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아카데미 (3)
_
“맙소사.”
“저, 저건 대체 뭐야?”
“다들 빨리 ‘문’으로 대피해!”
교관의 명령에 모두 황급히 ‘문’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닫힌 ‘문’을 다시 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뒤에서 쫓아오는 녀석이 가만히 기다려 줄지가 문제였다.
게다가 괴물 녀석이 다가오면서 지면이 크게 진동했고 사람들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누가 저놈 좀 막아봐!”
“저걸 어떻게 막아! A랭크 헌터가 10명이 오더라도 저건 못 잡는다고!”
“이런 썅! 문은 언제 열리는 건데!”
“열리는데 딜레이가 있어! 최대한 시간이라도 끌어! 저놈이 접근하면 다 죽는다!”
전투 계열 교관 중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몇몇이 강력한 화력의 기술을 뿜어냈다. 거대한 화염이 터져 나오고 번개가 몰아치며 거대 괴물에게 직격했지만 놈은 잠시 몸을 멈칫했을 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런 미친! 이 공격에도 끄떡 안 한다고?”
“피해를 줄 생각은 버려! 최대한 움직임을 막는데 치중한다! 빙결계 마법 위주로 써!”
“다른 잡몹들도 제거해야 해! 각자 최대한 영령의 힘까지 쥐어 짜!”
아직 남아있는 촉수 괴물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에게 여럿이 달려들었다. 도망가기는 무리라 판단해서 검을 들고 맞서 싸웠다. 일단 견제만 하면서 뒤로 뺄 생각이었다.
쿠워어어어!!
거대한 놈은 자신보다 작은 존재들이 반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대한 다리를 위로 짓쳐들더니 이내 바닥을 쿵! 하고 찍었다. 촤아악! 단순한 발 구르기일 뿐인데도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으아악!”
“꺅!”
그것은 순식간에 주변을 집어 삼키며 도망치려던 사람들을 풍압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 심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몇몇 예비 헌터들은 지나치게 큰 공포 때문인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기까지 했다.
거대 괴물은 이 혼란을 기회로 삼았는지 이쪽을 향해 그 거대한 몸집을 옮기고 있었다.
재앙이 다가온다.
큰일이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변했다.
이대로 간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 것이다.
그 대상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이 되겠지. 조금 전이야 그래도 내 선에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도망치는 게 옳다.
당장 등을 돌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내 발은 떨어질 줄 몰랐다.
공포 탓에 이성이 마비된 것이 아니다. 내 양심이 저들을 버리고 떠나려는 것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8주간 힘든 훈련을 거치면서 서로 얼굴도 익히고 나름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쿠워어어어!
괴물이 다가온다. 녀석의 얼굴을 모르지만 놈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겠지. 녀석이 지나가는 길에 내가 서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계약자. 어서 도망치자. 이대로는 위험해!]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 정말로 할 거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애타게 외친다. 아마 강윤이 녀석이겠지.
갑자기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격하면서 자신의 표현이 서투르시던 아버지.
언제나 장남이었던 나를 챙겨 주시며 나의 편을 들어주시던 어머니.
철없지만 밝게 웃으며 나와 장난을 주고받던 내 동생.
막막한 미래에 서로 걱정하면서도 격려해주던 친구들.
전부.
이제 보지 못하는 거려나.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자신을 여기서 증명해 보이겠다.
어차피 도망쳐도 저 괴물에게 따라 잡혀 죽을 거 최대한 멋지게 발악이라도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푸하하하하하하하!]
그런 나의 기분을 확 다운시키는 것은 나와 계약을 맺은 페네오스의 웃음소리였다.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왜 웃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정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잖아? 도망쳐야 할 상황인데도 도망치지 않고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과 싸우려고 들다니 말이야. 뭐, 네 말대로 도망쳐도 녀석에게 붙잡혀 죽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말이지.]
‘…… 그게 왜 웃긴데.’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왔다.
[워워.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마. 내가 이렇게 웃은 것은 계약자인 너의 모습이 우스워서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거야. ‘이 세상에는 아직도 <영웅>이 남아있구나’라는 안도?]
‘뭐?’
내 의문을 무시하며 페네오스는 말을 이었다.
