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7화 각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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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계약자. 아니, 이제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됐으니 이름으로 불러야겠네. 그래도 되지?]
“어, 그래.”
[현찬아. 앞으로 뭘 할 생각이야?]
“앞으로 뭘 할 생각이라니.”
일단 당연히 헌터로서 먹고 살아야지 않겠는가. 솔직히 처음에는 헌터로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와 계약을 맺은 헤르메스와 함께라면 내 본연의 적성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헌터로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테니까.
“맞다. 헤르메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원래 영령은 한 사람에게 한 명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달랐다. 헤르메스와 계약을 했음에도 아폴론이 내 몸에 들어왔으니까. 즉, 한 사람의 몸에 두 명이나 되는 영령이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리다.
이건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보통 ‘1인 1영령’이라는 공식은 기초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영령은 그 상식을 아주 가볍게 깨부쉈다.
[그게 궁금해?]
“당연하지. 우리는 지금 상식을 파괴한 거라고!”
[그 상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들이 일부의 지식만을 이용해 만든 산물일 뿐이야. 잊었어? 내가 무슨 신인지?]
“어, 분명히 도둑, 상인, 전령의 신이고…… 그리고…… 아!”
계약의 신!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계약의 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네. 맞아. 나는 계약의 신이야. 즉 내가 원한다면 너는 주인이 없는 다른 영령들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소리지.]
“뭐? 정말?”
[한 사람당 한 명의 영령만 두는 것은 보통은 그 영령이 고집이 강해서 그런 거야. 생각해봐. 기껏 하계에 내려와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인재와 함께하는데 다른 불청객이 찾아온다면 어떻겠어?]
“그게 그렇게 싫어할 일인가?”
[흠. 너희들로 치자면, 자기 이상형인 애인과 함께 한집에서 동거중인데 다른 사람이 집에 방문을 한 셈이지.]
“헉!”
생각해보니 엄청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가 없어.
아니, 그렇게 따지면 헤르메스 너는 뭐가 되는 건데?
[나는 워낙 배려심이 깊으니까 양보야 해 줄 수 있지. 그런데 다른 영령들은 그게 힘들 거야. 그래도 나름 생전 영웅이라고 불리던 놈들이니까 자존심이 상당히 높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1인 1영령 체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영령과 그 계약자 간의 동질성 때문이기도 해.]
“동질성?”
[보통 영령은 아무하고 계약을 맺지 않아. 자신과 매우 비슷하고 가까운 존재와 계약을 맺거든. 그 성녀였나? <잔 다르크>랑 계약을 맺은 얘가 있었잖아. 그것은 그 여자의 성향이 영령과 아주 흡사하고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그래도 다중 계약이 안 된다고?”
[너 같으면 천생연분이랑 같이 지낼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한테 흥미만 있다고 하는 애랑 같이 지낼래?]
“…… 그러네.”
그보다 역시 헤르메스라는 건가. 무슨 말을 이렇게 잘 하는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잖아.
[뭐, 그런 이유로…… 대부분은 한 사람은 하나의 영령과 계약을 맺는 거야.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나는 신이고, 그것도 계약의 신이야. 계약자인 현찬이 네가 원한다면 어느 누구와도 계약을 맺을 수 있어. 아, 물론…… 상대 영령이 동의를 해야 하지만.]
“…….”
조건부가 붙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사기잖아! 한 사람이 여러 영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만 해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미 계약을 맺은 영령은 무려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
같은 신급 영령이라도 인지도적인 면에서 조금 더 상위라는 소리였다.
그런 영령과 계약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하늘을 향해 백 번 절해도 부족한 마당에 다른 영령과 추가로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이게 대박이 아니면 뭐겠는가.
[물론, 계약을 맺을 때에는 먼저 계약할 영령의 속마음이 중요하지. 아무리 네가 하고 싶다고 해도 그쪽에서 싫다고 하면 기본적인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
“어, 그러면 대부분 계약을 못 하는 거 아닌가?”
[후후. 잊었어? 친구? 나는 계약의 신이라고? 영령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계약을 준비하면 녀석들이 과연 안 오고 배길까?]
