에 계약이 성립되었다.
현찬의 몸을 타고 엄청난 힘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미러 비스트들도 느꼈는지 현찬을 둘러싼 상태로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도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다른 왕급 영령들 중에서도 확연히 그 존재감을 드러낸 왕.
지금으로부터 1500년이 넘는 먼 과거.
한반도 이북의 땅을 지배하던 위대한 나라 고구려를 이끌었던 왕.
한반도 역사상 그 어떠한 왕보다 오랫동안 재위를 하며 끝없는 정복을 펼쳤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한 고구려의 왕.
장수왕(長壽王).
장수왕의 힘을 빌린 현찬은 검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헤라클레스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했지만, 지금까지 현찬 스스로가 계약을 맺었던 그 어떠한 영령보다 강대한 영령이었다.
이거라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용기.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하찮은 지상의 이물, 내 앞에서는 그저 한낱 도깨비에 불과하지. 가세나. 계약자여.]
“좋습니다!”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짓는 현찬이 미러 비스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