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덫과 사냥꾼 (4)
성현과 한승희는 요새의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굽이굽이 이어진 계단을 타고 내려간 그들은 꽤나 깊숙이 내려섰고, 한승희는 생각 이상의 깊이에 의아함을 표했다.
“뭘 이렇게 아래에까지 파 놨대. 원래 이런 곳이었어?”
“아니, 쓸 일이 있어서 직접 만들었지.”
길게 이어지던 계단을 모두 내려서자 벽돌로 되어 있는 꽤나 복잡한 통로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성현이 앞장서며 그녀를 안내했고, 곧 커다란 방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덜컹!
“여긴 뭐야?”
안으로 들어선 한승희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었다.
대체 여기 뜬금없이 불려 와서 놀라는 것만 몇 번째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커다란 공간을 통째로 뒤덮은 채, 검은 빛으로 발광하고 있는 ‘거대 마법진’.
그녀가 여태 봤던 것 중 가장 커다란 규모의 마법진이었고, 이는 성현이나 다른 헌터들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이걸 만드느라 고생 좀 했죠.”
그들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오던 네이아가 말을 거들었다.
이 정도로 놀라기엔 이 거대 마법진은 성현과 네이아가 짜 놓은 던전의 여러 마법진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런 마법진이 현재 각 거점마다 간격에 맞춰 놓여 있었고, 그 수를 합치면 무려 열 곳이 넘는 곳에 구축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서 있는 곳처럼 모든 마법진은 후반부 필드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런 걸 만들어놓은 거야?”
한승희가 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 규모의 마법진이라니, 무슨 꿍꿍이로 벌인 일인지 그녀로선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뭘 하긴. 간단해. 이 마법진들을 통해 곧 나타날 모든 몬스터와 악마종을 지구가 아닌 이곳 던전 안으로 끌어들일 거야. 강제로 말이지.”
“뭐……? 네 멋대로 끌고 올 거라고?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도와줄 사람도 있고.”
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곧 쏟아질 예정이라는 몬스터나 악마종의 규모가 한둘도 아니고, 과연 그런 게 가능할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성현의 이야기는 더없이 진지했기에 한승희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가능만 하다면 확실히 피해는 막을 수 있겠네. 일반 던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넓다곤 해도, 엄연히 한정된 공간인 만큼 처리하기도 쉬울 테고.”
“그렇지. 다만 문제는 쏟아진 몬스터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해. 그래서 이런 시설들을 마련해 놓은 거기도 하고.”
성현은 몬스터들을 바깥과 통하는 입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후반부 필드에 나타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실제 그를 노리고 마법진들의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한 결과, 끌어들인 몬스터들은 던전 마지막 필드 끝자락에서 쏟아질 예정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성현의 지시대로 놈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병력과 시설들은 각 길목에 위치하게 되었다.
거기다 각 군주와 마족을 포함한 주력 군단까지 대부분 바깥이 아닌 던전 안쪽에 모여 있었다.
평소 이지스의 본 길드원으로 활동하던 마족 수하들까지도 대부분 자리를 비운 채 싸움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야 대강 무슨 상황인지 아겠어. 그렇다면 길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던전 안에서 함께 싸워 달라는 거지? 놈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아니, 몬스터나 악마종들은 내 그림자 군단이 맡아서 처리할 거야. 숫자가 많긴 하겠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뭐?”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한승희가 당황했다.
그 많은 몬스터를 군단 자체의 힘만으로 틀어막을 작정이라니.
아니, 그럴 거면 애당초 자신을 이곳까지 부를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할 거라면 우리가 나설 것도 없지 않아?”
“전혀. 몬스터와 악마종이라고만 했지. 가디언들은 따로 손을 봐야해. 놈들은 차원조차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모든 힘을 회복하지도 않았던 두 번째 가디언만 해도, 멀쩡한 던전에 구멍을 뚫고서 서울로 빠져나가 난동을 부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당시 생겼던 던전의 통로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네이아의 마법진으로 감쪽같이 감춰져 있어 여태 누군가에게 들킬 일은 없었지만, 덕분에 하나뿐이었던 던전의 입구는 두 곳이 되어 있었다.
“놈들을 모두 이 던전으로 끌고 온다 해도 가디언이 있는 한 금방 밖으로 빠져나갈 뿐이지.”
“그럼 어떻게 하려고?”
“가디언은 아예 다른 장소로 격리시킬 거야. 그 뒤의 과정에서 너희의 힘이 꼭 필요하고.”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한승희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듣기 시작했다.
그는 일반적인 장소와는 다른 제 3의 공간에 가디언들을 격리시킬 작정이었고, 그런 뒤에 길드원들의 힘이 필요했다.
군단의 소환수들이 아닌, 성현과는 별개의 인간 헌터들의 힘이 필요한 순간.
대략적인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어. 그럼 바로 준비해 둘게.”
“그럼 부탁할게.”
우우우웅!
한승희의 바로 앞에 커다란 포탈이 생성되었고, 그녀를 서울 내의 길드 건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그녀가 포탈 너머로 사라진 뒤.
검은 안개가 성현의 주위를 휘감으며 흑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흐음,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성현의 곁에 나타난 프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다른 인간들의 도움이 굳이 필요가 없을 텐데… 왜 굳이 저들을 끌어들이는 거지?”
“만약을 대비해서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라는 법은 없잖아?”
“만약이라니?”
“그건 비밀이야.”
