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수복 (2)
카아아앙!
검이 맞부딪히며 성현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성현은 슬쩍 인상을 찌푸린 반면, 그와 검을 부딪힌 바테는 여유롭게 한 걸음 다가섰다.
“들었던 대로 마법계 헌터답지 않은 힘이군. 하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제대로 하지 그래.”
성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자 바테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츠츠츠츠츳!
바테의 주위로 붉은 마력의 기운이 일렁였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미 그 스스로가 유럽 최강의 자리를 차지한 데다가, 세계 정상급 헌터로서 군림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힘을 대폭 증폭시켜 주는 붉은 힘을 손에 넣었고, 그 힘은 어지간한 최상위 헌터들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상승폭이 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싹한 살기는 성현이 여지껏 상대해 온 그 어떤 헌터 중에서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적당히 하고 내뺄 생각이라면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여기서 끝장을 낼 테니까.”
이지스의 길드장 이성현이라면 한국 내에서 노릴 수 있는 퀘스트 목표 중 가장 큰 대어다.
미국과 러시아 세력들이 아래에서 득세하고 있는 와중,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그를 처치하거나 이지스를 무너뜨려야만 했다.
그리고 길드장이 홀로 나타나 준 이 좋은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콰아아아앙!
코앞까지 들이닥친 바테가 검을 내리찍었다.
성현은 잽싸게 몸을 뒤로 빼냈지만 빗나간 검이 내리찍히며 땅을 쩌저적 박살 내 놓았다.
그것도 보통 범위가 아닌지라 훌쩍 물러 섰던 성현이 딛을 주변의 발판마저 뒤흔들리게 만들었다.
‘큭, 역시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네.’
콰아아아앙!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세 사이, 아슬아슬하게 검이 날아들었다.
박차고 들어온 상대의 저돌적인 전투 방식.
정복자 바테.
유럽에서 불리는 그의 이명답게 전투 방식은 저돌적이기 짝이 없었다.
검에 실린 힘도 대단한지라 몰아쳐 오는 저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치다간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거나 균형이 흐트러져 당할 뿐이었다.
호쾌해 보이는 싸움 방식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역인 상대다.
‘하지만…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 범위 안이야.’
물러서기만 하던 성현의 눈빛이 바뀌었다.
헌터로 데뷔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성현이다.
못해도 기본이 10년을 넘곤 하는 S급 헌터들의 평균 경력을 생각하면 완전히 새파란 신참에 얼굴이 알려질 새도 거의 없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달리, 바테는 초창기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아주 유명한 헌터였다.
당연히 오랜 활동 기간 동안 주목을 받은 만큼 알려진 것도 많았고, 성현도 그의 싸움 방식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쪽은 자신뿐이라는 것.
‘물론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 유럽에서 돌던 뒷소문도 그렇고 내가 그랬듯 감춰 놓은 능력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걸 먼저 꺼내 놓게 만드는 수밖에.’
콰아아아앙!
“키이이이익!”
바닥이 솟구쳐 오르며 거대한 괴수가 나타났다.
S급 던전에나 나타나곤 하는 곤충형 몬스터인 자이언트 앤트.
녀석은 성현에게로 달려들던 바테를 집어삼키기 위해 커다란 집게턱을 쩍 벌렸다.
“드디어 꺼내든 건가? 하지만!”
쩌어어억!
검을 번뜩인 바테는 단숨에 자이언트 앤트를 베어 갈랐다.
검이 닿는 것보다도 더 깊숙이 베어 가르는 그의 특성.
자이언트 앤트나 그와 비슷한 거대 괴수들을 도륙해 내는 데에는 아주 일가견이 있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림자를 뻗었던 성현이 은밀히 소환해 두었던 군단은 한두 마리로 끝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궁!
곳곳에서 솟구쳐 나온 몬스터 무리.
자이언트 앤트들이 만든 통로들을 통해 군단의 병력들이 기습적으로 나타났다.
최소 수천에서 수만에 가까운 수의 자이언트 앤트와 해골 병사가 쏟아지는 광경.
하지만 그를 목격한 바테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뭔가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지스의 길드장인 성현이 대규모 소환수를 다루고 있다는 것쯤이야 이미 정보를 전해 듣고선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다.
물론 실제로 헌터가 혼자 이만한 숫자의 소환수를 다루는 것은 그조차 처음 본 광경이었지만.
S랭크 헌터가 되기 위해선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콰아아앙!
군단의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나가기 시작한 바테.
분명 성현의 그림자를 품어 강화 특성을 적용받는 군단의 몬스터들은 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고위 헌터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나, 그들의 공격은 제법 위협적이긴 하나 그에겐 전혀 닿지 못했다.
그의 앞을 막던 수십 마리의 자이언트 앤트, 그리고 수백여 마리의 해골 병사가 도륙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역시… 일반 수하들을 앞세운 소모전으로 잡을 만한 상대는 아니야. 이대로 날뛰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지.’
[군주,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의 심장’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화르르륵!
그림자를 가져온 성현의 몸 주위로 커다란 마력이 일었다.
곧이어 성현은 마법을 발동시키며 자신의 머리 위로 화염구들을 잔뜩 만들어 냈다.
“마침 공격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까지 늘어났을지 궁금했던 참인데… 어디 한번 구경해 볼까.”
뜨거운 열기로 이글거리는 거대 화염구들의 모습.
그동안 강해진 이즈나의 마법을 베이스로 한 데다가, 주체가 될 성현의 마력 스탯 수치 역시 1천을 가뿐히 넘어서 있었다.
둘의 시너지로 발동될 마법의 위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콰과과과광!
“무… 무슨!”
주변 거리를 향해 연달아 떨어져 내린 화염구의 세례.
