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반격 (5)
남미 헌터들이 몰려든 패도 길드의 비밀 지부 안.
새카만 그림자가 복도를 가득 메우며 들어찼다.
그리고 곧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네, 네 놈은…….”
멈춰 선 슬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서울에나 있어야 할 이지스의 길드장, 성현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수많은 헌터에게 목숨이 노려지고 있는 대형 세력의 길드장이 설마 혼자서 이런 멀리 떨어진 지역에 찾아왔을 리는 없을 터.
아찔한 생각이 슬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함정이라도…….”
“아니, 그냥 나 혼자 찾아왔는데 너희가 들이닥쳤을 뿐이야.”
하지만 성현은 시큰둥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애초에 저들은 철저히 준비해 이번 작전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으니, 주변에 헌터들이 매복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 포탈의 능력을 손에 넣은 성현의 입장에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비슷한 일을 벌일 수 있겠지만.
성현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네놈이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제 몸 건사하기도 바쁠 텐데, 이미 다 죽어 가는 길드를 끌어들여서 뭐 하겠다는 거지?”
“당하고만 있는 건 내 성향상 안 맞거든. 위쪽 지역부터 청소도 할 겸, 겸사겸사 찾아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슬림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겠군. 머뭇거릴 필요 없다! 어차피 치울 쓰레기가 하나 늘어난 것 뿐이다!”
슬림은 혹시나 싶어 감각을 끌어올려 봤지만, 주변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정말 길드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한국 내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대어가 넝쿨째 들어온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상대는 세계 유일의 S급 네크로맨서.
한국 헌터 중 가장 경계할 만한 적이었지만, 지금 그의 곁엔 아무런 소환수조차 없었다.
“다 쓸어버려!”
“우아아아!”
검을 치켜세운 슬림이 버럭 소리쳤고, 그의 뒤편에 서 있던 길드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와 함께 들이닥치는 헌터들.
“놈들이 온다!”
“우리도 어서……!”
함께 서 있던 천호영이나 패도의 헌터들도 무기를 들어 올리고는 반사적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성현이 팔을 뻗으며 그들을 막아섰다.
“지금 뭐하는 거지?”
“저놈들은 나 혼자 처리할 거거든.”
“뭐? 그게 대체 무슨……!”
“지금 너희 상태로는 괜히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야.”
길드원들을 뒤로 물러서게 만든 성현은 좁다란 통로를 통해 몰려드는 헌터들과 마주했다.
성현을 향해 매섭게 검을 뻗어 오는 헌터들.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카르소 길드의 정예급들을 추려온 만큼 전원이 A랭크대 이상의 전력이었고, 붉은 힘까지 얻은 상태였으니 어지간한 헌터들은 반응조차 못 할 속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콰아아앙!
하지만 가장 앞장서던 남자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벽으로 내다 꽂힌 모습.
아무리 붉은 힘을 얻은 고위 헌터들이라 해도 S랭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인 성현과의 격차는 엄청났고, 성현은 대폭 강화된 군단 강화 효과까지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귀찮긴 해도, 기왕이면 살려 두는 편이 낫지.”
“커억……!”
성현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을 사용하지도 않고, 왼손으로 달려드는 헌터들을 하나하나 내다 꽂아 버렸다.
주먹에 한 방 얻어맞은 헌터들은 그대로 기절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앞사람이 쓰러짐에도 집요하게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던 그들이었지만, 훤히 눈에 들어오는 속도에 빈틈을 내어 줄래도 내어 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숫자야 많다고는 해도 일직선상으로 달려드는 저들을 상대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콰아아아앙!
“이, 이게 무슨……!”
한 발 물러나 싸움을 지켜보던 슬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네크로맨서가 소환수를 부르지도 않고서 혼자서 전투를 벌이더니, 맨몸으로
붉은 힘의 영향을 받는 고위 헌터들을 내다 꽂는 중이라니.
“고작 헌터 한 놈에게 쩔쩔맬 수는 없다. 동시에 달려들어.”
“알겠습니다.”
슬림은 급히 시선을 옮겨 다른 부하들을 움직였다.
길드장의 명에 순식간에 발을 박찬 네 명의 헌터들.
그들은 모두 카르소 길드의 간부이자 S랭크의 실력자였고, 앞서 달려들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후우우웅!
맨손으로 헌터들을 쓰러뜨리고 있던 성현도 갑작스럽게 끼어든 그들의 검격을 피하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네 명의 간부들은 물 흐르듯 곧장 그에게 다가서며 압박을 하려 들었고, 좁은 통로에도 불구하고 성현을 상대로 합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맨손으로 상대하는 건 무리겠네.’
그러자 성현은 검을 제대로 들어 올렸다.
다가오는 헌터들을 앞두고, 성현의 눈이 금빛으로 차올랐다.
[특성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래도 죽이지 않으려면 힘 조절은 해야겠지만.’
* * *
콰드드득!
기다란 통로의 벽들이 갈라지고 부서진 모습.
파편이 사방에 튄 채 엉망이 된 복도엔 맥없이 쓰러진 헌터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순간 기류가 완전히 바뀌더니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저… 저건 유호준의 특성이잖아……? 그 능력을 저 녀석이 어떻게!”
천호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7대 길드 유성의 길드장, 유호준의 S랭크 특성 ‘폭검’.
