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히든 던전 (2)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찬일이 입을 열었다.
한때 청성의 수뇌부에서 이지스의 간부가 된 그는 최근 증가한 S급 던전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지라, 이번 사태에 대한 낌새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한승희는 문제를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악마종이라는 새로운 몬스터의 등장은 단순히 던전들이 쏟아지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위협적이었고, 이렇게 따로 불려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이성현이 알고 있는 것들도 대부분 말해 줬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면서 또 어디론가 훌쩍 날아갔지만.”
“고위 헌터들의 몸까지 차지하고서 사람들 틈 속으로 숨어든 몬스터라… 그런 게 가능했다니 확실히 쉽진 않겠어.”
성찬일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한승희나 성찬일은 성현이 부리는 마족 군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성현과 함께 등장한 국내 S급의 헌터들이었고, 이지스 길드의 간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이지스의 간판 중 하나로서 그렇게 외부에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간부들은 인간이 아닌 성현의 군단 하에 있는 ‘몬스터’였다.
이는 단순 간부뿐만이 아니었다.
산하 길드가 아닌 이지스 본 길드에 소속된 모든 헌터가 네크로맨서인 성현이 다루는 언데드들이었다.
덕분에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지닌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나마 충격이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넘어가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북미와 동구권 헌터들은 어쩌다 몸을 빼앗긴 거지? 아무리 상상하기도 어려운 몬스터들이 노린 거라곤 해도, 쉽게 당할 만한 녀석들은 절대 아니었는데.”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종의 희생양이 된 자들은 미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한 거대 세력권의 수뇌부들이었다.
양쪽 모두 성현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들이 포진해 있는 지역이었고, 그 명성엔 전혀 과장이 없었다.
단지 여태까지 하나로 뭉칠 구심점이 없었을 뿐.
한데 그런 세계구급의 헌터들이 연합까지 한 상태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만큼 단숨에 몬스터에게 당했다는 것은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나도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지. 뭐, 내가 대강 추측하기론 달콤한 미끼를 앞뒤 안 가리고 덥석 물었다가 피를 본 거 같지만.”
“미끼라고?”
“그래, 그 더럽게 불길한 기운을 풀풀 뿜어 대던 힘 말이야. 딱 봐도 구린 냄새가 나잖아. 아무리 시스템이 개입했다곤 해도 무슨 생각으로 냉큼 받은 건지.”
한승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물론 확신에 찬 대답은 아니었지만, 적이었던 자신이 봐도 한참 수상해 보이는 힘이었다.
자신들이 지금 받아들인 성현의 그림자와는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츠츠츠츳!
그때, 한승희와 성찬일의 몸에서 옅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아주 잠깐 요동치던 그림자는 곧 사그라들었다.
“이건…….”
“또 인가.”
그들에게 주어진 그림자가 강화된 모습.
그들로선 처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림자로 인한 군단 강화 효과가 새롭게 추가되거나, 수치가 증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느낌상 근력이 소폭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강해진다니… 기분이 묘하군.”
“어쨌든 그렇다는 건… 어디선가 네 주인의 힘이 더 강해졌다는 거겠지?”
한승희가 난데없이 뒤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곳은 방 안의 텅 빈 벽뿐이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찬일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스르르륵!
“뭐, 뭐야?”
흠칫 놀란 성찬일이 입을 열었다.
커다란 낫을 지고 있는 ‘밴시’가 그들이 서 있는 방 안의 벽 사이로 불쑥 나타났다.
그것도 보통 밴시가 아닌 보스 몬스터 특유의 위압감을 뿜어 내는 녀석.
그림자 군단의 밴시 여왕, 메이트리아였다.
“굳이 소개는 안 해도 되지? 너 하고도 이미 구면일 테니.”
“…그렇긴 하지만.”
“국내에 숨어든 악마종 놈들이 언제든 길드나 도시를 공격할 수 있다면서 두고 갔어.”
둥둥 떠 있는 커다란 밴시에게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녀석의 레벨만 500이상이었으니, 어지간한 고위 헌터들 정도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악마의 힘을 받은 상태에서 계산을 해 보더라도 말이다.
“뭐…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이런 녀석들이 도시를 돌아다니면 소란이 일 텐데?”
성찬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네크로맨서인 성현이 이런 몬스터들을 다룬다는 것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그들하곤 이야기가 달랐다.
겉보기엔 영락없이 무시무시한 몬스터일 뿐.
검은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는 헌터들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 입장에선 구별할 방법도 없었다.
그것도 보통 몬스터가 아니니 가는 곳마다 난리가 날 것이었다.
“어차피 남들 눈엔 안 보이니 괜찮아. 이 녀석들은 영체화가 가능하거든. 방금 벽을 불쑥 통과한 것처럼.”
500레벨을 돌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게 생긴 밴시들의 능력.
영체화라는 새로운 특성 덕에, 일반적인 비각성자들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게 활동이 가능했다.
그나마 시스템을 적용받는 헌터들과는 달리, 몬스터에게 이런 새로 특성이 생기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워낙 큰 폭으로 성장한 덕분이었다.
츠츠츠츳!
말하기가 무섭게 그들의 주위로 스멀스멀 나타난 밴시들.
그들 모두 영체화가 되어 있었다.
새롭게 개화한 그림자 군주의 능력은 그 밑의 수하들에게도 모두 적용이 되었다.
“이 녀석들뿐만이 아니야. 각 지부나 도시 곳곳에 뿌려 뒀더라고. 지금도 악마종들에 대해 감시하거나 쫓고 있지.”
성현은 자신의 그림자 군단 중 사람들 틈에 섞이기 용이한 녀석들을 밖에 풀어 두었다.
