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필멸의 검
지구에 남겨진 성현의 그림자 군단.
예상치 못한 차원 간 이동에 휘말린 탓에 갑작스러운 성현의 부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공백에도 군단은 멈추지 않았다.
성현과 직접적으로 그림자를 주고받은 군주들은 아직 그가 차원 너머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 부름에 응할 순 없었지만, 여전히 성현의 그림자로서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게 느껴졌다.
성현의 군단은 보통 헌터들이 다루곤 하는 수동적인 소환수들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이들 모두가 스스로 판단 후 움직이는 군단의 일원이었고.
성현의 빈자리를 각 군주들이 채워 넣은 채 군단을 이끌며 공략을 진행했다.
16번째 필드의 몬스터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일반 크림슨 오크들은 이미 모두가 군단에게 당한 뒤였고, 그들의 시체는 언데드 오크 군주인 기아스의 능력으로 언데드가 되어 그림자 군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필드를 통째로 접수하며 불어난 군단을 토대로, 그 기세를 몰아 이미 다음 필드 공략까지 대부분 완수한 상황.
“…여긴가.”
웨어울프 대족장 로칸, 그리고 리치들의 군주인 네이아.
군단의 두 마족 군주는 폐허가 되어 버린 텅 빈 방 안에 섰다.
“네 번째 성소… 하지만 보고 받은 대로 지키고 있는 가디언은 없이 텅 비어있군.”
가디언의 존재는 지하 던전 공략에 있어 가장 큰 난적이자 걸림돌이었다.
가뜩이나 성현도 없는 지금 상황에, 그런 존재가 자신의 둥지에서 사라져 있다는 건 굉장히 불안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흐르는 마력을 봐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주위를 둘러본 네이아가 말을 거들었다.
잔뜩 뒤엉켜 있는 마력의 흔적들.
원래 이곳은 강력한 봉인진과 함께 봉인석이 잠들어 있던 장소였고, 그를 지키기 위해 가디언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가디언이 봉인석을 강제로 먹어 치우고, 체내로 흡수해 빼돌리는 과정에서 반발 작용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런 큰 흔적들이 남겨지며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덕분에 로칸이나 네이아로선 이 페허만 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가디언은 움직이고 주군과의 연락이 끊어지기까지 했으니. 이곳과 관련되어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닐지…….”
로칸의 눈빛에 약간의 걱정이 서렸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으로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없었다.
성현이 무언가에 의해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를 전적으로 믿었기에.
성현이 맡겨 두고 간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었다.
* * *
쿠구구구구!
“키이이이익!”
드디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가디언 나이브리카.
녀석의 등장에 성현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게 무슨…….’
가디언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성현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여태 보았던 그 어떤 고위 헌터나 보스 몬스터들도 이 정도 수준의 위압을 보인 적 없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결의 감각인 듯한 느낌.
단순 느낌뿐만이 아니다.
녀석의 눈빛만으로 온몸이 마비되려 했고, 몸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려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제대로 전투를 벌이기에도 곤란한 상황.
하지만 그때, 성현의 눈앞에 번쩍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운명의 대적자’ 칭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 어떤 적을 상대로도 위압 효과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후우…….”
성현이 침착히 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얽매이는 듯하던 경직이 완전히 사라지며 풀어졌다.
위압에 대한 완전 면역 효과를 지닌 성현의 칭호, ‘운명의 대적자’.
보스급 몬스터를 상대로 한 위압감이야 던전의 보스들을 하도 많이 상대를 하며 익숙해지다 보니, 평소엔 큰 체감이 가진 않던 칭호의 효과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빛을 보게 될 줄이야.’
확실히 강력한 시스템의 효과.
얼얼한 감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아무런 지장 없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잘 버텨 냈구나. 필멸자의 몸으로서는 넘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성현의 곁에 스르륵 나타난 프리아.
그녀의 등장에 성현이 말했다.
“방금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이 정도 위압감은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수를 쓴 거지?”
