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14화 (14/265)

# 14

14화 제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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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두 분의 제안은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네? 어째서죠?”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요.”

갑자기 찾아와서 수백억이나 되는 계약금 이야기를 꺼내므로 현찬에게 있어서 조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분명히 좋은 조건이다. 그 누구라도 입을 떡 벌리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기원 실장과 이한율 헌터는 그만큼 현찬을 높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현찬은 막상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이왕 헌터가 된 김에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고 싶었다. 헤르메스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어느 클랜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에 현찬이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랐다면 어딘가에 속하겠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힘을 가진 자신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클랜이나 협회에 속한다면 오히려 방해될 것만 같았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서 높은 산을 정복하고 싶은 욕심.

남자로 태어났으니 한 번 정도는 정말 멋지게 살아가고픈 바람.

물론 이것은 그저 꿈일 뿐이다.

하지만 막상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이라고 하심은…… 혹시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런가요.”

정기원 실장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의 말대로 현찬은 자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결국에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클랜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클랜이라는 것도 결국 운영을 하고 클랜원들을 모으며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그것을 전부 잘 해낼 거라는 자신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일단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네요.”

그 말에 이한율 헌터와 정기원 실장은 무언가 다급함을 느꼈다. 설마 상대가 저렇게나 초탈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다른 클랜에서 채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정보를 빨리 얻었지만 완전한 은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다른 어지간한 클랜의 귀에는 이미 현찬의 정보가 들어갔으리라.

지금이야 현찬이 클랜이나 어딘가에 소속될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른다. 현찬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다른 클랜으로 가버린다면 이 둘의 입장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꼴이 될 테니까.

정기원 실장은 결국 본격적으로 설득을 나서기로 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계약자가 바란다면야 당연히 도와줘야지. 게다가 나 또한 저자에게 관심이 있으니 말일세.]

정기원 실장 또한 영령과 계약을 맺은 각성자. 지금은 은퇴해서 협회의 실장직을 맡고 있지만, 그는 왕년에 B랭크 까지 갔던 나름대로 실력 있는 헌터였다.

“강현찬 헌터 님.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정기원 실장은 영령의 힘을 <대여>했다.

‘이 아저씨. 진짜 본격적으로 할 생각인가 본데?’

이한율 헌터도 정기원 실장과 조금 안면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가 지금 영령의 힘을 끌어내서 강현찬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기원 실장이 계약을 맺은 영령은 바로 이런 쪽으로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급 영령 <서희>

고려의 이 문신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거란군의 소손녕을 상대로 외교 담판을 벌여 ‘강동 6주’의 땅을 돌려받은 고려의 영웅!

타고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기도 한 그는 뛰어난 협상과 외교의 실력을 지녔으며 누구보다도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런 서희의 힘을 얻은 정기원의 협상력과 설득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서희는 전투 계열의 영령이 아니었음에도 헌터 협회의 실장이라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서희까지 꺼냈으면 진짜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넘어갈 텐데?’

이한율은 다급해졌다. 설마 서희의 힘까지 빌려서라도 강현을 직접 데리고 가려고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서희의 힘은 대단했다. 황룡 클랜이 객관적으로 봐도 더 좋은 조건을 내건다고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만들어 버리니까.

이는 약간 반칙 행동이었지만 이한율은 정기원에게 그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애초에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걸리지만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라도 영입이 가능한 것이 협회와 클랜 간에 맺어진 일종의 불문율이었으니까.

물론 현찬 또한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정기원 실장이 무언가 하려고 한다는 것을.

‘흠? 이 분. 뭔가 하시는 거 같은데?’

[과연. 현찬이 너도 감이 좋구나? 지금 저 사람, 영령의 힘을 대여했어.]

‘영령의 힘을 대여했다고?’

[그래. 심지어 그것도 협상에 도가 튼 사람이야. 아마 어지간한 사람들은 저 영령에게 별다른 말도 못 해보고 휘말릴걸? 설마 저 정도나 되는 영령이 존재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살아있을 적에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

‘그래?’

확실히 현찬은 지금 말을 꺼내는 정기원 실장에게 무언가 끌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분명히 평범한 말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찬은 자신이 쉽게 설득 당할 거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듬직한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참. 이렇게까지 장대한 도발을 받으면 넘어가 줄 수가 없잖아.]

서희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다.

창도 칼도 사용하지 않고서 말만으로 상대 병력을 물러나게 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얻었으니까. 괜히 서희의 담판이라고 역사책에 실린 것이 아니었다. 현대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 영령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헤르메스는 모든 떠돌이들의 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떠돌이는 여행자, 도둑, 상인, 목동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헤르메스가 관장하는 분야는 매우 방대하고 거대하다.

그중에서 당연히 협상 또한 포함된 것이다.

어디 협상뿐인가. 웅변, 외교, 정보의 전달, 언어, 작문까지 다룬다.

지혜롭고 속임수에 능하며 말재주가 뛰어나고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것은 헤르메스에게 있어서 일도 아니라는 소리.

서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협상의 귀재라면 헤르메스는 협상을 관장하는 신이다.

애초에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강현찬 헌터 님. 어떻습니까? 나중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혹여나 저희가 내 건 조건이 부족하다고 느끼셨다면 제 권한을 사용해서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역시 지금은 아니네요. 이미 마음을 정해서요. 그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현찬의 몸을 조금씩 잠식해나가던 미약한 기운은 이내 헤르메스의 힘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 이건.’