사납게 터져 나오는 불길들은 위력뿐 아니라 그 범위도 굉장해 피하기 어려웠고, 몸을 날린 바테조차도 충격파의 범위 내에 휩쓸리며 순간 균형을 잃었다.
“키이이익!”
동시에 그 뜨거운 불길 사이로 더더욱 몰려드는 자이언트 앤트와 해골 병사 군단.
날아든 화염구에도 그들의 피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지시를 내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처럼 마법의 범위와 위력을 인지하고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이런 수준의 공격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다니… 아무리 마력이 주 스탯인 네크로맨서라도 곁가지로 지니고 있을 만한 능력이 아니다.’
쏟아지는 마법과 군단을 맞이한 바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면에서 맞붙는 근접전에 강한 그는 이런 대규모의 공격 마법을 다루는 마법계 헌터와는 상성상 좋지 않았다.
물론 거리만 좁힌다면 얼마든지 끝장을 낼 수 있겠지만, 주변 소환수들까지 달려들며 방해를 해 대니 더욱 골치 아팠다.
물론 성현은 이미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좋은 상성의 카드를 꺼내든 것뿐.
S급 특성인 백귀야행 덕에 무수히 많은 특성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는 성현으로선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싸움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콰아아아아!
‘큭……!’
이번엔 솟구치는 불기둥이 뜨거운 열기를 토해 냈고, 어렵사리 비집어 들어오던 바테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고집을 부렸다간 두 다리가 통째로 익어 버릴 뻔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하, 믿기지가 않는군.’
자신들이 퀘스트로 얻었던 붉은 힘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이런 능력을 보이다니.
외국 헌터들이 쏟아지며 위기를 맞았지만, 동시에 위기를 극복해 나가며 굵직한 퀘스트들을 연달아 깨게 된 성현이다.
덕분에 성현은 그렇지 않아도 빨랐던 성장 속도에서 더욱 큰 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퀘스트를 위해서 찾아왔을 뿐인 이런 안중 밖의 조그만 국가에서 생각지도 않은 강적을 만나게 된 바테로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이대로 여유를 부리고 있다간 소환수와 마법들 사이에 파묻힌 채 당해 버리고 말 거라는 결론이 그의 머릿속에서 났다.
“우습게 봤던 건 사과하마. 인정해 주지.”
“음……?”
달려들고 있는 군단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멈춰 선 바테의 모습.
“언젠가 맞닥뜨릴 미국과 러시아 놈들을 상대로 꺼내기 위해 감춰 두고 있던 능력이었다만… 전력 노출 정도는 감수하겠다. 분명 이 주위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이 있을 거란 걸 알면서도 말이야.”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불과 몇 달 전에나 등장했다고 알려진 변방의 헌터다.
한데 그런 자가 붉은 힘을 받아 강해진 자신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젠 단순히 퀘스트가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번이 세계의 판도를 뒤엎을 이레귤러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자리에서 제거한다!”
콰아아아앙!
바테는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거대 개미를 맨손으로 내려찍으며 분쇄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기류.
어느새 그의 전신이 노란빛으로 가득 차며 일렁이고 있었다.
불길함을 가득 머금던 붉은 마력의 기운을 뒤덮을 정도였고, 그 근원 역시 완전히 달랐다.
정복자라는 이명을 얻게 한 그의 S급 특성이 발현된 것이다.
“5분 동안 어디 한번 잘 버텨 봐라. 그동안 어떤 상대도 내 앞에서 1분을 넘긴 적이 없으니. 헌터든, 보스 몬스터든 간에 말이야!”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나타나 바테의 앞길을 막아선 커다란 불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그는 솟구친 불길을 고스란히 뚫어 버리고는 성현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무참한 살육전.
자이언트 앤트들은 그의 칼날에 순식간에 잘려 나가며 토막이 났고, 해골 병사 군단 또한 속수무책으로 와해되어 돌파당했다.
‘마법 저항에 화염 속성 저항까지… 저게 뭐지?’
마법과 군단을 모두 돌파하며 빠르게 다가서고 있는 그의 모습에 성현이 눈가를 찌푸렸다.
특성을 발현시킨 5분 간, 바테는 힘, 속도, 체력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든 신체 능력이 대폭 강화된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하는 모든 공격이 상대의 모든 방어력 혹은 저항을 무시하며, 반대로 자신이 입는 피해는 반토막을 내는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사용에 있어 몇 가지 제약이 걸려 있는 만큼이나, 발동만 되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이었다.
과거 벌어졌던 독일 내전에서 S급 헌터 수십여 명을 홀로 도륙 낸 그의 주력 특성이기도 했다.
“끝이다!”
단숨에 성현을 향해 다가선 바테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불길과 열기 속에 휩싸여 시야가 방해받느라, 성현의 주위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카아아앙!
검에 가로막혀 우뚝 막힌 바테의 칼날.
성현이 대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한창 마법을 쏟아 내던 참이라 제대로 검을 쥐고 있지도 않았었다.
바테의 검격을 정면에서 막아선 것은 두 개의 칼날이었다.
“이, 이건……?”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와 데스나이트 군주 칼라일, 두 군주가 성현을 호위하듯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당황한 바테와 눈을 마주한 성현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무서운 능력이네. 하지만 겨우 5분으로 되겠어?”
“뭐라고?”
“5분은커녕 5시간도 모자라지. 이 정도 숫자 앞에선 말이야.”
츠츠츠츠츳!
어느새 성현의 주위로 가득 일렁이고 있던 그림자의 파도.
그의 뒤편엔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숫자인 수만의 군단과 십수 기의 군주가 빽빽이 서 있었다.
먼저 밑천을 드러낸 이에게 주어진 최후의 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