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반격 (6)
패도 길드는 각 도시의 거리들을 장악하던 남미 길드 사냥에 나섰다.
성현의 그림자를 받아들인 후, 확실히 달라진 싸움의 양상.
시민들이 자리를 피한 사이, 빠른 급습을 벌이며 산개해 있던 남미 헌터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최대한 속도를 내며 큰 피해를 입히는 패도 길드의 헌터들은 여러 구역을 눈 깜짝할 새에 탈환해 냈다.
터엉!
빼앗겼던 지부의 옥상에 올라선 천호영이 검을 잠시 내리꽂았다.
온몸에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놈들의 붉은 힘을 상쇄했어. 이런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니……. 서울에서 유럽 헌터들을 막은 게 운이 따라 준 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군.”
천호영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림자를 받아들인 효과로 순식간에 큰 폭으로 전력이 상승한 그와 길드원들.
이는 단순히 자신을 포함한 몇 명만이 한정된 이야기인 것도 아니고, 길드 내 모든 인원이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심지어 패도 길드뿐 아니라 그들의 산하 길드들까지도 성현의 그림자를 받아들였고.
지금 같은 대규모 길드 간 싸움에선 존재감도 미미하던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산하 길드들의 전력이 증강되었다.
‘사실상 없어지고 있던 가능성이 생겨났다. 물론 이런 힘에 의존하는 건 꺼림칙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런 힘을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건, 앞으로도 7대 길드 사이의 주도권을 완전히 성현이 틀어쥘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기엔, 길드가 남아 있어야 주도권을 논하기라도 하는 것이다.
그 누구라 해도 난데없이 밖에서 들이닥친 외국 헌터들의 밥이 되고 싶진 않았다.
“대표님! 본사가 위치한 중심 구역까지 탈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10분 정도 빠르군.”
“다만 놈들이 불리한 구역 내에서 빠르게 물러난 뒤 방어선을 구축 중입니다. 해당 구역들은 쉽게 뚫기 어려워 교착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제 곧 놈들도 반격에 나설 듯합니다.”
“예상했던 범위 내니 괜찮아. 이제야 조금이라도 동등한 싸움이 된 거니까.”
천호영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지금 그들은 남미의 대형 길드들이 연합한 거대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잘 찌른 기습이라 해도 한 번에 쓸려나갈 거란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하나 속도에 중점을 둔 이번 기습의 효과는 분명했고, 놈들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다.
성현의 등장으로 남미 연합 중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하던 카르소 길드가 예상치 못하게 무너지면서 공백이 생겼고, 패도 길드는 정확히 그 빈틈을 파고 든 것이다.
덕분에 남미 연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역공에 큰 피해를 입었고, 여전히 놈들의 덩치가 배 이상 크다곤 해도 이전에 비해선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 되었다.
‘물론 놈들을 몰아내는 데 이성현까지 힘을 합쳐 준다면 좋겠지만, 난데없이 반대편 지역을 홀로 맡겠다면서 떠나 버렸으니…….’
남미 연합과 마찬가지로 강원 지역을 양분한 일본 길드 연합.
현재 패도 길드가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는 지역과는 정반대로 성현이 홀로 떠나 버린 것이다.
‘대체 어쩌려는 거냐. 길드원들을 대동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그때 봤던 녀석의 힘이라 해도 혼자서 길드들을 몰아내는 건 무리일 텐데.’
천호영의 시선이 전장의 반대편 너머로 향했다.
느껴지는 어떠한 기척도 없이, 아주 고요할 뿐이었다.
* * *
쿠우우우웅!
거대한 몬스터의 목이 잘려 나가며, 몸뚱이가 기우뚱 무너져내렸다.
그러자 울창한 숲속, 빽빽한 나무들이 마구 일렁였다.
“후, 이게 아까 말했던 변종 엔트들인가.”
“수도 많고 쉽게 죽지도 않아서 꽤나 골치 아픈 녀석들이죠.”
검을 든 성현이 숲속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의 뒤편엔 이즈나가 함께 등을 맞대고 있었다.
일렁이는 숲속엔 그 둘을 노려보고 있는 변종 엔트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이전 필드에서 상대했던 일반 엔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최고위 몬스터들.
생김새부터가 그로테스크한 데다, 그림자 군단의 발목을 잡고 있을 만큼 실제로도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놈들이다.
하지만 놈들이 주위로 충분히 몰려든 시점, 이즈나는 자신의 양손에 강력한 마력을 모았다.
콰아아아앙!
곧이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 거대한 화염구의 비.
강력한 화염 마법에 주변을 포위했던 엔트들은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이 변종 엔트들은 마법 내성까지 일부 갖추고 있는 녀석들이라 화염 마법도 견디는 아주 까다로운 놈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뱀파이어 로드인 이즈나의 공격 마법을 견딜 순 없었다.
화르르륵!
처참하게 타들어간 변종 엔트들의 거대한 시체 사이.
멀쩡히 선 성현은 들어 올렸던 검을 슬쩍 내렸다.
“안 본 사이에 그동안 많이 성장했네.”
“그야 물론입니다.”
칭찬을 들은 이즈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부의 일에 그림자 군단을 끌어오지 않고서 던전 공략에 집중하도록 시킨 성현이다.