“녀석을 비롯한 가디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빛의 권능을 일부 받은 존재라 했을 텐데. 약간 불안정하다곤 해도 대부분의 힘을 회복한 상태처럼 보이고, 반쪽짜리나마 불멸의 개념을 지닌 것이지.”
성현이 이전에 상대했던 가디언들은 원래의 힘을 잃고서 쇠퇴한 이들이었고, 빛의 권능을 활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래의 힘을 회복한 가디언은 신의 권능을 간직한 채 불멸자의 영역에 발을 들여 선 이들이었다.
그들을 창조한 갈루스와 같은 신적인 존재들에겐 소멸당할지언정, 일반적인 필멸자로선 녀석의 숨통을 끊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이러한 개념은 지구든, 어느 차원에서든 마찬가지였다.
“뭐? 불멸이라면 아무리 베어 봤자 숨통을 끊을 수 없단 건데… 그럼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라는 거잖아?”
“걱정도 많구나. 그대의 곁에 누가 있는지 안 보이느냐?”
화들짝 반응하는 성현에게 프리아가 말했다.
진정한 불멸자라면 같은 신격조차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고, 우주의 법칙이 틀어지지 않는 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소멸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프리아가 육신을 잃고 영혼까지 찢겨졌다 한들 결국 죽지 않는 것도 그녀가 불멸자이자 한 차원의 신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눈앞의 가디언은 불멸자의 영역에 발을 걸쳤다고 한들, 그들 신의 권능을 극히 일부만 건네받았을 뿐.
갈루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어둠의 여신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고.
프리아는 놈에게 주어진 불멸의 개념을 지우고서 얼마든지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물론 봉인된 지금 상태로는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능하다곤 해도, 그대가 수호자의 숨통을 끊는 데에 도움 정도는 줄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수호자가 지닌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것이 먼저다. 저게 보이지 않는 건 아니겠지?”
“…잘 보이지.”
프리아의 말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디언 나이브리카의 온몸에 넘실거리고 있는 방대한 생명력의 기운.
녀석은 이곳 제단에서 그 많은 악마종들을 먹어 치운 것 답게, 가공할 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놈의 숨통을 끊기 위해선 일단 저 생명력부터 걷어 내야만 했다.
콰아아아앙!
가디언의 거대한 꼬리가 성현을 향해 내리 찍혔고, 충격파와 함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 헌터의 몸뚱이로는 버틸 거리도 없이 산산조각 날 만한 위력이었다.
다만 녀석의 움직임을 읽은 성현은 재빠르게 몸을 놀려 공격을 피해 냈고, 가디언의 몸통을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이쪽 차원에선 군단을 불러올 수도 없어.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간격 안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의 선택지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가디언 나이브리카.
놈의 덩치만 봐도 알 수 있듯 워낙 리치도 길었고, 방 안의 어떤 공간 안에 있더라도 꼬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위치가 아닌, 녀석의 간격 안쪽으로 다가서야만 했다.
후우웅!
“이즈나!”
“네!”
커다란 나이브리카의 꼬리가 접근해 오는 성현에게 날아들려 했지만, 그와 다소 떨어진 좌측에서 함께 달리던 이즈나가 있었다.
콰아아앙!
이즈나의 화염 마법이 폭발하며 날아들던 나이브리카의 꼬리를 강타했다.
물론 그 한 방으로 가디언의 단단한 비늘과 그 안쪽을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즈나는 관통력에 집중하기보다는 최대한 큰 폭발이 일어나도록 화염구를 조절했고, 덕분에 밀려나는 그 충격으로 꼬리의 경로를 방해하는 데에 성공했다.
성현을 비껴 나가며 땅을 뒤집어 놓은 가디언의 꼬리.
그사이, 뛰어오른 성현은 녀석을 향해 검을 힘껏 휘둘렀다.
분명 나이브리카의 몸은 단단한 비늘로 둘러싸여 있고, 이즈나의 강력한 마법에도 손쉽게 버텨 낼 만큼 방어가 뛰어났다.
