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차원의 틈
움직이고 있는 퀘스트 마커를 쫓아 성현이 서둘러 달려갔고, 이즈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차갑게 식혀졌던 공간은 조금 더 나아가자 금세 열기로 뒤덮이기 시작했지만, 서리 망령 무리와 동행한 그들은 중간중간 나타나는 불의 정령들을 가볍게 쓰러뜨리며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탁 트인 공간이 끝날 무렵, 더 깊숙이 들어가는 통로를 지난 성현과 이즈나.
“이곳에서 뭔가가 이루어졌던 건가.”
안으로 들어선 성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는 방 안.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피칠갑을 하고 있는 섬뜩한 제단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보통 규모가 아니었고, 방금까지 사용되고 흩어진 거대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특별히 탐지 계열의 특성이나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마력이 느껴질 정도라면 불과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던 퀘스트 마커는 저 안쪽에서 멈춰선 상태였다.
성현은 더욱 발걸음을 서둘렀고, 금세 화산의 최하층인 심층부의 끝까지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공간 안에 들어선 성현은 거대한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우우우웅!
‘이건……?’
퀘스트 마커가 둥둥 떠 있는 인간 남성의 모습.
그의 뒤편으론 커다란 녹색 빛의 포탈이 뚫려 있었다.
리치들이 보주를 이용해 만들어 낸 포탈도 아닌데, 이런 곳에 뚫린 거대한 포탈이라니.
“넌 뭐…….”
콰아아아앙!
성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순식간에 접근해 온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이즈나가 잽싸게 성현을 낚아채 뒤로 빼내며,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마법이나 체구를 이용한 것도 아닌데 검격에 실린 힘만으로 땅을 저렇게 헤집어 놓다니 보통이 아니었다.
“특유의 기운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막무가내네. 또 다른 악마종인가?”
성현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순히 헌터라 생각하기엔 위치나 상황상 말이 되지 않았고.
저렇게 진홍빛의 기운이 풀풀 풍기고 있는 꼴만 봐도 악마종과의 연관성은 분명했다.
아마 인간 헌터의 육체를 차지한 악마종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것만으로 결론을 내리고 처리하기엔 놈의 머리 위에 퀘스트 마커가 둥둥 떠 있는 게 거슬렸다.
지하 던전 바깥의 악마종 하나가 프리아의 봉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성현이었나?”
남자가 흠칫 멈춰 서며 말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슬쩍 내린 남자는 자세를 풀었고, 막무가내로 공격해 오려던 그의 기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던전 안으로 웬 인간이 찾아왔나 했더니. 네놈이 나타난 것이었군.”
“이젠 이름까지 부르며 아는 척이야? 괜히 친한 척하진 말아.”
갑자기 태도를 바꾼 녀석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지만, 성현은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사실 온갖 악마종 녀석들이 그에게 아는 척을 해오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이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를 제거하는 것이 놈들이 지닌 최후의 목적이라 한들, 적대 신격과 직접 접선까지 한 성현은 다른 헌터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제거 대상 1순위였으니.
이름과 얼굴을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일 뿐이다.
오히려 성현의 관심은 놈의 뒤편에 놓인 이상한 포탈로 향해 있었다.
‘저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저 정도 크기의 포탈을 저 녀석들이 어떻게 만든 거야? 아티팩트라도 손에 넣었나?’
정확히 측정을 하진 않았지만 저 정도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포탈이라면 초장거리 이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성현조차 보주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포탈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에 간섭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한데 악마종들이 이런 포탈을 자유자재로 뚫을 수 있게 되었다면 성현도 앞으로의 대처에 굉장히 난처해질 수 있었다.
‘뭣보다 저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녹색 빛의 포탈… 보주의 힘을 빌렸을 때와는 달라.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짐작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뿐인데.’
놈을 바라보는 성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여태 저런 포탈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던 존재라면 하나뿐.
바로 성소의 두 번째 가디언이었던 ‘니아글리프’였다.
하지만 당장 그의 앞에 선 상대는 눈대중으로만 봐도 가디언이라 불릴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잘가다가 엇나갔군. 네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맞다.”
“…뭐?”
“성소의 수호자. 그게 바로 나다. 비록 지금 이 모습은 원래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남자가 양팔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난데없는 녀석의 말에 성현은 당황했다.
가디언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둘째치고서라도, 마치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녀석이 대답한 것이다.
“이봐 너, 무슨 헛소리를…….”
그러자 이즈나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군주인 이즈나의 입장에서도 방금 성현의 생각을 읽지는 못했기에, 저 녀석이 난데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 남자는 그녀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이즈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다른 인간이라면 마저 먹어치우고 가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직은 완전한 생태가 아니다. 곧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우드드득!
말을 마친 순간, 남자의 팔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비늘로 뒤덮여 있어 더 이상 팔이라 볼 수 없는 무언가.
단순히 형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불어난 해당 부위의 크기는 거대한 질량을 자랑했다.
‘저, 저건… 가디언의 신체잖아……?’
마치 석상과도 같은 신체와 남다른 크기.
가디언과 세 차례나 혈전을 벌여왔던 성현이었다.
