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추적
성현이 이번에 흡수한 가디언의 정수는 평소와 달랐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만 엄연한 신의 권능이 담긴 힘이었고, 그 덕분에 이전의 정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치가 군단 강화 효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권능의 효과는 고작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녀석의 피를 흡수한 이즈나가 변하게 되었듯 정수를 직접 흡수한 성현에겐 더 큰 변화가 있었고, 힘을 흡수하자마자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성현 스스로도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한껏 칼날에 담은 성현은 힘껏 자신의 검을 휘둘렀고, 그의 검격은 괴물이 아닌 공간을 베었다.
카가가가각!
성현의 검에 의해 찢겨진 공간의 사이.
차원 사이를 열어 버린 입구의 앞에 선 성현과 이즈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후우우웅!
차원의 공간을 뚫고서 바깥으로 나온 성현과 이즈나.
그들은 발이 푹 꺼지는 감각과 함께 아래로 훅 떨어지고 말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컥! 이런 미친…….”
“주, 주군…….”
“미안… 내 실수야.”
고개를 흔든 성현이 정신 없는 와중에 간신히 땅을 짚었다.
헌터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사망했을 만한 높이.
약간 빗겨 나간 좌표로 인한 참사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공기와 분위기부터가 그들이 방금 전까지 들어서있던 차원의 틈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넘어져 있는 성현을 바라보고 있는 두 시선.
청성 출신 A랭크 헌터 강일훈과 S랭크의 야차 한승희였다.
“이성현……?”
“너희…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 둘이 우두커니 멈춰 선 채 성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데없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두 사람이 이지스의 두 최고 수뇌부라니.
시내 한복판에 잔뜩 모여 있던 다른 헌터들의 시선도 모두 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S랭크 대형 던전의 공략을 위해 모여 있던 이지스 산하의 헌터들이었다.
“아… 그게…….”
“일단 일어나. 꼴이 말도 아니네.”
강일훈이 휘청거리는 성현의 팔을 붙잡고선 일으켜 세웠다.
함께 나타난 이즈나는 혼자서도 금세 벌떡 일어났지만, 성현은 방금 차원을 직접 열고서 넘어온 탓인지 정신이 제대로 차려지질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성현의 꼴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걸친 옷부터 곳곳에 구멍이 나 있고, 낭자한 핏자국들은 처음에 시체가 떨어진 건 아닌지 의심을 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아무튼… 차원은 성공…….”
일어섰던 성현의 몸이 뒤로 고꾸라졌다.
* * *
“어……?”
번뜩 눈을 뜬 성현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절하듯 쓰러졌던 그가 일어난 곳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의 위였다.
“하… 싸움이 끝나고서 갑자기 긴장이 풀려 버린 건가.”
약간은 띵한 머리에 성현은 이마를 움켜쥐었다.
온몸이 부러지고 뚫리고 다시 재생하길 반복하던 그의 몸뚱이였다.
그런 데다 가디언의 맹독까지 듬뿍 먹어 가며 한계까지 싸우던 그였는데, 거기서 처음 얻은 권능의 효과로 차원 사이의 통로까지 직접 열어 버렸으니.
성현조차 감당 못 할 막대한 체력을 소모하며 기절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정말 차원을 건널 수 있게 될 줄이야.’
성현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때의 감각.
단순히 공간 사이를 넘는 일반적인 포탈하고는 완전히 달랐고, 심지어 어떠한 아티팩트의 도움도 없이 차원을 건너뛰었다.
직접 자신의 검으로 차원 사이를 잘라 낸다는 개념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물론 막대한 체력 소모나 범위를 봐선 전투용으로 사용할 만한 건 결코 아니었지만, 차원의 틈 사이에 숨은 놈들에게 언제든지 역공을 가할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큰 성과였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성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자신의 집 안은 아니었고, 깔끔한 개인 병실 같은 느낌이었다.
“일어났어? 이제 곧 일어날 거라더니 정말이었네.”
“…깜짝이야. 여긴 어쩐 일이야?”
문 쪽이 아니라 뒤편에서 불쑥 나타난 강일훈의 등장에 성현이 반응했다.
성현이 헌터가 되기 전부터 나름의 친분이 있던 사이니, 병문안 오는 게 이상할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깨어나자마자 얼굴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그야 네 주변을 지키고 서 있었지. 네 목을 원하는 녀석들이 한둘도 아니고, 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들지 모르니. 너 벌써 이틀이나 자고 있었다.”
“…이틀?”
성현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개운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뻗어 있었을 줄이야.
검을 어깨에 진 채 창가에 서 있던 강일훈은 다가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했지. 일단 병원으로 옮기긴 했는데 의사들이 할 게 없다 하더라고.”
일반 환자를 보는 의사와는 다른, 일정 등급 이상의 고위 헌터를 대상으로 하는 각성자 전문 의사들이다.
한데 그런 이들조차 할 게 없었다는 말.
사실 그야 당연했다.
직접 치유할 수 있는 외상이나 내상은 재생력 특성으로 모조리 회복했고, 몸으로 파고들었던 독마저 면역이 생기며 말끔히 제거되었다.
설령 상처가 남아 있었다 한들 괜한 조치를 취하는 것보단 성현의 자체 치유력이 훨씬 더 효과적일 터였다.
무엇보다 애초에 각성자에 속하는 의사라 해도 성현의 피부를 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몸 자체의 내구도에 물리 저항을 비롯한 효과들까지 덕지덕지 발려져 있으니.
