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덫과 사냥꾼 (2)
알 수 없는 검은 통로의 앞.
그 앞에 선 성현은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뭐야?”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통로의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그곳 또한 차원의 틈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리로 끌고 온 이유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았다.
“내게 수호자들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가?”
“필멸자의 정신이 버틸 만한 곳은 아니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대의 뒤엔 내가 있으니.”
“뭐? 자, 잠깐……!”
터억!
등을 떠미는 프리아의 손길에 성현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고, 뭐라할 새도 없이 어둠 속 통로를 향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질적인 기운 속, 한참을 떨어져 내리는 감각 끝에 성현이 바닥에 털썩 내리 앉았다.
정체 모를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땅바닥의 위.
굉장히 높은 곳에서 추락한 듯한 기분이었지만, 정작 성현의 몸에 대해 충격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이런 미친…….”
잠시 고개를 처박고 있던 성현이 팔을 딛고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현의 주위로 보이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척박한 땅과 어둠이었다.
하늘 위로 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던 방금까지의 공간과는 정 반대되는 듯한 느낌의 장소.
하지만 그 둘 모두 같은 차원 사이의 틈 속이었다.
“공허의 공간이다. 차원의 틈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자리지. 그대가 방금 서 있던 자리 역시 추방된 세계의 파편들로 채워지기 전까진 이런 상태였다.”
성현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프리아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하지만 미간을 좁힌 성현은 퉁명스레 대꾸할 뿐이었다.
“아니, 그 전에 최소한 말은 하고 등을 떠밀어야지.”
“그 점은 미안하구나.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을 하기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빠를 거라 생각했다.”
우우우웅!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와 기척.
감각이 곤두서도록 만드는 그 이질적인 무언가에 성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확실히 그동안 마주해 온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어때, 이제 좀 감이 오느냐?”
“…대강은.”
성현은 새카만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어느새, 그의 눈앞엔 새로운 퀘스트 마커가 보이고 있었다.
* * *
콰득!
두개골을 관통한 칼날이 땅바닥에 박혔다.
그 사이엔 피를 뿜어내며 쓰러진 남자가 있었다.
아무리 헌터라 한들 뇌가 관통되어 즉사해도 모자랄 상처였지만, 남자는 아직도 두 눈을 멍하니 뜬 채 팔과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어어억……!”
“하여간 징그러운 자식들.”
검을 꽂아 넣은 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성 헌터, 한승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검에 꽂혀 꿈틀대고 있던 남자의 정체는 악마종.
머리를 관통당하고도 죽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녀석들이었다.
지금도 그저 앞선 싸움으로 인해 대부분의 생명력을 소모한 탓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콰직!
한승희는 단숨에 검을 놀려 악마종의 머리를 쪼갰다.
모든 생명력이 소진되어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시체를 발로 툭 차고선 등을 돌렸다.
“다들 끝났어?”
“네!”
한승희의 말에 주위로 서있던 모든 길드원이 대답했다.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원되고, 그들 전원이 산하 길드 내 고위급 헌터들이었다.
국내 전체를 들쑤시며 이루어진 악마종 소탕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제 국내에선 거의 씨를 말려 놓은 것 같은데. 아직도 몇 마리 정도는 남아 있으려나.”
악마종의 시체들이 즐비한 복도를 걸어 나가며 한승희가 중얼거렸다.
며칠 전, 성현이 가디언 베히모스를 쓰러뜨리면서 큰 폭의 군단 강화 효과가 추가로 생겨났다.
군단뿐 아니라 산하 길드원들도 모두 영향을 받았기에 길드 전체의 헌터 전력은 이전보다도 더욱 강해졌고, 숨어들어 있던 강력한 악마종들을 상대로도 수월하게 소탕이 가능했다.
우우우웅!
그때, 복도를 걸어 나가고 있던 한승희의 앞에 갑작스레 커다란 포탈이 번쩍하고 열렸다.
멈칫한 그녀의 앞으로 리치들의 군주, 네이아가 걸어 나왔다.
“깜짝이야. 갑자기 네가 웬일이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여기선 볼일도 끝난 것 같으니 자리를 옮길까요?”
“…알았어.”
포탈을 슬쩍 가리키는 네이아의 말에 한승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이지스의 간부인 네이아였지만, 실제 정체는 리치들의 군주이자 성현의 수하라는 걸 한승희는 알고 있었다.
길드 업무와 관련해서 둘은 나름 안면이 트여 있던 사이였기에 미심쩍어 할 일은 없었다.
“먼저 갈 테니 마무리는 맡겨 둔다.”
“네, 처리해 두겠습니다.”
후우웅!
한승희는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던 길드원들에게 뒷정리를 지시하고는 네이아를 따라 함께 포탈로 넘어갔다.
포탈 속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한순간에 뒤바뀐 주위의 풍경들.
그 모습에 한승희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중국에서 아티팩트들을 빼돌려서 써먹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희끼리 진짜 편리하게 다니네.”
“이런 능력을 대놓고 사용해, 외부에 알려줘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요.”
한승희가 그들의 포탈을 직접 타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투정 섞인 소리를 했지만, 네이아는 가볍게 넘겼다.
