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음지의 존재 (3)
“이런 녀석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재난관리국의 국장, 설기태가 중얼거렸다.
그의 바로 뒤편엔 적지 않은 수의 흑련 소속 헌터들이 섞여 있었다.
“이쪽이야말로.”
흑련의 길드장 서연화도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재난관리국과 흑련.
양측 모두 이지스 휘하에서 정보 수집을 맡은 조직이지만, 워낙 서로의 사이가 좋지도 않고 껄끄러운 관계이다 보니 줄곧 독자적인 루트로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임시로 이지스를 이끌고 있는 한승희의 주도하에 힘을 합쳐 전국의 정보들을 샅샅이 캐내었다.
아무리 놈들이 꼼꼼하게 숨어들어 간다 한들, 한국 내에서 가장 큰 두 정보망이 협력하며 겹쳐지자 수상한 움직임들을 속속들이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이지스……?”
“여, 여길 어떻게!”
갑자기 등장한 이지스 측 산하 헌터들의 등장.
혼비백산이 된 현장에서 한국 측 조직원들은 허둥지둥대며 무기를 꺼내들었다.
“다… 당황하지 말고 싸워! 어서!”
곧이어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드는 조직원들.
사방에서 꼼짝없이 포위를 당한지라,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을 뚫기 위해 이지스의 헌터들과 맞부딪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카아아앙!
“정말 들었던 대로 달라졌네.”
한승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이지스의 산하 길드원들을 상대로, 범죄 조직원들은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B급의 헌터를 상대로 정면에서 부딪친 검을 멀쩡히 받아내는 모습만 봐도, 이런 마약 밀수나 벌이는 중소 규모의 범죄 길드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대의 저력이었다.
물론 흑련과 재난관리국에서 이미 사전정보들을 입수한 한승희로선 그런 부분들에 대해 훤히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 수준을 생각하면 확실히 큰 폭으로 변했어. 갑자기 변했다길래 뭔가 했더니…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도 그렇고, 외국 헌터도 아닌데 시스템으로부터 붉은 힘을 받기라도 한 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상승 폭.
다만 새로 얻은 힘만을 믿고서 달려드는 저들의 모습을 바라본 한승희로선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촤아아악!
“커헉……!”
“검 휘두르는 동작부터가 어설프잖아.”
이지스의 산하 길드원에게 하나둘 당하기 시작한 조직원들.
처음엔 붉은 힘 덕인지 꽤 버티는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픽픽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이지스 측에선 부상자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 외국 연합 세력들과의 혹독한 싸움 이후.
이지스의 산하 길드 소속 헌터들은 모두 그림자를 지니게 되었고, 만만치 않은 군단 강화 효과들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 반면 상대는 주로 사람을 상대로 하던 중소규모 범죄 조직의 소속원들이다.
저번이야 해외의 내로라하는 고위 헌터들이 들이닥쳤다지만, 지금 저 베이스도 안 된 헌터에게 저런 힘을 쥐여 봤자 그 한계는 뚜렷했다.
이지스와 함께하기 전 시점의 흑련과 견줄 몇몇 대규모 범죄 길드가 아닌 이상, 그들의 위협이 되진 못했다.
“제… 젠장, 이게 대체……!”
일본 측 조직 간부가 이를 빠득 갈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번 사건에 휘말려 버린 그들 역시 이미 주변을 빡빡하게 채운 헌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국을 너머 해외 사업에도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실력엔 자신 있다는 거지만, 이지스라면 그들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있을 레벨이 아니었다.
“이, 이걸 어쩌죠?”
“물러난다! 이런 데서 싸워 봐야 개죽음일 뿐이야. 저 녀석들이 서로 치고받는 동안 어서 달아나야…….”
터엉!
“어딜 가려고.”
달아나려던 일본 측 헌터들을 한승희가 막아섰다.
이지스와 흑련을 건드린 행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한들, 얌전히 놓아줄 순 없었다.
“너희 같은 쥐새끼들이 한국 안에서 설치고 다니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 이미 경고했을 텐데.”
“으… 으아아아!”
콰득!
한승희는 일본 측 간부를 단숨에 내다꽂았다.
목이 부러진 채 뻗은 그의 모습에 파랗게 질린 일본 측 헌터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었다.
이들에겐 붉은 힘도 없었으니 대항할 의지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정리가…….”
콰아아앙!
“…뭐야?”
하지만 그때,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던 한국의 범죄 조직원 사이로 걸어 나온 한 남자.
그 바로 앞엔 방금 그의 손엔 쓰러진 산하 길드원 네다섯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눌러쓴 후드 사이로 흘러나오는 남자의 말.
짙은 분노가 섞인 그의 기세에 다른 조직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승희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물러나!”
콰과과과광!
남자의 검이 크게 휘둘러지며 검격이 쏟아져 나왔다.
오른 편에 쌓인 컨테이너들이 갈기갈기 찢겨졌고, 범위에 들어선 헌터들도 튕겨져 나갔다.
아군과 적을 가릴 것 없이 말이다.
“큭… 대체 이게…….”
