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필멸의 검 (2)
거대한 뱀 괴수와의 격렬한 전투.
성현은 신중함을 가지고선 꾸준히 녀석에게 상처를 누적시켰다.
물론 성현이 녀석에게 가하는 공격 이상으로 돌아오는 가디언의 반격은 매섭고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군주들의 그림자를 가져올 수 있는 성현은 싸움에서 재생력 특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가디언이 생명력으로 재생하듯 성현 역시 어지간한 상처나 충격은 받아 넘길 수 있었다.
물론 놈처럼 잘려 나간 팔이 다시 자라나고, 갈기갈기 찢겨진 몸이 재생되는 수준이 되진 못했다.
그래도 어지간한 상처는 초 단위의 시간도 필요 없이 멀쩡히 회복되었고, 이미 평범한 인간 헌터의 범주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재생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군주들의 그림자와 특성을 마음껏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선택지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이고.
그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성현이라면 차원이 다른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군주, 다크엘프 로드 ‘카론’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민첩성’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후우웅!
순식간에 움직인 성현의 빠른 움직임.
가디언조차 일순간 그의 위치를 놓쳤을 정도였고, 성현은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요동치는 가디언의 몸통과 휘둘러지는 꼬리 사이를 뚫고서 파고들었고,
촤아아악!
가디언의 몸통이 크게 갈라지며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림자를 머금은 성현의 검이 가차 없이 나이브리카의 비늘과 살을 갈라 낸 것이었고, 거대한 녀석의 덩치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상처가 벌어졌다.
‘원래 가디언의 몸을 벤다고 해서 이런 피가 쏟아지진 않았는데…….’
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진 성현이 피를 털어냈다.
길어진 싸움으로 인해 성현의 머리와 옷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가디언 나이브리카의 피.
그동안 성현이 상대해 온 가디언들은 석상에 가까운 녀석들이라 이런 피 같은 걸 흘리지 않았다.
이번 가디언도 겉모습과 질감 자체는 영락없는 석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피를 흘리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이 보여졌다.
“크아아아!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 때, 요리조리 뼈져나가는 성현에게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나이브리카가 거칠게 포효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녀석의 포효에 방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였고, 곧이어 쩍 벌어진 녀석의 입 사이로 초록빛의 독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주군!”
강력한 독성을 지닌 독안개가 사방을 뒤덮으며 쏟아졌다.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는 제단과 바닥들까지 반쯤 녹여 가며 뻗어져 오는 살벌한 모습.
방 전체를 뒤덮는 놈의 독안개에 피할 곳은 없었다.
파앗!
그러자 성현은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었고, 그 안에서 보랏빛 액체가 찰랑이는 병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받아!”
시선 분산을 위해 떨어져 있던 이즈나에게 날아간 병이 그녀의 손에 안착했다.
그리고는 성현과 이즈나 모두 병 안에 든 액체를 들이 삼켰다.
츠츠츠츳!
“큭…….”
그사이, 독안개가 그들에게 들이닥쳤고.
자욱하게 쏟아진 독안개 속에 휘말린 그들은 온몸에 따끔한 통증이 생겨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으로 인한 통증은 딱 거기까지.
헌터의 몸이 통째로 녹아내리고도 남을 만한 지독한 독기였지만, 성현과 이즈나는 멀쩡히 독안개 속에서 서 있을 수 있었다.
‘후, 장난이 아니네. 이걸 마시고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인상을 찌푸린 성현이 빈 병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서둘러 마셨던 액체는 연금술을 통해 만들어 둔 최상급의 ‘해독제’였다.
도핑 포션과는 효과의 결을 달리 하는 것이라 중복될 일도 없었고, 약 30분 동안은 강력한 해독 효과가 이어질 것이다.
다행히 군단 강화 효과로도 어느 정도 독에 대한 저항력은 확보를 해 둔지라, 최상급 해독제의 효과와 함께 작용하자 이런 말도 안 되는 독기 속에서도 버티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어. 조금 더 서둘러서 끝내 버리는 수밖에.’
서서히 몸을 타고 들어오는 독의 기운이 느껴졌고, 성현과 이즈나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머릿속으로 이미 생각을 주고받은 그들 중 성현이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자 가디언이 정면에서 달려들며 성현을 노렸지만, 그 순간 놈의 머리 위로 이즈나가 커다란 불의 구체를 떨어뜨렸다.
콰아아앙!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강렬한 충격에 입을 쩍 벌리던 가디언의 고개가 순간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그 틈에 땅을 박찬 성현이 힘껏 뛰어올랐다.
‘머리를 통째로 도려낸다 해도 금방 재생이 되겠지.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재생에 더 많은 생명력을 필요로 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명력을 소모하는 부위가 바로 심장과 머리다.’
성현의 두 눈이 응시하는 뱀의 머리.
그는 이대로 검을 내리찍어 단숨에 녀석의 머리를 관통해 낼 생각이었다.
휘리리릭!
하지만 그 순간, 성현의 뒤편에서 난데없는 촉수가 튀어나왔고 성현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아 낚아채었다.
‘뭣……!’
콰아아앙!
내던져진 성현이 기둥을 박살 내며 나가떨어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기둥의 파편들 사이, 강한 충격에도 성현은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저 앞을 보자 뱀의 등 뒤에서 솟아난 기분 나쁜 촉수들이 보였다.