[원래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내 정체를 알려주거나 힘을 제대로 빌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너는 달랐어. 지난 2달간 네가 한 노력과 그 의지. 아주 잘 봤다.]
페네오스가 갑자기 하는 말은 내가 순간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체? 힘을 제대로 빌려주지 않아? 자격?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넌 나를 속인 거야?
아니 그보다.
페네오스 너, 정체가 대체 뭐야?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기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형 소개해줄게. 예전에 날 좀 많이 혼냈지만 사이좋게 지내는 형이야.]
‘뭐? 지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영령이 누굴 소개 시켜 주고말고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런데 있더라고. 이 자리에 말이지.]
만약 페네오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녀석은 아마 엄청나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형. 도와줘.]
페네오스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그리고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동생이 도와 달라니 당연히 도와줘야지.]
아름다운 미성인 페네오스와 다른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매우 기품 있고 늠름했으며 온몸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번쩍! 촤아악!
그리고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주변을 집어 삼키며 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내 안에서 무한한 힘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이 빛, 이 따스함, 이 기운.
낯설지 않았다.
그래.
어디서 느껴본 적이 있다 했더니 그거다.
태양.
이것은 분명히 태양의 빛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설마……?!
[나 태양의 신 아폴론(Apollon)이 이 자리에서 너를 돕겠노라!]
그리고 내 몸을 중심으로 빛이 터져 나왔다.
&
최현호 교관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맙소사. 저건 대체 뭐야?”
빛.
거대한 빛이다.
그것도 이 주변 일대를 찬란하게 비추며 온기를 전수하는 빛.
그것이 강렬한 열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모두 불태우고 있었다.
“대, 대체 누구지?”
저 정도의 영령을 그것도 <빙의> 수준으로 불러낸 자가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엄청난 영령을 불렀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빛의 구체에 휩싸여 있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빛은 점차 더 강해지고 있었다.
“크윽!”
최현호 교관은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것은 현찬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페네오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이긴. 즉, 계약자 너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이야기야.]
“뭐?!”
[정식으로 소개할게.]
페네오스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를 싹 지우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올림포스의 12신. 그중에서 한 자리를 맡은 헤르메스라고 한다. 모든 도둑과 여행자, 상인…… 그리고 계약의 신이기도 하지.]
“……!!”
헤르메스!
현찬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페네오스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의 대사가 떠올랐다.
소몰이하고 악기를 다룰 줄 안다. 이는 헤르메스가 한때 50마리의 소를 도둑질했으며 아폴론을 상대로 악기를 만들어 준 일화가 아니었던가.
페네오스(Pheneos)라는 것은 헤르메스를 숭배하는 도시의 중심지였다.
현찬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꽝 카드를 뽑은 것이 아니었다.
달인급 영령? 아니, 헤르메스는 그 수준이 아니다.
모든 등급의 영령 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뽑힌다는 신급 영령.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인지도가 아주 높은 그리스 신화의 주신 중 하나.
그게 바로 헤르메스였다.
[그리고 역시 형 좋은 게 최고야.]
[내 귀여운 동생아. 이 주변에 보이는 저 기괴한 존재들을 없애면 되는 것이냐?]
[응. 형. 부탁해. 나는 싸움에는 영 젬병이라서.]
[흠. 신이나 되는 네가 저런 녀석들을 상대하지 못할 리는 없겠지만, 뭐 우리 귀여운 동생이 도와달라고 부탁하니 내 직접 나서주마.]
[고마워 형.]
현찬의 몸에 직접 빙의한 아폴론은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에 뜨거운 열기를 품은 빛이 모인다 하고 싶더니 그 빛은 산산조각이 나며 주변으로 수천, 수만 갈래로 갈라져 몬스터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아폴론은 주관하는 분야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의학, 음악 등을 자주 떠올리지만 빼먹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궁술.
태양의 신 아폴론은 여동생 아르테미스와 함께 궁술을 주관하는 신이라는 것이었다.
쏴아아아!
허공에 갈라진 빛줄기들은 그 모습이 화살로 변하며 심연의 몬스터들을 향해 무차별로 쏘아졌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천 발의 화살 세례!