그렇게 말을 하는 헤르메스는 어딘가 매우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현찬이 너는 그 상태로는 절대로 다른 영령과 계약 못 해.]
“어, 어?”
[일단 기본적으로 신체의 내구도는 튼튼하지만 영령을 부를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마력의 양이 턱 없이 부족해. 내가 영령을 계약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영령을 부리기 위해서도 마력이 많이 필요하고.]
“요컨대 마력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는 거네?”
[그렇지. 마력만 많으면 나와 같은 신급 영령을 불러서 <빙의>를 해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마력이 적으면 어떻게 되는지 지금 겪고 있어서 알겠지?]
알다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온 몸이 짜릿하게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인데. 당연히 모를 리가 있나.
그보다 마력을 올려야 한다니 결국 사냥이 답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 세상이 변하면서 신기하게도 각성자들은 레벨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게이트를 통해 나온 몬스터들을 사냥하면 경험치가 쌓이고 그리고 레벨이 오르는 것이다.
레벨이 오르면 당연히 전체적인 스텟이 증가한다. 특히나 마력이.
보통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이 사냥을 통한 스텟 증가가 주요인이다.
즉 이거다.
헤르메스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령과 제대로 계약을 맺어서 그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레벨을 올려서 스텟을 높여야 한다는 것.
“아니 그러면 아폴론님은 어떻게 부른 건데? 내 마력이 부족함에도 <빙의>까지 사용했잖아?”
[아, 그거? 그거야 당연히 야매 계약을 이용한 거지.]
“야매라고?”
[일단 아폴론은 나랑 친한 형이거든. 예전부터 사이좋게 지내서 그런지 내가 부탁을 하면 줄곧 잘 들어주고는 했어. 그래서 내가 직접 부탁을 함으로서 계약이 맺어진 거지.]
“잠깐만. 그렇게 불러도 마력이 부족하면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
[물론 그렇지. 특히나 현찬이 네 마력으로는 왕급 영령도 부르기 힘들 정도니까. 하지만 아폴론 형은 논외야. 신이라고. 당연히 <빙의> 상태에서 싸워도 주로 사용하는 것은 형이 가진 힘이 대부분이니까 네 마력과 큰 영향이 없지.]
물론, 다른 영령들은 그게 안 된다고 한다.
[보통 영령은 자신이 가진 힘을 소모할 정도는 아니지. 아폴론 형은 자신이 가진 힘이 워낙 방대해서 그 정도 소모한 것은 기별도 안 가니까 그런 거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다. 즉, 태양이야 말로 아폴론의 힘 그 자체. 특히나 헬리오스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게 되면서 아폴론의 지분율이 매우 증가했으니 그가 가진 힘이 대체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아무튼, 열심히 노력하길 바랄게. 현찬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나에게도 모처럼의 기회가 생겼다.
이런 기회를 가만히 놔둘 수 있을 리가 없지.
노력?
당연히 할 거다. 내가 부족한 만큼, 내가 모자란 만큼.
그것 이상으로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반드시 이루고 말리라.
모두가 우러러보는 헌터가 되고 말겠어.
내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병실의 방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꽤 커다란 문도 아주 좁게 느껴질 정도의 거구의 덩치를 지닌 강윤이었다. 녀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형! 무사했군요!”
“으악! 야! 강윤아! 스톱! 스톱! 아파! 나 지금 몸 아프니까!”
끄아아아!
저 곰 같은 녀석이 좋다고 껴안으니까 안 그래도 후유증으로 쑤신 전신이 그야말로 산산이 조각나는 유리처럼 부서지는 것 같다. 왜, 그 소설에서 비슷한 묘사가 나오지 않는가. 온몸이 마치 파편처럼 흩어지는 것 같다고.
이게 딱 그거였다.
“아! 미안해요, 형! 제가 워낙 반가워서 그만.”
“끄응. 그래. 괜찮다 괜찮아. 모르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이놈은 참 덩치는 곰 같으면서 어쩜 이렇게 순박한지. 도저히 <삼손>과 계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전설 속의 <삼손>은 그야말로 둔하면서 다혈질이고 매우 폭력적인 사내였으니까.