‘저 촉수들은 악마종들의 촉수잖아……? 단순히 생명력만 흡수했던 게 아니란 건가?’
우득! 우드득!
곧이어 가디언 나이브리카의 거대한 몸체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증기 사이로, 거대했던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이런 인간 하나 처리하는 데 지체되고 있는 꼴이라니… 아직 이 모습으론 원래 전력이 나오질 않는군.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단 건가.”
한껏 인상을 찌푸린 나이브리카가 중얼거렸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디언의 갑작스런 행동에 성현은 섣불리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녀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때, 프리아가 그의 곁에 불쑥 나타났다.
“이제야 알겠구나. 저 녀석, 대악마까지 먹어치운 거로군.”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성현이 되물었다.
“놈은 단순히 악마종의 생명력만을 흡수한 게 아니다. 그랬던 거라면 이런 거창한 제단 같은 것도 필요는 없었겠지. 내가 손을 써 뒀던 상태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회복했나 했더니, 대악마를 통째로 먹어 치운 것이었구나.”
“대악마……? 대악마라면…….”
악마들 중에서도 보스 몬스터에 가까운 위치에 놓인 존재들.
악마종 중에서도 이런 감옥에서 공장처럼 찍어 낸 녀석들과는 달리, 대악마들은 갈루스가 직접 만들어 낸 특수한 개체들이었다.
성현도 딱 한 번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처음으로 마주했던 악마종이 바로 대악마 급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노려오는 녀석을 어렵사리 쓰러뜨린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잠시 잊고 있던 존재들이었는데 이 시점에 듣게 될 줄이야.
“단순히 수많은 악마종들을 먹어 치운 것만으로 잃어버렸던 자아와 정신을 구축한 것이 아니었다. 간접적이나마 갈루스의 손길이 닿은 대악마의 육신과 정신마저도 먹어 치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덕에 회복할 수 있던 것이지. 방금 솟아났던 촉수도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일 거다.”
프리아가 말했다.
지금 성현의 앞에 선 가디언이 하고 있는 저 인간의 모습도 같았다.
녀석의 제물이 된 대악마가 이미 한 인간 헌터의 육체를 차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해당 헌터의 육체는 물론 능력마저도 흡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네놈들에게 낭비할 생명력 따윈 없다. 이 모습으로 상대해 주지.”
성현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린 니아브리카는 순식간에 발을 박찼다.
덩치가 줄어들며 위압감은 덜해졌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아직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여파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였던 본체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
콰아아아앙!
반면 여전한 힘과 속도는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움푹 파인 땅 위로 성현은 급히 물러나 피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왼 팔에서 솟아난 촉수들이 성현을 노려 왔다.
성현의 몸은 띄워져 있는 반면, 빠른 속도의 촉수들이 그의 몸을 관통하려 다가왔다.
촤아아악!
그러자 급히 이즈나가 끼어들며 촉수들을 잘라 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반대 손에 일렁이는 뜨거운 불의 기운.
“저리 꺼져!”
“이제 위력만 키운 마법 따위 통하지 않아.”
“뭐……?”
후웅!
가디언이 정면에서 날아드는 이즈나의 화염구를 가볍게 피해 냈다.
그리곤 순식간에 접근해 와 이즈나를 발로 뻥 차 내었고, 성현을 향해서 칼날을 뻗었다.
‘읏……!’
[군주, 뼈의 왕 ‘자고스’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망령의 혼’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순간 녹색 빛으로 감싸인 성현이 몸을 빼내었다.
다른 군주 특성을 이용해 가디언의 공격을 간신히 피한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니아브리카의 팔이 변형되더니,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거대한 뱀의 몸체가 되어 휘둘러졌다.
콰과과과광!
‘젠장, 이건 또 무슨……!’
휩쓸린 벽과 기둥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고, 성현은 정신없는 와중에 쓰러져 있던 이즈나까지 빼냈다.
신체의 일부를 자유자재로 변형까지 시켜가며 싸우고 있는 녀석.
“죄,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 방금은 덕분에 살았어.”
성현은 이즈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젠장, 방금 전하곤 전투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떤 식으로 공략을 해야 하는 거지?’
180도 바뀐 상황에 성현의 머릿속이 마구 복잡해졌다.
놈을 상대할 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거체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헌터를 상대하는 느낌으로 급변한 상황.
물론 사용하는 능력들을 보면 도저히 일반 헌터 같지도 않아서 더 골치가 아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단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짤막한 숨을 내쉰 뒤 성현은 검을 움켜쥐었다.
니아브리카가 뿜어 냈던 독기는 여전히 성현의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반면 아직도 가디언의 생명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고, 여유로워 보이는 녀석의 발걸음이 그를 압박하듯 다가왔다.
성현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가디언의 눈빛은 그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했고.
그런 반면, 정보를 조금 던져 준 프리아는 별다른 방법을 알려 주는 것도 없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
좋지 않은 상황에 그의 옆에 선 이즈나의 표정에도 초조함이 서렸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파아아앗!
이즈나의 주위로 검은 안개가 일며, 어둠의 신격 프리아가 그녀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성현이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신격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던 이즈나로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
“쉿, 잠자코 듣기나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