그의 뜻대로 군단은 던전 공략에 전속력을 낼 수 있었고, 12번째 필드의 공략을 이미 완수했다.
성현이 바깥에서 퀘스트들을 깨며 빠르게 성장하며 레벨을 올리는 동안.
군주들 역시 던전에서 치고나가며 뒤쳐지지 않고서 빠르게 그의 레벨을 따라왔다.
굳이 자신이 간섭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강해진 이즈나의 모습만 보더라도, 역시 군주들은 그가 지닌 든든한 전력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침묵의 숲이라…….”
성현은 다시 시선을 옮겼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지하 던전에 위차한 13번째 필드, ‘침묵의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필드가 넓어지는 지하 던전의 특성상, 엄청나게 드넓은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드높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
숲만 줄창 이어져 있는 데다가 워낙 높고 무성해 땅 위에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패도 길드를 움직인 성현은 분명 일본 길드를 치러 간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서 있는 곳은 지하 던전 내부였다.
이는 다음 계획까지 필요한 약간의 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필드의 공략이야 대강 감이 잡히고. 성소 쪽은 어때?”
“고대어의 해석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성소까지 동시에 조사 중입니다만… 단순히 해석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마력까지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해, 리치들이 직접 나서는 중인데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바쁘겠네. 아무튼, 나도 연락이 올 때까진 좀 거들게.”
성현이 타 버린 변종 엔트들을 스쳐 지나치며 말했다.
이번 13번째 필드에서 제법 격렬한 저항을 맞닥뜨린 듯한 군단이었고.
가급적 지하 던전의 끝을 빠르게 봐야 하는 성현으로선 당장 연락이 올때까진 못해도 한두 시간가량은 빌 거 같으니,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8배 경험치 던전 속에서 레벨도 올려 둘 겸 몸을 데워 둘 생각이었다.
파앗!
하지만 순간, 목소리가 성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포탈을 준비하고 있던 리치들에게 신호가 온 것이다.
그러자 성현은 손목의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음? 벌써 준비가 끝난 모양이네.”
성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그의 바로 앞에 커다란 포탈이 번쩍하고 생겨났다.
포탈의 앞에 선 성현은 뒤를 돌아보며 이즈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안, 먼저 가봐야겠어. 던전 안 쪽은 맡겨 둬도 되겠지?”
“얼마든지요.”
이즈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가 곁에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라면 머릿속의 생각을 일부 공유하고 있는 이즈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성현을 노리는 던전과 길드, 시스템의 변화까지.
주적이었던 청성을 무너뜨렸지만 여전히 바깥도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그의 곁에서 호위로 곁을 지키고 싶어 했다.
“됐어.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때 불러도 되니까. 이쪽을 맡겨 둘게.”
피식 웃은 성현은 이즈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려 주고는 발을 내디뎠고, 새하얗게 열려 있던 포탈은 훅 하고 닫혔다.
* * *
콰아아아앙!
“커억……!”
요란한 폭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도심의 길가.
성현의 검은 검기로 인해 튕겨 나간 헌터들은 정신을 잃은 채 마구 바닥에 나뒹굴었다.
“포탈을 열고 나타나자마자 이렇게 사방에서 반겨 줄 줄은 몰랐네.”
“젠장, 이 자식이……!”
거리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성현.
그의 주변을 거의 수천에 가까운 일본 측 헌터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성현이 포탈을 열고서 강원 지역으로 넘어온 지 불과 10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역시 바글바글하네.’
몇몇 큼지막한 기척들을 느끼며, 성현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평길드원들만이 달려들며 따분한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상당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길드장급의 최상위 헌터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듯 일본 길드 연합의 세력은 상당했다.
한국과 비슷하게 인구 중 고위 헌터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기에, 한 국가에서 연합을 벌인 것만으로도 남미 연합 이상의 인원이 나왔다.
무엇보다 저들은 시스템으로부터 붉은 힘을 받은 고위 헌터들이었기에, 아무리 급격히 강해진 성현이라 해도 길드장급 여럿을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본 길드든 남미 길드든, 미국이나 러시아 쪽에 비하면 세계 정상급의 헌터는 없었다.
반면 성현은 검증할 무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 객관적인 전력의 지표만으로는 이미 세계 정상급에 올라서 있었다.
즉, 거대 세력의 길드장급 몇 명 정도가 까다롭긴 해도 여전히 일대일을 따졌을 때 성현보다 우위에 선 최고위 헌터는 한 명도 없다는 것.
문제는 숫자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숫자만 역전시킨다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는 거지.’
파아아아앗!
성현의 입가가 피식 올라감과 동시에, 그들의 머리 위 곳곳에서 커다란 포탈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이, 이게 뭐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고함 소리.
단순히 그의 주변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거리 곳곳에 거대한 균열들이 생겨나며 헌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지스 길드의 헌터도 아니고, 최근 연합한 국내 길드의 헌터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규모 하나만큼은 전 세계 최고였던 ‘중국의 헌터’들이었다.
과거 성현에게 패해 흡수당했던 그들은 구성원 전부가 새롭게 그림자를 부여받았고, 단순히 간부진들만 혈마법으로 통제받던 이전과는 다르게 직접 끌어들일 수 있는 전력이 되었다.
그렇게, 지금 일본의 헌터들이 마주한 것은 숫자의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