그보다 나를 찾아온 손님은 강윤뿐만 아니었다. 한 명 더 있었다.
“어, 음. 서다은 씨?”
성녀 <잔 다르크>의 계약자인 서다은. 그녀가 강윤과 함께 내 병실을 찾아온 것이다.
“편하게 다은이라고 불러도 돼요. 저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어? 어, 응.”
그녀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말투에서는 뭔가 친근감이 약간 느껴졌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쉽게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경우가 몇 없는 거로 알고 있다.
“어, 음. 강윤이는 그렇다 쳐도 다은 씨……가 아니라 다은이는 여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저도 오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응?”
고맙다는 말을 전하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바라보자 다은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때, 통로에서 오빠가 아니었다면 저는 제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채 그 괴물들에게 크게 당했을 거예요. 그것뿐만 아니에요. 오빠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저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감사하려고 찾아온 거고요.”
“어, 그러……니?”
“네. 그러니, 정말 고마웠어요. 오빠.”
다은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 늘 무표정한 그녀가 저렇게 자그마한 미소를 짓는 것뿐이었음에도 주변에 광명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 여자 보기를 돌처럼 보는 강윤이 녀석조차 얼굴을 붉히며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으니 오죽하랴.
[……저건 또 뭐야. 왜 남의 계약자에게 꼬리 쳐?]
그런데 헤르메스는 뭔가 불편한지 짜증 어린 목소리다. 흠? 내가 아는 헤르메스라면 성격상 다은이의 외모 때문에 오히려 호감을 느낄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네.
그렇게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윤이야 나랑 훈련을 받을 때부터 자주 붙어 다녀서 그렇지만 다은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외모와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투른 사람이었고, 그리고 강인하고 도도해 보이는 기세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철벽의 여제이자 얼음 공주라고 불리던 서다은이, 사실은 감정 표현이 서투른 여자였다니!
뭔가 허무하면서도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가 뜸해졌을 무렵 다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응? 약속이라도 있었어?”
“예. 교관님께서 있다가 만나자고 하셨거든요.”
“교관님이?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이번에 있었던 사고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빛의 영령 있잖아요.”
그 말에 나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지만, 다은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아카데미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 빛의 영령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들 눈에 불을 켜고서 찾으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또 <잔 다르크>의 계약자다 보니까 혹시 제가 한 게 아니냐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래도 그거 때문에 부른 거 같아요.”
“어, 그래? 그러면 뭐 가 봐야지.”
“네. 오빠. 다음에 봬요.”
“그래. 잘 가.”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고 다은이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나는 지금 상황이 조금 심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지? 소문이 쫙 난 거 같은데?”
[왜? 오히려 너에게 좋은 거 아니야?]
“좋다니, 아직 나는 F랭크라고. 게다가 아폴론 님을 부른 것은 순전히 네 덕분이었잖아. 그건 내 실력이 아니었어.”
[그게 어때서?]
“만약에 내가 내 힘으로 아폴론 님을 불렀다면야 나에게 있어서 좋겠지만, 이건 내 힘이 아니야. 생각해봐. 만약에 여기서 내가 정체를 밝히고 다른 클랜에 들어갔는데, 막상 아폴론 님을 불러내지 못한다면?”
[그러네. 개쪽을 당하겠어.]
“그것뿐만 아니라 헌터 업계에서 매장당할걸? 사기꾼이라고? 아, 애초에 그게 나라는 것을 증명할 방도도 없구나.”
차라리 잘 됐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진실을 묻는 것이 최고였다.
언젠가 신급 영령을 불러낼 정도로 강해진다면 그때는 밝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저, 형…….”
그때 강윤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뭔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낌새다.
애는 왜 눈치를 보고 그래? 여기 이 방에는 나랑 자기 단둘뿐이면서.
“왜, 강윤아?”
“그, 그게…….”
“야. 뭘 망설이고 그래. 시원하게 말 해봐.”
내가 보채자 강윤은 결심을 했는지 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형이 그 빛의 주인 맞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