어지간한 검격으론 흠집도 내지 못하는 게 정상인 바.
촤아아악!
“크아아아아!”
하지만 휘둘러진 성현의 검은 녀석의 비늘을 단숨에 갈라냄은 물론, 그 안을 깊게 파고들며 상처를 벌려 냈다.
가디언의 몸뚱이에 새겨진 커다란 상처와 흩뿌려지는 핏줄기 사이, 성현의 시야 한편에 놓인 상태창.
[해방된 그림자의 검]
[등급 - 최상급]
[내구도 - 파괴불가]
[무기 공격력 741~1056(+2092)]
[속성-그림자], [마력 감응], [???]
[해당 장비는 사용자의 마력에 감응합니다. 사용자의 마력 스탯에 따라 검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해방된 그림자의 검.
헌터로서 처음 손에 얻은 제대로 된 무기이자, 그동안 성현과 함께 성장해 온 최상 등급의 무기다.
검의 특성으로 그림자의 마력까지 머금고 있는 성현의 검은, 칼날 이상으로 벨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고.
가디언의 단단한 비늘조차 간단히 갈라 버릴 수 있었다.
츠츠츠츠츳!
물론 가디언의 몸뚱이는 아니나 다를까 눈 깜짝할 새에 재생이 되기 시작했다.
가공할 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으니, 이런 커다란 상처조차도 순식간에 치유가 되는 모습.
하나 그렇다 한들 녀석이 지닌 생명력은 분명히 소진되었고, 데미지가 누적된 것이 느껴졌다.
“크아아! 감히 인간 따위가 내게 손을 대!”
가디언 역시도 그 사실에 분노를 터트렸고,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와 함께 입을 쩍 벌렸다.
성현을 집요하게 쫓으며 공격을 퍼붓는 녀석.
육체는 전에도 강력했지만, 속이 빈껍데기인 상태와 비슷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나마 이즈나가 좌측에서 계속해서 놈의 시야를 분산시켰고.
마법을 이용해 공세를 방해한 덕에 성현이 반격을 이어 나가며 가디언에게 데미지를 누적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이즈나도 함께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이번 던전 공략에서 동행한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마냥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굉장히 민첩한 움직임과 집요함으로 성현을 쫓는 가디언은 주위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며 들이닥쳤다.
그러다 녀석은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성현의 빈틈을 찾아냈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성현을 노렸다.
성현은 겨우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피하느라 공중에 뜬 상태에서 날아드는 나이브리카의 꼬리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쿠우웅!
“주, 주군!”“컥……!”
잠시 팔을 짚은 성현이 피를 토해 냈다.
간만에 느껴 보는 아찔한 감각.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새는 없었다.
콰아아앙!
“젠장……!”
또 다시 날아드는 나이브리카의 꼬리에 몸을 피한 성현은 본능적으로 일어나 검을 쥐었다.
최소 대여섯 군데 이상은 부러진 뼈.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욱신거렸고, 몸에 입은 데미지는 골절뿐만이 아니었다.
“벌써 비틀거리는구나. 네놈은 이제 끝이다.”
“끝 같은 소리하네. 끝을 내려면 아직 멀었어. 그것도 한참이나 남았지.”
예상을 뛰어넘은 녀석의 전력과 심각해진 몸 상태까지.
하지만 성현의 얼굴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S급 특성, ‘백귀야행’이 사용됩니다!]
츠츠츠츳!
성현의 등 뒤로 피어오른 검은 그림자의 일렁임.
차원의 틈이라는 위치 탓에 비록 군단을 소환할 순 없지만, 이런 곳에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들과 긴밀히 이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군주, 웨어울프 로드 ‘로칸’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재생력’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치이이익!
늑대인간이 지닌 특유의 강력한 재생력.
바로 그 재생력 특성이 활성화되며 성현의 부러진 뼈가 다시 붙고, 손상된 근육과 장기가 회복되었다.
온몸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와 출혈 역시 모두 아물며 회복되었다.
“후우… 누가 먼저 당하나.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