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차원의 틈 (3)
성현의 앞에 펼쳐진 엄청난 규모의 지하 감옥.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음에도 어찌나 거대한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곳이 단순히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성현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감옥에 무슨 시체가 이렇게…….”
인상을 찌푸린 성현이 중얼거렸다.
당장 그의 발치 아래 놓인 새빨간 피웅덩이들의 모습.
숲속에서 마주했던 야수종 몬스터들은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시체 중 대부분은 신체 일부가 훼손된 채 놓여 있었다.
‘공간 전체가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아니, 이 꼴만 보더라도…….’
난간에 가까이 다가선 성현이 아래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한 횃불만이 비추고 있을 뿐, 상당히 어두운 데다 공간 전체에 뿌연 안개가 끼어 있었다.
단순한 안개였다면 고위 헌터인 그의 눈과 감각만으로도 얼마든지 꿰뚫어 볼 수 있겠지만, 성현조차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마력이 잔뜩 끼어 있는 특수한 안개겠지. 이 안개 때문에 안쪽에 있는 기척들도 전혀 알아 낼 길이 없고… 이만한 장소를 우리 둘이서 뒤지려면 잠깐으로 끝날 일이 아니겠는데.”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주군과 함께니까요.”
“뭐 아무튼 직접 들어가 보자고.”
대뜸 던져진 이즈나의 말에 헛웃음을 지은 성현은 계단을 통해 감옥의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겹겹이 놓인 층과 감옥들.
중간중간 놓인 복도 여러 군데를 거치며 두세 개의 계단을 연달아 내려간 그들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통해 나아갔다.
‘가디언 녀석 엄청 깊게도 들어갔네. 아직 턱도 없는 수준이야.’
퀘스트 마커의 위치상 그들은 가디언이 달아난 최하층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아직까진 몬스터나 악마종 같은 게 튀어나오진 않은 상황.
다만 점점 더 짙어지는 피비린내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성현의 감각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걷던 복도의 끝에 경악스러운 광경을 철창 너머로 마주했다.
“저… 저건 뭐야?”
성현은 저도 모르게 멈춰 서고 말았다.
복도의 끝에 놓인 커다란 감옥 안 뒤엉킨 시체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음에도 그 내부에선 거부감이 물씬 드는 불쾌한 마력이 감돌았다.
‘…….’
그리로 가까이 다가간 성현은 철창 너머로 감옥의 내부를 내다보았다.
감옥들이야 위층에 잔뜩 놓여 있었지만, 다른 텅 빈 감옥들과는 달리 유독 넓은 장소였고.
그 안엔 붉은 피가 강처럼 흐르고, 나가 떨어진 살덩이들이 둥둥 떠다녔다.
뜨거운 불이 흐르는 용광로와 가시들, 온갖 고문 도구와 마법진까지.
“큭……!”
온통 끔찍한 행위들이 자행된 흔적들로 가득한 공간이었고, 그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 본 이즈나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종족이 다른 것이야 물론, 같은 신격에게서 나왔다고 한들.
몬스터는 마족과 다른 완전한 하등종이라 여기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이즈나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동등하다 여기지 않는 것처럼, 지능 차이가 그만큼 있으니 마족 역시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닌 것이었다.
한데 그런데도 이즈나에게 큰 거부감이 들게 만들 만큼 이곳의 광경은 심했다.
“지옥도가 따로 없네. 갑자기 왠 감옥이 있나 했더니, 놈들이 악마종을 만들던 그 장소였나.”
철창에 바짝 다가선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몬스터로 벌인 생체 실험과 학살 및 신체 개조의 흔적들.
성현이야 그나마 고어스러움을 버티면 되는 수준이었지만, 같은 창조주에게서 나온 뿌리인 이즈나로선 본능적인 거부감이 숨통을 조여 왔다.
“이즈나, 괜찮은 거야?”
“…물론입니다, 주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어.”
터억!
고개를 저은 이즈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피투성이의 철창을 짚었다.
