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수복
강원 지역 전체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역습.
지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기세등등하던 일본 연합의 헌터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국 헌터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한국 헌터나 같은 지역을 차지하려 드는 남미 연합을 생각했지, 이미 이지스에게 박살 났다는 중국 헌터들이 이 시점에 등장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나 그들이 예상을 했건 안 했건, 대규모 포탈을 타고선 등장한 중국 헌터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져 나왔다.
중국 헌터 전원이 성현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며 전력이 상승한 상태이기까지 했다.
규모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한데 모여 있던 일본 헌터들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도 못한 채 단박에 쓸려나갔고.
패도 길드와 싸우던 남미 헌터들에게도 순식간에 뻗어 갔다.
그 이후의 결과는 물론 간단했다.
일본이든 남미든 불과 하루 사이에 각 구역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잃었고, 그들 모두가 성현의 그림자를 받아들여야 했다.
* * *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강원 지역을 점거하던 놈들에 대한 소식이 뚝 끊겼어. 북미나 동구권 세력들은 다른 지방을 들쑤시고 있었으니, 그 둘을 처리할 만한 세력이라면 한국 녀석들뿐이고.”
“우리도 한번 당했는데 일본이나 남미 길드들 정도야 당해도 이상할 건 없지.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다. 이번엔 우리의 모든 전력을 끌고 왔으니.”
알리안츠의 길드장 바테가 대꾸했다.
수십여 명의 헌터들을 뒤로한 채 서 있는 그는 유럽 최대의 세력이자 독일의 길드인, 알리안츠를 이끌고 있었다.
동시에 이번 유럽 헌터 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남자 역시 대형 세력을 이끌고 있는 같은 길드장급 헌터였으나, 연합을 주도하는 것은 엄연히 바테의 몫이었기에 목소리에서 차이가 있었다.
실제 바테는 손에 꼽는 세계 최정상급의 헌터이자 유럽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실력자였기에, 연합이 결성되었던 당시 그 누구도 그의 주도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정도다.
‘처음엔 단순히 허수아비 표적 정도라 생각하고, 경쟁자들에게만 신경을 썼다만… 역시 제법 저력은 있다는 거로군.’
수도권과 충청, 강원까지.
벌써 세 지역을 수복한 한국의 길드 연합이었고, 과거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보주를 이용해 전국 각지의 비교적 작은 외국 세력들도 꾸준히 사냥해 무력화시키는 중이었다.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서 이 정도로 반격을 가하고 수습에 나설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바.
하지만 그들의 저력을 인정함에도 바테는 곧장 다음 계획으로 나아갔다.
[연계 퀘스트가 진행 중입니다!]
불과 하루 전, 유럽 헌터들 모두에게 떠올랐던 메시지.
유성 길드를 무너뜨리고 충청 지역을 통째로 점령하라는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물론 각 지역을 점거하거나 길드를 무너뜨리라는 퀘스트는 기존에도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이번에 갱신된 퀘스트는 목표를 달성시 큰 폭의 추가 보너스까지 받을 수 있었다.
“대대적인 반격이야 인상이 깊었다만… 다른 쪽에 신경을 쓰면 방어가 취약해지기 마련이지.”
이지스가 강원 지역에 손을 쓰고 있는 사이, 바테는 그 틈을 타 충청 지역을 점거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강원 지역에서의 상황이 모두 끝이 났다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일본과 남미가 큰 세력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감히 유럽 전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둘을 합쳐 봐야 유럽 세력의 반토막만도 못했다.
거기다 애당초 그들의 원래 계획에선 홀로 이지스와 전면전을 통해 통째로 수도권을 먹어치울 작정이었다.
그 아래 지역이야 미국과 러시아 헌터들이 퀘스트를 쓸어담기 위해 날뛰고 있었으니.
당장 그들과 같은 지역에서 경쟁하며 맞붙기엔 부담스러운 유럽 길드들은 꽤나 큼직한 수도권쪽 퀘스트를 끝내려 했던 것이었다.
다만 충청권에 대한 퀘스트가 새로 갱신되며, 그 계획은 이번 보상을 챙긴 다음으로 미뤄졌다.
“길드장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한다.”
다가온 간부의 말에 바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던 다른 길드장에게 신호를 주었고, 발을 박찬 길드장의 모습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사방에 흩어져 있던 유럽의 헌터들에게 신호가 주어졌고, 충청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어서 움직여!”
“대응할 틈을 주지 않고 끝낸다!”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럽의 헌터들이 일시에 들이닥쳤다.
이미 파악해 둔 유성 길드의 각 지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 뒤, 순식간에 길드를 마비시킨 뒤 지역을 장악할 셈이었다.
그 이후, 지역을 되찾기 위해 자신들이 점거한 지역 안으로 들어설 성현을 비롯한 이지스의 헌터들을 함정에 빠뜨릴 속셈이었다.
콰아아앙!
굳게 잠긴 문을 통째로 뜯어낸 유럽의 헌터들.
그들은 뚫은 입구를 통해 길드의 지부 안으로 빠르게 들이닥쳤다.
하지만 안으로 들이닥친 그들을 맞이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뭐, 뭐야 이건?”
“아무도 없잖아?”
텅 비어 있는 지부들의 모습.
당황한 헌터들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당장 그들이 자리한 이쪽 지부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헌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에 나선 모든 지부의 사정이 똑같았다.
심지어 지부 내부의 자료들까지 모두 폐기되거나 사라져 있었다.
“젠장. 정보가 흘러나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어디로 달아난 거지?”