온 시야가 새하얗게 물든다 하고 싶더니 인지조차 하기 어려운 빛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단 한 발의 화살을 맞았을 뿐인데도 심연의 몬스터는 화살을 맞은 부위로부터 새하얀 불길이 일어나 그 몸을 순식간에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 수가 무려 수백.
개미 떼처럼 몰려오던 자그마한 촉수를 단 괴물들이 단 일격으로 전멸당한 것이다.
“으으! 내 눈!”
“앞이 안 보여!”
정작 주변의 모든 헌터들은 아폴론의 등장과 함께 강림한 강렬한 태양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쿠워어어!
거대 괴수는 온몸에 태양의 화살을 수백 발이나 맞았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다만 그 거대한 촉수는 숯이 돼서 바스러졌고 몸 곳곳이 녹아내린 흔적을 보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가진바 흉포한 기운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으며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육신이 재생을 시도하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덩치가 크다 보니 상당히 튼튼하군.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아폴론은 제대로 한 방을 먹이기 위해서 조금 더 힘을 쓰기로 했다.
화르륵!
아폴론의 몸 주위로 뜨거운 불길이 일렁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더니 아폴론의 몸 주위를 감싸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마차. 그리고 마차를 이끄는 네 마리의 말들.
피로이스(Pyrois)
에오스(Eos)
아이톤(Aethon)
플레곤(Phlegon)
그 말들과 하나로 이어진 것은 바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을 형상화했다고 전해지는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
그 지고의 신물이 이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현찬의 몸을 빌린 아폴론이 마차의 고삐를 쥐었다. 뜨거운 태양의 불길을 내뿜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단순히 그 행동만으로도 주변 기온이 훌쩍 증가했다.
뜨거운 열 때문에 대기가 일렁이고 강현이 서 있는 지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읏! 뜨거워.”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야?!”
“너무 눈부셔서 뭘 볼 수가 없어!”
주변에서 모여 있던 헌터들이 모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갈 경우 무언가에 휘말릴 거라는 걸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간다!]
히히이이잉!
아폴론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돌진했다. 괴물은 몸의 촉수를 뻗어서 응수하려고 했지만 촉수는 마차에 다가오기도 전에 고열에 불에 타 스러져갔다. 그 직후 태양 마차가 새하얀 빛 한 줄기를 만들며 괴물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크워어어!
그것만으로도 괴물의 몸 절반에 날아갔다. 그것도 마치 증발하듯이 깔끔하게 신체의 파편조차 남기지 않고. 하지만 그런데도 괴물은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섰다. 몸의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죽지 않다니 가공할 만한 생명력이다.
[좋아. 그렇게 버텨 줘야 이쪽도 할 맛이 나지!]
‘아, 아폴론 님?!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하하하!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않겠나!]
틀렸어! 이 신님은 전혀 내 말을 듣지 않아!
현찬이 속으로 절규하자 헤르메스가 위로해 주었다.
[우리 형이 좀 흥이 오르면 앞뒤 못 가리는 스타일이라 그래.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아마 오랜만에 하계에 내려와서 지나치게 신난 것 같아.]
‘아니, 그러면 좀 말려 봐! 동생이라며!’
[저 정도 되면 나도 못 말려.]
그럴 거면 왜 불렀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이 그래도 좋아져서 그렇지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아폴론을 부르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을 테니까. 오히려 헤르메스에게 감사의 말을 100번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폴론은 재차 태양 마차를 몰아 괴물의 몸뚱이를 향해 돌진했다. 단순히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일직선으로 녹아내리고 뜨거운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다행이라면 아폴론이 마차를 훌륭하게 컨트롤해서 헌터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이다!]
아폴론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빛이 주변을 집어 삼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강렬한 빛 때문에 모두가 눈을 가렸다. 특히 가까이 있던 괴물은 거대한 육신이 그야말로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후우. 오랜만에 내려온 하계라서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는 점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뭐 만족스럽기는 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면 또 보자. 계약자.]
아폴론은 그 말을 남기고서, 강림을 해제하고 떠났다. 그리고 친절하게 현찬의 육신을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헌터들 근처에 떨어뜨려 주었다.
“…… 끝났다.”
현찬은 지금 겪은 일들이 믿기질 않았다. 사실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어, 어어?”
엄청난 탈력감과 피로가 현찬의 몸을 집어삼켰다.
결국, 현찬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