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악마사냥꾼 (5)
성현은 화산의 내부로 들어섰다.
깊숙이 이어진 여러 좁다란 통로들을 지나 탁 트인 장소로 들어섰다.
높다란 천장과 기둥 사이로 용암이 흐르는 커다란 지하 동굴.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넓어진 공간만큼이나 많은 수의 악마종이 잔뜩 몰려들었다.
‘그래도 뒤쪽은 안타라스 녀석이 확실히 막고 있고. 이 정도라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네.’
동굴 바깥에 끝도 없이 득시글거리던 악마종들의 수에 비하면 이 안은 양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지상에 나 있던 땅굴들이 여기와 연결이 되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키이이익!”
벽과 바닥을 타며 몰려드는 악마종 조무래기들의 울음소리.
성현은 옆에 선 이즈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양손 가득 전격을 머금었고, 일시에 방출하며 전방을 휩쓸었다.
콰지지지직!
전격에 휘말려 새까맣게 타 버린 악마종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기척을 죽인 채 천장으로 접근하던 녀석들까지도 예외 없이 휘말려 용암 줄기에 빠져 흘러 내려갔다.
그러자 시원하게 쓸려 나간 놈들의 시체 사이로 성현이 앞서 걸어갔다.
‘역시 보통 장소는 아니야.’
처음엔 불을 토해 내고 있는 화산 내부라 지형이 불안정할 수 있어 조심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악마종들을 쓸어 버린 이즈나의 광역 마법에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멀쩡했다.
땅이 뒤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작은 기둥 하나조차 파괴되지 않은 모습.
특별한 마력이 흐르는 게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일반적인 지형은 아니었다.
‘하긴… 이 열기만 봐도 보통 장소는 아니지.’
삐질 땀을 흘린 성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산의 심장부를 향해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열기는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서서히 달아오를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달아오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주변에 용암이 좀 흐른다고 이 정도의 열기로 들끓을 순 없었다.
보통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고위 헌터의 몸뚱이로도 어지간해서는 버티지 못할 정도의 열기였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이즈나의 인상도 슬쩍 찌푸려진 게 보였다.
물론 군단 특성으로 화염 내성을 일부 갖춘 데다, S급 헌터 중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튼튼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는 그들답게 아직까진 불쾌한 정도가 전부였다만.
당장이야 버틸 만한 열기도 어디까지 더 뜨거워질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먼저 도핑을 하지 말고 속성 저항 포션을 준비해 둘 걸 그랬나. 아니, 뭐 갑자기 이런 던전을 공략하게 될 줄도 모르긴 했으니… 이제 퀘스트 마커도 꽤나 가까워졌고.’
이마의 땀을 닦아 낸 성현은 악마종의 시체들을 지나치며 나아갔다.
이젠 불과 수십 미터도 안 남은 거리에 퀘스트 마커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저건?”
그때, 흘러내리는 용암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등장했다.
커다란 몸집에 살벌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불의 거인.
굉장히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타난 녀석은 악마종이나 몬스터가 아니었다.
“불의 정령……?”
용암 속 거인을 마주한 성현이 멈칫했다.
지금 자신이 마주한 저 ‘정령’이란 존재들은 몬스터로 분류되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몬스터가 아니라 헌터의 능력으로서, 인간과 함께 몬스터와 싸우는 ‘소환수’의 개념이었다.
물론, 가끔 초짜 정령사들이 통제권을 잃어버릴 경우, 인간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긴 한다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존재라는 것.
‘하지만 이런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고난도 던전 속에 정령사 클래스의 헌터가 먼저 들어와 있을 리는 없을 테고… 정령이 왜 이런 곳에서 나타난 거지?’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성현의 소환수들과는 달리, 정령사와 계약된 정령들은 거리상의 제약이 있었다.
거기다 소환수들이 다들 그렇듯이, 소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마저도 한정되어 있었기에.
이런 장소에서 정령이 불쑥 튀어나온 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성현을 내려다본 불의 정령이 커다란 화염 뭉둥이를 들어 올리기 전까진 말이다.
“크아아아!”
콰아아앙!
‘뭐… 뭐야!’
불의 정령이 몽둥이를 내리찍으며 바닥을 산산조각 내었다.
살벌하게도 움푹 파인 바닥 사이로 용암이 줄줄 흘렀고, 뒤로 물러났던 성현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싸우자는 건가?”
“어딜 감히……!”
하지만 성현이 나서기도 전, 격분한 이즈나가 먼저 팔을 뻗었다.
츠츠츠츳!
이즈나의 주위로 흐르는 차가운 냉기.
주변의 열기들을 가뿐히 밀어낸 그녀의 냉기는 한데 뭉쳐져 휘몰아치는 폭풍이 되었고.
정면으로 달려들던 불의 정령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드드득!
“그아아아아!”
냉기에 집어삼켜진 불의 정령은 단숨에 얼어붙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이즈나의 검이 번뜩이며 녀석의 목과 가슴팍을 깊숙이 베어 냈다.
콰직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 정령의 파편들.
이즈나는 혈마법이 아니더라도 여러 원소 마법에 능통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평소 화력이 필요한 때엔 주로 화염 마법을 즐겨 사용하긴 했지만, 다른 쪽도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사용한 빙계 마법도 그중 하나였다.
“…정령의 시체라. 이런 건 난생 처음 보네.”
쓰러진 불의 정령에게 다가간 성현이 중얼거렸다.
바닥에 산산이 흩어진 정령의 파편들.
마치 돌무더기처럼 쌓인 놈의 시체는 정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성현에게도 결코 익숙한 광경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봤다니, 어째서죠?”