어쩐지 작전에 나섰을 때 시민들이 많이 오가고 있어야 할 주요 거리들마저도 한산했었고, 불길한 낌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앙!
“크아아악!”
커다란 폭발과 함께 대규모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우르르 지부의 벽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 안으로 수많은 헌터들이 지부 안으로 들이닥쳤다.
미처 눈치채지도 못했을 만큼 갑작스러운 기습.
분명 꼼꼼하게 주변을 확인했을 텐데,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이해가 안 갈 만큼 굉장한 숫자의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제, 젠장! 어서 반격해!”
카아아앙!
서슬 퍼런 칼날들이 부딪히며 혼란한 싸움이 벌어졌다.
한국 헌터들이 붉은 힘을 얻지 못한 대신, 또 다른 종류의 힘을 얻어 이전처럼 일방적인 싸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유럽의 헌터들 역시 사전에 정보를 얻어 파악하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쏟아지고 있는 이 숫자는 그들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큭! 한국 놈들, 어디서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 거야!”
“아니, 자세히 봐! 이 녀석들 한국 헌터들이 아니야!”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없이 싸우던 유럽의 헌터들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에서 보이는 상대 헌터들의 모습.
한국이 아닌 남미와 일본의 헌터들이 대거 나타나 그들을 공격해 오고 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이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입을 쩍 벌린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지역에서 한국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어야 할 외국 헌터들이 되레 자신들을 급습해 온 것이다.
이는 퀘스트의 목표인 한국 헌터들과 동맹을 맺기라도 했다는 소리인데 말이 되지 않았다.
푸욱!
“컥……!”
저들은 외국 헌터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던 붉은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검은 그림자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각 지부로 흩어졌던 유럽의 헌터들을 포위해 공격했고, 비교적 숫자가 적게 배치되었던 쪽들은 순식간에 수적 열세로 섬멸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시 내엔 한국 측 헌터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촤아아악!
달려드는 대여섯 명의 헌터를 단숨에 베어 버린 남자.
알리안츠의 길드장 바테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유럽의 헌터들이잖아.”
방금 바테의 손에 죽은 헌터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럽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남미와 일본 측 헌터들의 등장에 한술 더 떠, 이젠 자신들과 연합이었던 길드 소속까지 등장하기 시작한 모습.
이는 이전에 수도권 공격에 실패한 뒤, 성현에게 흡수당했던 스페인 길드를 비롯한 유럽측 헌터들의 합류였다.
“젠장… 이게 대체 어떻게…….”
바테가 이를 빠득 갈았다.
원래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 상황.
그것도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멍청하니 서 있을 시간은 없었다.
“길드장, 이걸 어떻게 하죠?”
“당황하지 말고 흩어진 헌터들을 모아라. 그래봐야 패잔병 무리다. 이 정도 숫자라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어.”
우우우우웅!
“뭐, 뭐야?”
그렇게 바테의 말이 떨어지려던 순간.
도시 곳곳에서 거대한 포탈들이 열리며 헌터들이 쏟아졌다.
“우아아아아!”
“이, 이런 미친!”
“조심해!”
남미, 일본, 유럽의 헌터들에 이어, 이번에 등장한 자들은 다름 아닌 중국의 헌터들이었다.
남미와 일본의 헌터들을 쓸어버렸던 장본인답게 그 숫자는 어마어마했고, 까마득한 헌터들의 파도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비교적 구성원들의 수준이 더 높은 유럽의 헌터들조차 그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바테와 간부들의 앞에도 몰려들기 시작한 중국의 헌터들.
그 모습에 격분한 바테는 검을 콰득 쥐었다.
“이놈들이 감히……!”
콰아아아앙!
바테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헌터들을 가차 없이 베어 갈랐다.
그림자를 머금은 고위 헌터들조차 종이쪼가리처럼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
숫자로 밀어붙이는 헌터들로선 그의 옷깃에조차 닿지 못했다.
“몇 놈이라도 베어 주마.”
검을 휘두르는 바테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일반 전력만으로는 지금 나타난 외국 헌터들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길드장급이나 최고 수뇌부들은 흡수 과정에서 죽어 버린 경우가 상당했기에, S급 헌터 수준의 최고위 전력에 있어선 유럽 길드 연합이 우세했다.
즉, 바테를 비롯한 최고위 헌터들의 존재로 인해 이대로 싸움이 길게 이어진다면 피해가 막심해질 것은 물론,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기에, 한국측에서도 그 간격을 메울 최고위의 헌터가 나타났다.
단 한 명만이지만 말이다.
쩌어어어엉!
가장 앞장서고 있던 바테를 향해 날아든 날카로운 검격.
바테는 반사적으로 그 공격을 쳐냈지만, 굉장히 묵직한 충격으로 인해 바테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네놈은…….”
멈춰 선 바테의 눈가가 길게 가늘어졌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등장.
이지스의 길드장, 성현이었다.
“그래… 이 모든 일들을 꾸민 게 네놈이란 말이지?”
“누가 보면 내가 쳐들어온 입장인 줄 알겠네.”
말을 받아친 성현은 슬쩍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달려들어 검을 휘두른 것임에도, 방금 부딪힌 검격으로 인해 자신의 손과 팔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유럽 최강의 헌터로서 지니고 있는 명성답게 대단한 힘이었다.
방금 나눈 단 한 합 만에 여태껏 상대해 온 일반적인 헌터들과는 격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세계 최정상을 논하는 헌터는 다르다 이건가. 확실히, 이 정도 대어라면 전력을 다해도 손해는 아니겠네.”
츠츠츠츳!
성현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수많은 눈동자가 어둠 사이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