난폭한 검기를 사용하는 그의 능력이 고스란히 성현에게 발현된 것이다.
유호준이라면 직접 상대해 봤기에 천호영으로선 모를 수가 없었다.
비슷한 능력이라기엔 너무도 똑같은 모습.
아니, 특성이 발현되며 나타난 아주 난폭한 검기는 성현의 검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 속성까지 합쳐지며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좁은 공간의 특성까지 합쳐지며, 카르소 길드의 간부들이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물론 저들의 길드장 역시 다를 건 없었다.
“컥… 이런 말도 안 되는…….”
덜덜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은 슬림.
그는 걸쭉한 피를 한 웅큼 토해 냈다.
그 난폭한 공격들을 막아 대느라 엉망인 꼴 겉모습 이상으로 몸 안쪽이 더욱 상해 있었고, 이미 승부는 결판이 났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네. 역시 거슬리는 힘이야.”
슬림의 앞에 선 성현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간부를 포함해 다른 헌터들은 적당히 힘조절을 해 가며 기절만 시켜 뒀지만, 슬림은 남미를 대표하는 세력 중 하나인 카르소의 수장답게 꽤나 애를 먹였다.
“하지만 길드장을 살려 둘 순 없지.”
촤아아악!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 및 스탯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성현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자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슬림 역시 성현의 퀘스트 목표 중 하나였고, 다른 헌터들처럼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정말 입구에 들이닥친 카르소의 헌터들을 모조리 정리해 버린 성현의 활약.
S랭크 헌터들을 포함해 수백여 명을 정리하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호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평범한 마법계 헌터 수준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당연하게도 그간 국내의 소식에 대해 민감하게 접해 온 천호영이다.
청성을 상대로 성현이 보인 행적에 대해서도 훨씬 잘 알았고, 네크로맨서라는 능력과는 별개로 이미 그 스스로가 국내 S급 중 최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힘을 받은 슬림과 S급의 간부들까지 이렇게 간단히 정리해 버릴 줄이야.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째서 우릴 도와준 거지?”
“아까 말했듯이 서로 협력하자는 거지.”
검을 회수한 성현이 뒤를 돌며 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천호영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고, 성현은 말을 이었다.
“남미 연합만 해도 길드장급은 슬림이 전부가 아니야. 카르소 길드 역시 수십여 곳이 넘는 남미 길드 중 하나일 뿐. 더욱이 전국에서 몰려들 헌터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지. 아군은 많을수록 좋아.”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굳이 우리 힘을 빌린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을 텐데.”
“물론 지금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달라질 거야. 지금 길드원도 없이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다들 바빠서 그렇거든.”
성현이 홀로 이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자 군단은 전력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동맹 길드나 적 길드에서 흡수했던 헌터들은 수도권이나 충청권으로 넘어오는 외국 헌터들을 틀어막고, 전국 각지에 흩어진 비교적 작은 외국 길드들을 사냥 중이다.
하지만 성현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강원 지역 전역에 자리 잡은 일본과 남미 헌터들을 모두 몰아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그래서 저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츠츠츠츳!
기다란 복도 안에 검게 드리워졌던 성현의 그림자가 꿈틀였다.
“그러니까… 너희가 대신해라.”
* * *
남미의 헌터들이 장악한 도시의 거리.
강원 지역 내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들이 사실상 없어져 버린 만큼, 타국의 지역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당하게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 도시의 분위기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뀌었다.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그러게. 밤 시간도 아닌데.”
길거리를 걷던 남미 헌터들이 말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꽤나 큰 골목임에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시민들이 말끔하게 사라진 탓이다.
통제 불능의 던전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딘가 수상한 낌새를 느낀 헌터들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틀어박힌 놈들 중에 아무나 몇 명 붙잡아 와. 뭔가 찜찜한 게 왜 저러는지 들어야겠어.”
“그래, 그렇게 하자고.”
잠깐 두리번거리던 헌터들은 들어갈 건물을 정했다.
집의 문짝을 뜯어내고, 시민들에게 강제로라도 입을 열게 하더라도 이유를 들어 낼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건물 입구로 들어서려는 그 순간.
쿠구구구궁!
멀찍이서 들려오는 묵직한 폭음이 땅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헌터들은 길목을 빠져나와 급히 대로변으로 나왔고,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다른 남미 헌터들과 마주했다.
“이, 이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각 지부들과 연락이 끊겼어. 놈들이 반격을 하는 거다!”
“뭐라고……?”
콰아아아앙!
곧이어 이어진 폭음.
이번엔 소리가 터져 나온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바로 옆 길목에서 튀어나온 헌터들이 그들의 동료들을 가차 없이 베어 가르고 있었다.
“노, 놈들이다!”
“어서 반격… 크아악!”
여태 흩어져 숨어 지내고 있던 패도 길드의 헌터들이 일시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물론 그들이 지닌 기존의 전력으로는 이런 대대적인 반격이 절대 불가능했고, 각개격파를 당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각 도시의 거리에 나타난 패도 길드의 헌터들은 모두가 검은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이쪽은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으로 공격해 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했군. 이대로 치고 나간다. 여태 당한 만큼 돌려줘야지.”
스릉!
거리 사이로 더 많은 헌터가 쏟아졌고.
강원 지역 내 대대적인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