등을 돌린 성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항상 모든 것을 알려 주진 않는 만큼, 성현도 프리아에게 모든 걸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둘은 비즈니스 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었으니까.
스릉!
츠츠츠츠츳!
허리춤에서 꺼낸 성현의 칼날이 검게 물들었다.
성현의 마력과 그림자를 품어서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 그의 칼날에게서 느껴졌다.
공허로 가득 차 있던 차원의 틈 속에서 이루어졌던 그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힘이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누구가 날 이상한 공간에 몰아넣은 덕분이지.”
성현은 차원의 틈에 위치한 공허 속에서 차원을 다루는 개념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만 평생을 살던 필멸자로선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고 익숙해지기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특수한 공간에서의 훈련과 프리아의 도움을 받으며 개념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공허의 공간 속에서 차원의 개념을 익히기 위한 훈련은 그 안에서 생고생을 하며 함께 따라온 결과였을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과거의 모습보다 훨씬 뚜렷해진 프리아의 형체는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이는 공허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악몽의 괴수들을 쓰러뜨려 가며 성현이 프리아의 임시적인 육체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가디언의 침공을 저지할 이번 계획상, 갈루스와 같은 신격의 존재인 그녀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어쨌든, 슬슬 움직여 보자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최대한 준비해 두는 게 좋지.”
아직 지하 던전 내 마지막 필드의 공략이 끝나지 않은 상황.
안으로 들어갈수록 커지는 던전의 특성상, 마지막 20번째 필드는 굉장히 광활한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림자 군단의 전력이 공략에 나섰음에도 쉽사리 공략이 마쳐지지 않을 정도였다.
“기왕이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 편이 나을 테니까.”
한승희가 타고 간 포탈과는 또 다른 포탈이 그의 앞에 번쩍 생겨났고, 성현은 검을 움켜쥔 채 포탈을 건너갔다.
* * *
두 가디언이 주도할 대대적인 침공과 본격적인 싸움을 앞둔 상황.
남아있던 던전의 필드 공략에 박차를 가하던 성현은 자신까지 직접 나서며 이틀 동안 던전 공략을 완전히 끝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선 컨디션을 끌어 올리기 위해 집으로 올라와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성현이다.
띠링! 띠리링!
“윽……?”
상태창이 겹겹이 나타나며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에 성현이 붙였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난 그의 바로 곁엔 프리아가 곁을 맴돌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녀석들의 움직임이 느껴지는구나. 시작된 모양이다.”
“…벌써? 생각보다 빠르네.”
그녀의 말에 성현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차원의 틈 전역을 감시하듯 눈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번에 놈들이 벌이고 있는 짓은 워낙 규모가 큰 만큼 충분히 눈치채는 것이 가능했다.
덕분에 차원의 틈 사이를 주시하고 있던 프리아는 수상한 낌새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연 것이었다.
“넘어오는 데까지 남은 시간은?”“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다.”
“그렇단 말이지.”
파앗!
비스듬이 세워 둔 검을 집어든 성현은 나타난 포탈을 타고서 순식간에 지하 던전으로 건너갔다.
한발 먼저 손을 써야 하는 만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산맥 위에서 필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앞에 선 성현.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침착하게 계획대로만 풀린다면 간단하게 끝을 낼 수 있으니.”
“그렇겠지. 과연 계획대로 일이 풀릴지가 문제지만.”
속삭이는 프리아의 말에 성현이 대꾸했다.
다른 이가 보기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필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현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그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 군단에게 바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거대 마법진을 컨트롤하고 있는 네이아와의 지시 및 대화가 가장 많았다.
우우우우웅!
성현의 신호와 함께 일제히 빛나기 시작한 거대 마법진들의 모습.
거대한 빛의 기둥들이 던전의 필드 사이로 곳곳에서 솟아났다.
“프리아.”
“알았다.”
거대한 빛의 기둥들 사이로 프리아의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법진을 정교하게 짜둔다 할지라도 그들이 벌일 일엔 갈루스와 동등한 신격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파아아아앗!
“…됐다.”
스무 번째 필드 위로 나타난 거대한 균열, ‘게이트’가 등장했다.
핏빛으로 일렁이는 게이트는 좌표상 서울 한복판에 열렸어야 했지만, 강력한 마력과 권능이 차원 사이의 공간을 왜곡시키며 좌표를 이곳으로 변형시켰다.
차원을 넘는 통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인 만큼, 그곳을 통과해 게이트로 넘어오던 괴수들은 꼼짝없이 이리로 빨려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구!
“키이이이익!”
일렁이고 있는 거대한 균열 사이, 차원을 넘어온 온갖 괴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꽤나 먼 거리에서 지켜봄에도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놈들의 모습은 마치 개미 떼가 우르르 쏟아지는 듯한 광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필요한 활성화 시간조차 없이 불과 몇 초 사이에 쏟아 낸 괴수들의 수만 만 단위에 가까웠다.
‘이런 게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면… 끔찍했겠네.’
계속해서 몬스터를 쏟아 내며 필드를 메우고 있는 게이트.
물론 놈들이 이 던전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이곳의 주인을 먼저 쓰러뜨려야만 할 것이다.
“후, 좋아. 그럼 다들 시작해 보자고.”
철컹!
검을 움켜쥔 성현의 뒤편엔 어느새 그림자가 한가득 뻗어져 있었고, 엄청난 숫자의 그림자 군단이 눈동자를 빛내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