머리를 부여잡은 설기태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S급 헌터인 그조차도 한승희의 외침을 미리 듣지 못했더라면 꼼짝 없이 휘말렸을 만큼 빠르고 난폭한 공격이었다.
녀석들을 둘러쌌던 포위망은 순식간에 구멍이 뻥 뚫린 꼴이 되었고.
남자의 등장에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저 녀석이 음지의 길드들을 움직인 진짜 배후인가…….’
남자를 바라보는 한승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와 이지스 길드에서는 처음부터 범죄 조직들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뒤에 있을 진짜 배후에 대해 주목했다.
러시아와 미국 길드 측 헌터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갑자기 사라졌고, 그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 후드를 눌러쓴 남자에게서 나온 것은 외국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조심……!”
카아아아앙!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서 설기태에게 달려드는 남자.
다른 헌터들로선 끼어들지도 못할 만큼 엄청난 공세였고, 설기태는 주르륵 위태로이 밀려났다.
그러자 한승희가 그 사이로 끼어들며 설기태를 도왔다.
“젠장… 최소 길드장급 이상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지.”
한승희는 재빨리 품속에서 포션 병을 꺼내들었다.
성현이 그녀를 비롯한 주요 수뇌부들에게 몇 개씩 건네고 갔던 최상급의 도핑 포션이었고, 세 개를 중복해서 마셨다.
세계 최고 수준의 포션이라는 성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정말 확연히 달라진 움직임.
그러자 설기태 역시도 한승희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에 재빨리 도핑 포션들을 들이켰다.
후우우웅!
남자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설기태의 칼날.
양쪽 모두 도핑 포션의 도움과 그림자의 강화 효과까지 받게 되자, 두 S급 헌터의 합공은 아주 매서워졌다.
언제 또다시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지스의 수뇌부인 그들 역시 그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거슬린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
곧이어 진홍빛 기운이 일렁이며 남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가속되었고, 역으로 그들 둘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방금까지는 전력도 아니었다는 건가?’
두 명이서 합공을 벌이는 것임에도 버거웠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건지, 국내 헌터 중에 이만한 적수가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지금 느껴지는 진홍빛의 기운.
여태 상대했던 그 붉은 기운들과는 뭔가 느껴지는 감각부터가 달랐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들 만큼, 더욱 섬짓한 기운이었다.
콰과과광!
그때, 남자가 검격을 내리찍으며 지반의 일부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예상치 못한 수에 순간적으로 둘은 모두 균형을 잃었고, 그는 둘 중 한승희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급히 눈동자를 굴려 보았지만 몸이 이미 살짝 들려 있는 데다가 피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남자가 휘두른 검이 한승희의 코앞까지 다가선 순간.
남자의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렇겐 안 되지.”
촤아아아악!
남자의 등이 크게 베이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단숨에 뒤를 잡고선 단검을 휘두른 여우 가면의 여성, 서연화가 그의 등을 베어 가른 것이다.
“커억……!”
기습을 당한 남자가 튕겨 나갔고, 검붉은 피를 한 가득 토해냈다.
워낙 깊숙이 베인지라 아무리 튼튼한 몸뚱이를 지닌 헌터라 해도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였다.
“아예 반으로 갈라 버리려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더 튼튼하네.”
“이봐, 아슬아슬했잖아.”
“그래도 딱 좋았어.”
설기태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지만, 한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자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아주 정확한 타이밍이었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그들의 작전은 아주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흑련의 길드장인 서연화 스스로가 S급의 헌터라는 건, 외부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거기다 스스로 기척을 감추는 데에도 굉장히 능했고, 덕분에 지금처럼 완전히 뒤를 잡을 수 있었다.
챙그랑!
그때, 후드 아래 입가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을 내동댕이쳤다.
처음엔 항복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나을 텐데.”
“닥쳐라……. 네놈들 따위가 감히…….”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이미 크게 벌어진 상처다.
그리로 잔뜩 피를 쏟아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헌터라 한들, ‘인간’이라면 싸움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나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의 온몸이 더욱 짙은 진홍빛의 기운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그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우드드득!
몸을 비트는 남자의 신체가 기이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주마!”
카가가가각!
소리친 남자의 등 뒤편으로부터 수많은 가시가 솟아났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고, 뻗어진 가시들은 순식간에 그의 뒤편 가까이에 서 있던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자, 잠깐……!”
“끄아아아악!”
이지스 측 헌터들은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가시에 꿰뚫리고 만 이들은 전부 그를 따르던 수십의 조직원들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가시에 몸이 관통된 채 즉사하진 않은 그들의 몸뚱이를 자신에게로 끌고 오고선 입을 쩍 벌려 하나하나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저… 저게 무슨……!”
살아있는 인간들이 남자의 후드 아래로 잡아먹히며 비명을 토해냈고, 경악한 이지스 측 헌터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피와 내장이 후드득 쏟아졌고, 피를 한껏 뒤집어쓴 남자는 다시 그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마주한 한승희.
사람들을 모두 먹어치운 남자의 상처는 어느새 아물었고, 불길한 진홍빛 기운은 더욱 크기가 커져 있었다.
수없이 고위 몬스터와 마주해가며 생사를 넘나든 그녀조차도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