대표적으로 기존에도 외부에서 곧잘 활동하던 이즈나나 로칸, 그리고 네이아까지.
해당 군주들의 수하들도 모두 외부 활동 중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밴시들처럼 꼭 마족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아주 작은 몬스터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몬스터 같이, 헌터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수하들은 대부분 동원했다.
“여기 있는 메이트리아만 봐도 알겠지만 우리 같은 S급의 기준에서도 보통 전력이 아니야. 숫자가 적지도 않고, 덕분에 우리 일은 좀 편해지겠지. 물론 녀석들한테 공을 넘겨줄 생각은 없다만.”
“음? 소환수들과 경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당연하지. 그 자식들의 목을 직접 치는 건 내 몫이야. 다른 건 몰라도 놈들에게 한번 당해 버린 이상 꼭 돌려줄 작정이니까. 얌전히 사냥이나 당할 몬스터 놈들 주제에…….”
이를 빠득 간 한승희가 의지를 불태웠다.
예상 못한 악마종의 공격에 당해 위험할 뻔했던 만큼, 그녀로서도 헌터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 * *
쿵쿵쿵!
투박한 북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지하 던전 안에서 울려 퍼지는 군단의 진격 소리.
최소 수만이 넘는 오크 군단이 전진하며 주변 숲들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후, 많기도 하네.”
듬성듬성한 나무들 사이로 엄청나게 몰려드는 오크들.
성현은 현재 지하 던전에 위치한 16번째 필드를 공략하는 중이었다.
여기 있는 숫자도 필드 전체에 있는 오크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숫자가 아닌 적들의 질이었다.
“오크라면 고위 헌터들은 거의 볼 일 없는 몬스터인데… 이런 식으로 마주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크아아아아!”
포효를 내뱉는 오크들의 함성 소리.
멀찍이서 보고 있는 것임에도 놈들은 일반 오크들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달랐다.
일반 오크종이 아닌 온몸이 위협적인 불그스름한 피부로 덮여 있는 ‘크림슨 오크’였다.
외부에선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상위종이다만, 이곳 필드에선 어딜 쳐다봐도 이 오크 녀석들만 보일 만큼 많았다.
쿠우우웅!
“그아아아아!”
성현과 가까운 쪽에 포진해 있던 해골 병사 군단과 맞부딪히며, 격전을 펼치고 있는 크림슨 오크들의 모습.
보스도 아닌 일반 몬스터들이 군단 강화 효과를 받고 있는 성현의 그림자 군단과 밀리지 않고 싸우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S급 던전의 수준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양 군단의 접전은 막 부딪혔을 때였을 뿐, 그 이후론 점차 한 곳으로 기울어갔다.
십만을 가뿐히 넘어서는 성현의 해골 병사 군단이었지만, 그를 상회하는 엄청난 생산량을 통해 하나같이 고품질에 마법 부여까지 된 갑주, 무기를 두르고 있었다.
척! 처억!
훈련이 잘 되어 방진까지 제대로 짜며, 해골 기사들의 지휘대로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덕분에 해골 병사 군단은 장비와 전술적 우위를 토대로, 무작정 달려드는 야만스런 크림슨 오크들을 섬멸해 나가고 있었다.
파바바박!
후위에선 화살비까지 쏟아 내며 오크들을 제압하는 모습.
누가 텅 빈 해골 머리 아니랄까봐 활 같은 건 쓰지도 못하던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엘프들인 줄 알겠네.”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하, 알았어. 취소.”
다크엘프의 군주, 카론이 발끈하며 말하자 성현이 손을 내재었다.
확실히 활 솜씨라면 다크엘프들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일반 다크 엘프들은 바깥에서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악마종들을 추적하고 있었고, 그들의 군주인 카론은 성현의 바로 곁을 지켰다.
다른 마족 군주들은 바깥에서 악마종을 쫓고 있는 걸 생각하면 의외인 부분이었다.
“그럼 슬슬 움직이자고. 본대가 치고 나간 덕분에 나도 접근이 쉬워졌으니.”
해골 병사 군단이 크림슨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성현은 등을 돌려 옆길로 새어 나갔다.
현재 그에게 당장의 주목적은 필드 공략 및 점거가 아니었다.
“위치와 상당히 가까워졌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굳이 카론이 거들지 않더라도 그의 눈엔 가까운 거리의 화살표가 둥둥 떠 있던 참이었다.
16번째 필드 내에 위치한 퀘스트 마커.
화살표는 커다란 바위 아래 아무것도 없는 땅 밑을 가리켰다.
“여긴가?”
맨 땅 위에 선 성현은 인벤토리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곤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내들었다.
[결계 포식자의 단검]
[등급 - 최상급]
[내구도 – 파괴 불가]
[무기 공격력 1159~1486]
[환영저항], [봉인파쇄], [마력흡수]
던전 내 희귀 재료들을 들이부어 만든 최상품의 단검.
마나의 맥에서 리치들의 군주인 네이아가 직접 마법 부여까지 해 가며 완성시킨 걸작이었다.
전투 시에 사용할 단순 무기로서의 성능도 뛰어났지만, 가장 큰 의미는 바로 결계를 파쇄하는 특수한 검이라는 것.
콰직!
우우우웅!
성현이 힘껏 단검을 내리찍자, 아무것도 없던 땅의 모습이 마구 비틀리기 시작했다.
감춰져 있는 장막 너머를 들춰내고서 환영이 풀리는 것이었고.
곧이어 감춰져 있던 지하 동굴의 입구가 훤히 드러났다.
이전까지 봤던 일반적인 던전도, 가디언이 지키고 서 있던 성소도 아닌 새로운 장소.
“좋아, 제대로 찾았군.”
성현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발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