평소 성현과 군주들이 직접 사용하거나 군단의 병력이 그림자 없이 대규모로 이동할 때나 쓰던 것이었기에 다른 길드원들의 입장에선 생소한 게 당연했다.
그도 그럴게 포탈의 기능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지하 던전 내부도 아니고 바깥에서 남발하는 건 그리 좋지 않았다.
한승희처럼 확실한 신뢰가 구축된 주요 간부격들이나 알지, 굳이 온 동네에 소문이 나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라는 게 뭔데? 이런 인적 없는 곳까지 데려온 걸 봐선 안부나 물으려 한 건 아닐 테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얼마 전 잡아들였던 대악마들에 관해서예요.”
“대악마라면… 너희가 직접 심문한다고 데려갔던 녀석들 아냐.”
“맞아요. 심문에 강력한 면역이 있는 이들임에도 정보를 빼낼 수 있었죠.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별 의미는 없었어요.”
“…예상대로라니? 그놈들만 잡으면 가디언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제거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한승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반응했다.
최근 성현을 둘러싼 대강의 상황과 가디언에 대한 설명이라면 그녀 역시도 듣게 되었다.
성현이 부재중인 시점엔 언제나 이지스 길드를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관리하는 한승희였기에, 그녀나 소수의 주요 인물들 정도는 차원을 위협하는 진짜 배후 요소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무슨 헛소린가 싶을 만큼 도저히 쉽게 이해가 갈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악마종이라는 괴물들의 등장이나, 최근 급변하는 상황들부터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너희한테 심문당할 걸 예상하고서 놈들이 기억을 제거해 두기라도 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원하던 정보들은 모두 빼내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야?”
“모두 거짓 없는 사실이라곤 해도 그 정보들은 모두 손에 들어온 시점부터 무의미해져 버렸어요. 상황이 바뀌게 되면 기존의 정보는 쓸모없어지기 마련이죠.”
성현에게 프리아가 미리 이야기해 주었던 대로 대악마들이 지닌 정보들은 더 이상 가디언 추적엔 무의미해졌다.
물론 대악마 수준의 적이 도시 속에 숨어있던 걸 미리 제거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수확이었다.
다만, 지금 시점에 네이아가 이야기하려는 건 그런 소소한 성과가 아니었다.
“모든 힘을 회복하고서 차원의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가디언들을 추적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요. 거기다 남은 두 가디언은 분명 빠른 시일 내에 나타날 거예요. 그것도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배후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확률이 크죠. 미리 대비를 해 놔야 해요.”
“확실히 네가 말해 줬던 그런 괴물이 도시 한복판에 떨어지면 그것 자체가 재앙이겠지. 하지만 대비라니 어떻게?”
한승희가 네이아에게 반문했다.
현재 인류의 기술력으로는 던전의 생성조차 미리 예측하지 못해, 생성된 던전이 활성화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공략을 마치는 것이 대응 체계의 전부였다.
한데 활성화 시간조차 없고, 차원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원하는 곳에 나타날 수 있는 가디언들을 상대로 피해 없이 대응할 방법이란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가능해보였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 드리죠.”
따악!
네이아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그들의 바로 앞에 새하얀 포탈이 커다랗게 생겨났고, 네이아가 먼저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먼저 불쑥 넘어가 버린 네이아의 모습에 한승희는 얼결에 그녀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여, 여긴 또 어디야?”
포탈을 건너 온 한승희는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이번엔 단순히 포탈을 넘으며 장소가 뒤바뀐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걸어 나온 그녀의 앞엔 무성한 나무와 수풀 사이로 낯선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과는 달리, 평범한 지구의 생태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S급 헌터로서 수없이 많은 던전들을 공략해 온 한승희로선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갑자기 웬 던전에 데려온 거야? 공략이라도 도와달라고?”
“글쎄요, 여태 봐 왔던 던전들과는 완전히 다를걸요.”
뒤편에서 들려온 네이아의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바로 뒤편에 놓인 절벽과 그 아래의 풍경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이건 뭐야?”
한승희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그녀가 선 절벽 아래로 광활한 대지가 탁 트인 채 내려다보였다.
옅은 안개와 지평선에 가려 그 끝이 미처 보이지 않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던전의 모습이다.
“이, 이 정도로 커다란 던전은 난생 처음 봐.”
무려 두세 개의 필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그녀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물론 그녀가 보고 있는 반경은 이 곳 장소의 진짜 크기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키이이익!
“모, 몬스터……?”
괴수들의 울음소리에 한승희가 반사적으로 검을 쥐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시시각각 지나쳐갔고, 커다란 비행 괴수 수 천 여 마리가 그녀가 선 산맥 위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중 몇몇 녀석은 인간인 한승희와 눈이 직접 마주쳤음에도 관심도 없다는 듯 지나갔다.
한승희조차 난생 처음 봤을 만큼 생소한 몬스터 종이었고, 실제 지구에선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괴수들이었다.
“잠깐… 저 녀석들은…….”
“이제 눈치채셨나요?”
네이아가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방금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나간 비행 괴수들은 모두 성현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수하들이었다.
감각을 넓힌 한승희는 자신의 주변은 물론, 절벽 아래로도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물론 예외 없이 이 곳의 몬스터 전부가 성현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여긴…….”
“후훗, 인간으로서 초대받은 건 처음이시네요.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