“원래 헌터가 소환한 정령은 시체가 남지 않아. 아무리 심한 꼴로 당한다 한들 소환이 해제되어 흩어질 뿐이지.”
“아…….”
쿠구구구궁!
그때, 잠잠하던 화산 내부가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이즈나가 사용한 마법 때문일 리는 없을 터.
빙계 마법은 화염이나 전격에 비해선 얌전한 축에 속하는 마법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성현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곧 전혀 다른 이유로 그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자, 잠깐… 퀘스트 마커가 움직였어……?”
화산 내부를 가리키고 있던 퀘스트 마커가 움직였다.
수십 미터도 남지 않았던 거리에서 더 안쪽으로 깊숙하게 움직였고, 심지어 그가 퀘스트 마커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성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퀘스트 마커가 움직이다니. 이게 무슨…….’
쿠구구궁!
땅의 흔들림이 잦아든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시점.
넋 놓고 있을 틈도 주지 않고서 용암을 헤치며 불의 정령들이 사방에서 잔뜩 나타났다.
무려 수십이 넘는 숫자.
‘젠장, 귀찮게 됐는데.’
방금 정령 한 녀석을 쓰러뜨리는 거야 간단했다.
하지만 정령의 특성상 한 번에 끝을 내지 못하면 놈들은 아주 질긴 전투 지속력을 보였다.
계약자의 마력이 바닥난 것만 아니라면, 그 악마종들보다도 한 수 위에 있을 정도였다.
이즈나가 한 개체에 사용하기엔 꽤나 많은 양의 마력을 주저 없이 사용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직 마력이 넉넉하긴 하지만… 이 녀석들을 한 번에 다 처리하기엔 장소 때문에 충분한 위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즈나 역시 성현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잡몹을 때려잡듯 쓸어버리기엔 불의 정령들의 스펙이 상당했고, 지금 그들이 있는 ‘화산’이라는 위치상 저 녀석들의 약점인 냉기 마법이 제 위력을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렇게나 열기로 들끓는 곳에선 마력도 더 많이 잡아먹는 데다가 위력도 반토막이 날 뿐.
“그럼… 우선 열기를 좀 식혀 줘야겠네.”
성현은 주저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뻗었다.
그가 외부에서 한창 쏟아지는 S급이나 고위급 던전들을 처리하던 때, 외부 던전들을 처리하며 새롭게 합류한 무리들이 있었다.
악마종들의 습격에 대비해 충분히 늘려 둔 군주와 수하들이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 활약하기 딱 좋은 녀석들도 있었다.
스스스슷!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망령이 성현의 양 옆에서 등장했다.
영혼 형태를 하고 있는 보스급 몬스터이자, 둘이 함께 한 던전에 군림하고 있던 쌍둥이 보스, 리아와 게아크였다.
“시작해.”
성현의 말이 떨어지자, 두 서리 망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웅!
곧이어 두 보스의 뒤를 이어 그림자 속에서 쏟아진 망령들의 등장.
수백이 넘는 망령들이 나타나 마력을 퍼부었고, 그들의 주위로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수속성을 다루는 게아크와 그 수하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파도가 쏟아지며 주변을 완전히 뒤덮었고.
고압의 물줄기가 활활 타오르던 불의 정령과 용암들을 함께 뒤엎었다.
물론 불의 정령은 고작 물을 뒤집어썼다고 흩어질 만한 녀석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다음 곧바로 이어진 또 다른 군주 리아와 그녀의 수하들이 한꺼번에 냉기를 쏟아 냈다.
쩌저저저적!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던 화산 속 공간을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어 버린 서리 망령들의 합공.
A급 던전을 공략하고서 합류시킨 두 보스다.
비록 기존 군주들에 비해선 한참 처지는 수준이라곤 해도, 그동안 8배의 경험치를 부여하는 지하 던전에서 계속해서 성장을 거듭했고.
둘 모두 어지간한 S급 던전을 가뿐히 넘어서는 400레벨 후반대의 레벨을 지니게 되었다.
쩌어어엉!
“그아아아아!”
“역시… 한 번에 보내 버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군.”
온몸을 얼어붙게 만든 냉기조차 떨쳐 내며 화염을 다시 태우는 불의 정령들.
놈들은 예상대로 질기기 짝이 없는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성현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공간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미 주변의 공기는 완전히 싸늘해진 뒤였다.
서리망령들은 화산의 열기를 잠시나마 완전히 죽여 놓는 데 성공했고, 그것만으로도 저들의 역할은 충분히 해내었다.
“이즈나.”
“네, 주군!”
성현의 부름에 이즈나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성현은 이미 ‘마력의 심장’ 특성을 가져와 있었고, 이즈나 역시 자신의 마력을 끌어모은 참이었다.
그리곤 동시에 사용된 두 갈래의 냉기 마법.
콰과과과과!
커다란 냉기의 폭풍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성현과 이즈나가 합을 맞춘 냉기 폭풍은 서리망령들이 함께 쏟아부은 냉기의 위력조차 아득히 뛰어넘었고.
폭풍 속에 휘말린 불의 정령들은 모두 얼어붙은 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 정도 위력이 나올 줄은.”
“그러게.”
마법을 직접 사용한 성현과 이즈나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풍의 위력.
그림자를 통해 이어진 그들이 같은 특성까지 활용하며 하나의 마법을 사용하자 더욱 시너지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공간을 넋 놓고 구경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퀘스트 마커의 위치가 지금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어. 곧장 쫓아간다. 여기서 놓쳐선 안 돼.”
“알겠습니다.”
앞장선 성현은 부서진 정령의 파편들을 지나쳐 갔다.
헌터 중에 이 정도의 수준과 숫자의 정령들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없었고, 저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결코 놓쳐선 안 될 무언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