다른 군단을 불러올 수도 없는 차원의 틈 사이.
성현을 옆에서 보좌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뿐이었고, 고작 이런 광경 따위로 나약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계의 감옥답게 보통의 물체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지 굉장한 경도를 지닌 철창.
하지만 그녀의 완력 앞에선 한낱 철조각에 불과했고, 가볍게 힘을 주며 철창을 우지끈 부러뜨렸다.
끼이이익!
강제로 열린 철창의 문 사이로 들어선 성현과 이즈나.
안쪽의 공간 자체는 열악한 감옥의 환경과 어울리지 않게 꽤나 넓었고.
짙은 마력의 안개 사이로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었기에 서로 등을 가볍게 마주한 채 나아갔다.
‘아마 구조상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중간 통로와 계단이 이 쪽에 놓여 있을 텐데… 잠깐 이건?’
널브러진 시체 더미 사이로, 성현은 꿈틀거리는 무언가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성현은 시체 더미 쪽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그 안쪽에서 쓰러져 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고.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악마종……?”
후두둑!
시체 더미 사이에서 흘러나온 인간형 몬스터의 상반신.
하지만 나타난 것은 악마종이 아니었다.
곰과 인간의 모습이 뒤섞인 야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
‘새로운 마족… 곰 수인 계통인가?’
성현이 반토막 난 마족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상반신만 남아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미 죽은 지가 꽤 되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반신이 쏟아진 시체 더미 사이로 무언가가 더 나타났다.
“키이이익!”
콰득!
성현을 향해 괴물이 날아들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성현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녀석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키… 키애애액!”
“기척은 이 녀석이 범인이었나.”
몸이 잘려 나간 채 버둥대는 악마종을 성현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막 만들어진 듯한 악마종의 모습.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 일반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마족의 몸뚱이까지 섞어 가며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고급 재료를 사용한 것 치곤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피부가 반쯤 녹아내린 데다가 뼈의 크기도 맞지 않는 듯 살점 곳곳을 뚫고 삐져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런 시체 더미 속에 방치된 채 반쯤 죽어 가고 있던 것이겠지.
“우읍…….”
성현의 뒤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이즈나가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난생 처음 보는 역겨운 광경.
성현조차도 질려 버릴 광경이었는데, 같은 마족이 이런 꼴을 당한 모습을 보았으니.
아무리 군주로서 정신적으로 우월한 이즈나라도 본능적인 극심한 거부 반응이 온 것이었다.
‘마족까지 끌고 와서 이런 짓거리를 벌이던 거였군.’
차원 건너편의 마족들은 성현의 지하 던전 내부에 있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태 마주한 마족들은 프리아에게서 태어난 마족들의 십분의 일도 안 될 만큼 일부에 불과했다.
단지 지구의 차원 간섭으로 인해 마족을 던전과 함께 지구 내부로 들여보내는 데에는 더욱 까다로운 절차와 힘이 들어 여태 적극적으로 보내진 못했던 것.
그리고 상황이 바뀌자 갈루스는 그런 마족들을 악마종의 재료로 사용해 상위 악마종 개체들을 만들었다.
인간의 몸을 먹어치운 녀석들처럼 마족까지 동원한 악마종들은 제대로 된 지성을 지닌 적이 되는 것이었다.
“키애액!”
버둥거리는 악마종은 다른 통로로 통하는 철창에 매달리며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실패작이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을 쏟아 부으며 몰아넣어 탄생시킨 생명체였기에 질긴 생명력을 보였다.
하지만 보다 못한 성현이 검을 쥔 그 순간.
콰직!
커다란 철퇴가 내려 찍히며 악마종의 몸뚱이가 산산조각 났다.
움푹 파인 바닥 아래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게 된 핏자국과 살덩이.
철퇴를 내리찍은 장본인이 방 안의 기둥 사이로 불쑥 나타났다.
“네놈들은…….”
커다란 뿔과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마종.
이곳 지하 감옥의 간수 역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침입자!”