비록 신체의 일부만이 변한 모습이라 한들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무엇보다 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악마종이 아니라 가디언을 상대로 느껴졌던 특유의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콰아아아앙!
변형된 녀석의 기이한 팔이 휘둘러졌다.
실린 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저 남다른 질량에 맞았다간 뼈도 추리지 못할 터.
하나 저 덩치에 비해선 좁은 공간 탓에 미처 피할 곳은 없었다.
쿠우우웅!
“저 자식이……!”
성현의 앞에 선 이즈나가 강력한 방어 마법을 펼쳐내며 놈의 공격을 막았다.
급히 서리망령들의 소환을 해제한 뒤, 둘만을 감싸도록 방어 마법의 밀도를 최대한 올린 덕에 겨우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파괴된 천장과 기둥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고.
남자는 그 사이에 등을 돌려 녹색의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츠츠츠츳!
“주군, 녀석이 달아났습니다!”
“젠장… 포탈이 닫히려고 하잖아!”
녹색 포탈의 주위로 흩어지기 시작한 마력들.
이는 포탈이 곧 소멸하려 하는 것이었고, 이대로 달아난 녀석을 놓칠 순 없었다.
‘놓쳐선 안 돼!’
성현은 무너지는 기둥과 잔해들을 뚫고서 포탈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포탈은 당장에라도 사라지려 하고 있었고, 심하게 무너져 내리는 잔해가 그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그렇다면!”
파아아앗!
성현의 앞에 공간의 균열이 쩌저적 갈라지더니 포탈이 생겨났다.
이는 보주를 이용한 리치들의 포탈이었고, 성현은 달리던 그대로 포탈을 훌쩍 넘어갔다.
1초란 시간도 모자란 상황 속에서 급하게 열린 포탈이었기에, 거리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후우웅!
포탈을 넘어서자 무너진 기둥 너머의 녹색 포탈에 닿았고, 성현은 바로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소멸 직전의 포탈을 넘어온 성현은 땅 위에 착지했고.
그사이 성현의 바로 뒤를 따른 이즈나가 넘어온 뒤, 포탈이 닫히며 완전히 사라졌다.
“…여긴 또 어디야?”
성현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들어선 곳은 방금까지 펄펄 끓고 있던 용암 지대가 아닌 평범한 숲속.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구의 지상은 물론, 일반적인 던전 안에 있을 장소도 아니었다.
성현의 머리 위로 이어진 찬란한 빛의 공간은 지구의 하늘도 아니고 던전의 천장도 아니었다.
“프리아! 듣고 있는 거 아니까 가만 있지 말고 좀 나와 봐. 잠깐은 나올 수 있잖아.”
“주군……?”
난데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는 성현의 행동에 이즈나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시선은 시간이 우뚝 멈춰섬과 함께 굳어 버렸고, 짙은 어둠이 일며 프리아가 나타났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초리.
“수호자가 포탈을 넘기 전에 잡아낼 줄 알았더니… 이번은 실망이구나.”
“뭘 알아야 잡든가 하지. 퀘스트 마커가 왜 저 녀석한테 붙어 있는 건데? 던전 안에선 아무것도 보이질 않더니.”
“놈들도 그대가 봉인석을 노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 당연히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상이겠지.”
“무슨 소리야?”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그대에게 건넨 임무의 목표는 봉인석을 파괴해 이 몸의 해방을 돕는 것이다. 한데 목표가 녀석을 가리키고 있다는 건 하나뿐이지. 성소를 지키고 있던 가디언들이 봉인석을 삼킨 것이다.”
“뭐……? 그런 게 가능하다고?”
프리아의 말에 성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무려 신격을 봉인하고 있는 봉인석이다.
보통의 마법적 장치로는 범접할 수 있을 물건이 아닌 데다가, 위치를 그리 쉽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이 어딘지 아느냐?”
“전혀.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고 싶었어.”
“차원의 틈새. 두 차원 사이에 놓인 중립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뭐……? 여기가? 차원의 틈이라니…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렇게 커보이진 않는데.”
흠칫 놀란 성현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머리 위로 천장에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 뻥 뚫려 있는 새하얀 빛의 공간이라는 것 정도를 제외한다면, 크기나 구조상 던전과 크게 차이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이라면 고작 이런 공간이 전부는 아닐 터.
프리아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들이 나뉘어 있듯, 부서진 세계의 조각들은 모두 파편화되어 차원의 틈으로 추방되었다. 지금 그대가 발을 들인 장소는 차원의 틈 안에 고립된 작은 파편 중에 하나란 소리지. 애당초 그대와 같은 피조물들은 ‘공간’의 개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 말이다.”
“아… 그럼 여기가 지구로 넘어오기 전인 상태의 던전들 중 하나란 건가.”
성현은 잠시 묘한 표정이 되었다.
지구에 등장하던 모든 던전이 이곳을 거쳐 왔을 거라니.
뭣보다 지금 자신이 지구의 차원 바깥에 와있다는 것도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급하게 쫓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로 와버렸네. 다시 못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이 방법을 알고 있으니.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 곳은 그리 그대에게 호의적인 장소는 아닐 테니까.”
쿠구구구!
분명히 시간이 정지되어 멈춰 있을 순간.
성현이 딛고 있던 땅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