[…… 나의 기운이 먹히지 않는군.]

정기원 실장과 그의 영령인 서희는 당황했다. 설마 자신들의 능력이 담긴 설득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거로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협상에 능통했나?’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는 대부분 힘을 사용하는 경향이 컸지만, 그가 가진 재치나 기지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12개의 시련에서 지구를 받치던 아틀라스를 속인 것도 그렇고 아우게이아스의 가축우리를 청소할 때도 머리를 썼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계약자여. 상대의 영령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나로서는 대적할 수가 없을 것 같군. 나조차도 상대방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

‘당신마저 안 된다는 겁니까?’

정기원은 서희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서희의 입에서 안 되겠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로 현찬의 영령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헤라클레스가 뛰어나다고 해도 서희를 압도할 수는 없다. 뭐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건가?’

정기원은 의심했다. 어느 정도 먹히지 않는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오히려 서희가 압도당할 정도라면 현찬의 영령이 지닌 힘은 고작 헤라클레스 수준에서 끝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서 대놓고 ‘당신과 계약을 맺은 진짜 영령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헤라클레스일 가능성도 있었고 그런 예의 없는 행동에 정기원의 이미지만 깎아 먹는 짓이 되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비장의 한 수가 먹히지 않은 시점에서 정기원의 패배였다.

그가 순순히 물러날 의향을 보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이한율의 눈에 이채를 띄었다.

‘와. 기원 아저씨의 설득까지 견뎌냈다고? 더 탐이 나잖아!’

어지간한 영령을 가진 자라도 정기원이 서희의 힘까지 끌어다 써서 협상을 주도하면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헌터 협회가 뛰어난 인재들을 데려가게 된 것도 그의 공이 컸다. 내로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정기원 실장의 말에 홀랑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정기원의 설득을 견뎌낸 현찬에게 이한율은 더욱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무리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중에 반드시 기회를 잡기로 했다.

‘강현찬이라고 했지? 반드시 기억해 두겠어!’

그렇게 현찬을 향한 스카우트는 둘의 포기로 넘어가게 됐다.

“아 참. 그보다 강현찬 헌터 님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기간테스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큰 피해를 볼 뻔했는데 강현찬 헌터 님의 덕분에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가게 된 것에 관해 정부의 감사 표시입니다.”

“보상금이요? 얼마인데요?”

“흠. A랭크 몬스터인 기간테스 3마리. 그것도 시신의 훼손은 머리를 제외하고 거의 없다시피 해서 보존이 잘돼 있고 마석도 셋 다 고순도의 마석을 가지고 있어서…… 아마 금액으로 따지면 30억 정도는 될 겁니다.”

“…… 엄청나네요.”

현찬은 평온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30억이라니. 알바 뛰면서 한 달에 80만 원을 받았을 때도 정말 큰 액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억이란다. 뭔가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자괴감 들었다.

“물론 세금으로 꽤 많이 나갈 겁니다.”

“세금이라. 그렇겠죠. 얼마나 나가죠?”

“소득이 5억 원이 넘어가면 소득세를 42%로 내야 합니다. 다만 헌터들의 경우에는 조금 더 혜택이 있기 때문에 30%로 줄여주죠.”

그렇다 해도 30억의 30%라면 9억 원이다. 세금 하나로 9억 원이나 되는 큰돈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현찬이라도 속이 조금은 쓰렸다.

“헌터 협회로 오신다면 세금 면제입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계약서를 써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뇨. 거기까지는 괜찮네요.”

정기원의 날카로운 타이밍을 가볍게 막아내며 현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21억을 벌었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큰돈이지 않은가.

이거라면 현찬의 집안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서서 부모님을 평생 일 안 하고 편하게 모실 수 있었다.

“그렇다면 21억은 바로 계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고맙죠.”

간단한 절차를 마치자 현찬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은행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 문자였다. 이한율 헌터와 정기원 실장이 떠나고 나서야 현찬은 스마트 폰으로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입금 금액]

[2,100,000,000]

액수가 딱 이렇게 나와 있었다.

‘와, 0이 대체 몇 개냐.’

지금까지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 없는 액수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현찬은 그제야 자신이 이제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나도 이제…… 헌터로구나.’

[그럼. 현찬이 네가 헌터가 아니면 뭔데?]

‘그냥. 아직 실감이 안 돼서. 내 마음은 여전히 예전의 강현찬에 머물러 있는데 지금 사는 현실은 다르잖아? 그냥 그게 좀……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느껴져. 오히려 지금의 내가 적응이 안 돼.’

평범하게 알바 하며 돈을 벌거나 대학 생활을 보내던 과거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찬은 하루만에 21억이라는 돈을 벌어들였다.

이것이 주는 괴리감은 상당히 컸다. 헤르메스도 그런 현찬의 혼란함을 느꼈는지 부드러운 미성으로 말했다.

[너희 인간들은 환경이 바뀌거나 세월의 흐름이 민감하지.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살아가는 시간이 매우 짧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적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너희 인간이야. 너는 그대로 멈추고 싶어?]

“…… 아니.”

헤르메스의 충고는 현찬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 결국엔 그렇게 바라던 헌터가 되었다. 여기서 오히려 당황하면 뭐가 되겠는가.

‘나는 이제 앞으로 더 나아갈 거야.’

그리고 세계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뛰어난 헌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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