콰아아앙!
번들거리는 두 눈을 치켜뜬 악마종이 철퇴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성현과 이즈나는 이미 양옆으로 흩어지며 녀석의 공격을 피했고, 양 다리에 검을 한쪽씩 박아 넣었다.
“크어어어!”
깊숙이 박힌 두 칼날에 몸부림치는 악마종.
베어진 상처가 크게 벌어졌고, 뼈까지 잘려 나간 단면이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휘청거린 것도 잠시, 녀석의 양쪽 다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아물었다.
“보아하니 실패작은 아닌 모양이네.”
검을 가볍게 털어 낸 성현이 중얼거렸다.
차원의 틈에서 감옥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인 만큼 인간의 몸과 지식을 취한 건 아니었지만.
키가 그의 두세 배는 가뿐히 넘어설 만큼 거구를 지닌 데다, 방금 보인 재생력은 상당했다.
악마종들의 재생력과 힘이 대체로 정비례하던 걸 생각하면 꽤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듯한데, 저 정도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 봐도 단순 몬스터가 아닌 마족까지 재료가 되어 태어났음은 분명해 보였다.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을 녀석이 이런 시설을 지키고 있는 꼴이라니…….”
“주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즈나가 성현의 앞에 섰다.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눈빛.
전혀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동요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눈앞의 적을 뚜렷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알겠어.”
후우우웅!
성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휘둘러진 악마종의 철퇴가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큰 동작을 보인 녀석의 간격 안으로 바짝 파고든 이즈나는 허리춤을 크게 베어 버리고선, 그대로 올라타 목까지 큰 상처를 만들어 주었다.
모두 급소를 노리고선 깊고 크게 베어진 상처.
물론 악마종은 그런 상처 정도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어깨를 박차고 거리를 벌리려던 이즈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즈나는 공중에 뜬 상태였기에 몸을 틀어 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눈초리인 성현은 나서지 않았다.
‘상처들은 금방 재생되더라도, 쏟은 피는 어쩔 수가 없지.’
콰드드득!
“크어억!”
이즈나가 주먹을 움켜쥔 순간, 커다란 피의 가시가 악마종의 복부를 꿰뚫었다.
거체인 악마종의 몸이 통째로 휘청일 정도였고, 완전히 관통한 가시는 반대편까지 닿았다.
굉장히 큰 타격이었지만 이번에도 악마종의 신체는 꾸역꾸역 재생이 되었다.
수많은 생명체가 합쳐져 만들어진 존재로서, 놈이 지닌 생명력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까진 아무리 난도질을 하든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사실은 이즈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르르륵!
어느새 이즈나의 손 위에 생겨나 있던 커다란 화염구.
그녀의 화염구는 재생되고 있던 놈의 상처 안으로 던져졌다.
콰아아아앙!
강력한 마력을 머금은 그녀의 화염구가 폭발했다.
굉음과 섬광이 터져 나오며 몸 한가운데에서 쏟아져 나온 화염과 폭발의 놀라운 위력.
불타고 산산조각 난 악마종의 몸뚱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검게 타 버린 파편 쪼가리밖에 안 남은 녀석은 이번엔 재생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군.”
“수고했어.”
뒤를 돌아보는 이즈나의 시선에 성현이 피식 웃었다.
더할 나위 없는 깔끔한 솜씨였다.
‘그나저나… 단순히 가디언 녀석만 쫓아서 처리하는 게 문제가 아니겠는데.’
성현이 발치의 시체 조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구로 쏟아지던 수많은 악마종들이 바로 이 던전과 시설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이 들어선 위층에선 이미 의식이 끝나고 난 뒤의 흔적들뿐이지만, 저 아래에서는 악마종을 만들어 내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규모로 봐선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내듯 악마종들을 만들어 내고 있겠지.
‘무작정 퀘스트 마커를 따라가기보단… 이 놈들한테 깜짝 선물을 하나 해 줘야겠군.’
성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