그의 피부를 조금이라도 잘라 내려면 각성자 정도가 아니라 최소한 전문 헌터 정도는 데려와야 했다.
“아무튼 그래서 굳이 병실에 있을 것 없이 너희 집으로 옮겨 두려 했는데, 너희 간부들이 단체로 반대를 해서 여기 남기로 했지. 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 하긴.”
대외적으론 이지스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마족 군주들이 반대를 했다는 말.
그들이 왜 반대를 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강일훈의 말이었지만, 성현은 납득이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게 성현의 집엔 지하 던전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성현의 목숨을 노릴 악마종이나 다른 헌터들이 꼬인다면 해당 정보에 대해 노출될 가능성도 커지는 바.
지하 던전의 위치에 대해선 철저히 극비로 부친만큼 주변에 괜한 날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일 터였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하수도에 있던 악마종 소굴은?”
“거긴 이미 우리가 처리했어. 네가 돌아온 이후로 그 주변 지역에서 악마종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었거든. 추적해서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
“…그래? 다행이네.”
성현은 안심한 듯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가디언을 쫓아 차원의 틈으로 넘어간 탓에 해당 던전을 미처 다 처리하진 못했지만.
한꺼번에 악마종들이 도시로 쏟아지거나, 하수도 곳곳에 흩어지는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간의 몸을 취한 상위 개체들은 아니라 해도, 악마종들이 굉장히 많은 던전이었어. 분명 쉽진 않았을 텐데.”
“그래, 꽤나 고역이긴 했다 하더라고. 활활 타오르는 화산 지대에 그런 끔찍한 몬스터의 떼라니.”
강일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지스 산하의 헌터들도 충분히 강해졌어. 이지스의 본 전력에 마냥 기대던 이전과는 달라. 네 그림자를 나눠 받은 건 이지스에 몸을 담은 모두가 마찬가지니까.”
가디언의 정수를 획득하며 얻게 된 대량의 스탯과 보너스.
그를 얻게 된 것은 그림자 군단 직속 수하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성현의 그림자를 나눠받은 이지스 산하 헌터들 역시 군단 강화 효과를 받는 건 마찬가지였고, 이번만 해도 모두가 독에 대한 완전 면역을 비롯해 물리 저항과 대량의 스탯까지 추가로 얻게 되었다.
정점에 있는 성현에게도 바로 체감이 될 만한 100대의 스탯 상승분이었는데, 같은 절대치를 모두가 받게 되었으니 그로 인한 전력 증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점점 버거워지려 하던 던전도 소화가 되고 있어. 전력이 오른 탓에 당분간 던전 포화 문제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거야. 다만 문제는 이렇게 막기만 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거겠지.”
계속해서 증가폭을 보이는 던전의 생성량.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그림자를 통한 전력 상승만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진 몰랐다.
성현도 항상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방법은 있는 건가?”
“그래, 나름의 성과가 있었어.”
“그렇다면야… 괜히 바쁘게 돌아다니는 건 아닌가 보네.”
강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 방법에 대해 묻진 않았다.
성현이 여태 해 온 결과물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 없이 신뢰했고, 이는 한승희나 성찬일을 비롯한 다른 이지스의 간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필요할 때 손 정도는 내밀어라. 무조건 혼자 다 하려들지 말고.”
“…그래.”
툭 던지는 듯한 강일훈의 말에 성현은 피식 웃음 지었다.
* * *
성현이 깨어났음을 확인한 강일훈은 곧장 자리를 떴다.
호위로 붙어 있긴 했지만 하루 종일 곁을 지키던 것은 아니었고, 교대 시간에 맞춰 던전 공략에 대한 일정이 여럿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덜컥!
성현은 짤막한 절차를 마치고서 병실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병원 한 층을 아예 통째로 비워 버리고선 이지스 산하의 헌터들이 쫙 깔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현을 지키기 위해 경호로 선 헌터들이었고, 이들 전원이 최소 A랭크 이상의 정예들이었다.
길드 내에서 보통 신경을 쓴 게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성현은 그들을 돌려보내며 나왔고, 정문 쪽에 또 잔뜩 서 있는 산하 길드원들을 피해 뒷문 쪽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나와도 돼.”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없자 성현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수십여 명의 마족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군, 깨어나셨군요.”
이즈나와 로칸의 산하에 있는 뱀파이어 혈족과 웨어울프 전사들이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길드의 산하 헌터들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했는지, 호위로 잔뜩 붙어 있던 녀석들.
경호를 위해 붙어 있던 A랭크 헌터들조차 이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니 그 수준 차이가 분명함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악마종 녀석들이 이렇게 조용히 넘어갔을 리는 없을 테고. 붙잡아 둔 녀석들은 있겠지?”
“물론입니다. 끝까지 저항하던 녀석들이라 생포하기 까다로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남겨 뒀습니다. 모두 인간의 몸을 취한 놈들이고요.”
한 백발의 웨어울프 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현의 목을 노리고서 습격해 왔던 악마종들이었지만, 놈들은 병원 주위로 접근도 하기 전에 제압당한 채 어딘가로 끌려가야만 했다.
굳이 놈들의 숨통을 곧장 끊지 않은 건 바뀐 상황과 가디언의 추적을 위해서였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디언들을 당장 찾아내기는 무리다.
차원의 틈은 아주 방대하다 들었고, 두 번째 봉인이 풀린 프리아라 해도 찾아내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프리아에게만 의존하기엔 꽤나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말.
그렇기에 성현은 그 남은 시간 동안 가만히 노닥거리고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럼 어디 얼굴이나 보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