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반격 (4)
비밀 지부의 안으로 들어선 성현.
그는 길드 이름대로 길드원 개개인의 성향이 아주 거칠다는 패도 길드답지 않게, 굉장히 공손한 대접을 받으며 들어섰다.
보통 거물이 아니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보다 안쪽은 상태가 나쁘지 않네.’
내부로 들어가는 동안 성현은 지부의 상태를 구경하며 살펴보았다.
대부분 초토화된 지상의 지부들에 비해, 인원도 많고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모습.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수선한 분위기는 피할 수 없었지만, 처한 상황에 비해선 그리 패닉에 빠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름 비밀 관리를 철저하게 했기에 아직까지 멀쩡할 수 있었을 테고, 남은 세력이 여기 한 군데뿐만도 아닐 것이다.
덜컥!
그렇게 길드장의 집무실에게까지 안내받은 성현.
맞은편 자리에 앉은 그는 패도의 길드장 천호영과 마주했다.
염색을 한 희끗한 머리에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를 한 남자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등장한 성현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난리통에 찾아올 손님이 있을 줄이야. 용케 내 위치를 알아냈군. 여긴 어떻게 찾은 거지?”
“글쎄, 이 장소를 너무 신뢰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하. 그렇지 않아도 할 조만간 지부를 바꿀 생각이었어.”
천호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들에겐 이곳을 제하고도 다수의 비밀 거점이 있었다.
패도 길드는 여전히 남미 헌터들과 맞서 싸우며 잃은 구역을 되찾기 위해 도시 곳곳에서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굳이 남이 말하지 않더라도 주기적으로 장소를 바꿔 줘야 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해 주지 않을 거라면 본론이나 빨리 꺼내라고. 그래서, 이지스의 길드장이 여긴 왜 온 거지?”
“왜 왔냐니. 당연히 도와주러 왔지. 꽤나 상황이 난처해 보이길래.”
“상황이 뭣 같은 건 맞지. 하지만 서울에서 알짱거리는 녀석들을 상대하느라 이지스도 바쁠 텐데? 놈들이 노리는 가장 큰 목표가 바로 이성현 네 목이라는 것도 들었고.”
천호영이 자신의 목 부근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패도 길드에서도 인지하기 시작한 ‘퀘스트’의 존재.
해외 길드들이 국내로 쏟아진 근본적인 이유와, 외국의 헌터들이 최근 급격히 강해진 이유와도 연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 목 걱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고.”
“우리 지역에서만 해도 남미와 일본 놈들까지 몰려들었어. 항상 자기네 나라에서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놈들까지 힘을 합쳐서 말이야.”
현재 강원 지역은 양옆으로 들이닥친 일본과 남미 헌터들로 인해 영동 영서 지역을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양쪽에 자리를 잡은 두 길드 연합체는 퀘스트의 목표인 패도 길드와 길드장 천호영을 먼저 잡기 위해 경쟁하듯 나섰고.
서로 지역의 주도권과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대기까지 했다.
이미 주인이 있는 구역 안에서 저렇게 날뛰게 내버려두다니 천호영이나 패도 길드로선 굴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패도 길드로선 저들이 그러는 와중에도 의미 있는 수준의 반격을 하기는 어려웠다.
놈들이 얻은 미지의 힘이 너무 강했고, 여러 길드가 뭉친 연합 대 하나의 길드의 대립 구도였기에 규모가 너무 차이 났다.
“국내 길드들을 모아 연합했다는 것쯤이야 들었다만, 그래 봐야 너희도 비슷한 상황일 텐데 남을 도울 처지는 되겠어? 솔직히 말해 네가 여기 직접 나타난 것부터가 이해 가지 않는데.”
천호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이지스를 필두로 한 국내 길드들이 유럽 헌터들의 공격을 어떻게 한 번 버텨냈다는 소식은 그 역시 들었다.
하지만 당시 쳐들어온 유럽 헌터라 해봐야 전체 유럽 길드 연합에 비해선 작은 규모인 데다가, 서울을 노리고 있는 것은 유럽 헌터들 정도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지스의 길드장인 성현의 목을 노리고 있는 헌터들이 한두 명이 아닌 지금 상황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그의 행보는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었다.
홀로 움직이다가 위치가 발각되거나,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길드가 공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려는 것인지.
심지어 지금 그는 무기 하나 없이 맨손이기까지 했다.
“으음…….”
물론 진지한 태도의 천호영을 앞두고서 성현은 이마를 긁적였다.
지금 나오는 말들은 그가 성현과 이지스 길드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구역들을 장악한 남미와 일본 길드들은 지역 내 방송과 언론까지 통제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시민들과 패도 길드까지 정보망이 차단되어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가.”
“하, 내가 모르는 사이에 놈들에게 대항할 무기라도 찾았나 보지?”
“대충 비슷… 잠깐.”
그때, 성현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감각을 느꼈다.
“아무래도 설명은 생략해야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그렇지 않아도 얼마 못 버틸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새 손님이 온 모양이야.”
쿠구구구구!
알 수 없는 충격과 함께 길드의 거점 전체가 울려왔다.
그리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무수히 많은 헌터들의 기척.
패도의 비밀 지부로 놈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 이건……!”
쿠당탕!
천호영은 단숨에 탁자를 발로 뻥 차 내더니,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성현의 목을 향해 예리한 칼날을 들이밀었다.
“이 자식이! 설마 네가 우릴 팔아넘긴 거냐!”
서슬 퍼런 살기가 서린 천호영의 칼날.
상대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하면 그대로 베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성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서 말할 뿐이었다.
“아까 네가 말했던 건 기억이 안 나나 보지? 외국 헌터들 메인 퀘스트에 내 목이 떡하니 걸려 있는데, 내가 뭐 하러 그 놈들 좋은 일을 해줘?”
“…….”
“거기다 이 비밀 지부에 대한 정보를 요구받았던 거라면 직접 찾아올 것도 없이 위치만 넘겨줬겠지.”
“젠장!”
고개를 휙 돌린 천호영은 방을 박차고 나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 같은 한국 길드를 팔아넘겨 봐야 적만 더 강해질 뿐이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물론 타이밍상 미행을 당한 걸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나 아무리 비교적 감각이 둔한 마법계 헌터라도 한인호를 잡은 국내 최상위 헌터인 그가 바보 같이 미행이나 당했을 리는 없었다.
뭣보다 천호영은 지금이 책임 같은 걸 가지고 다투느라 발목을 잡힐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대응이 우선이다.’
현재 천호영의 감각에 느껴지는 헌터들의 수만 해도 상당했고.
위치상 곧 더 많은 헌터들이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천호영와 길드원들이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가 텅 빈 복도와 방 안.
성현은 잠시 이마를 긁적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던 건 아닌데… 차라리 잘됐을지도. 줄줄이 말을 늘어놓을 것 없이 직접 보여 주면 될 테니까.”
파앗!
성현은 인벤토리를 활성화시켰고, 연이어 도핑용 비약 세 개를 꺼내 마셨다.
깔끔하게 비워진 병들을 구석에 내던진 뒤.
그는 인벤토리 안에서 기다란 검을 꺼내들었다.
“그럼 나도 좀 거들어 볼까.”
* * *
콰아아앙!
구석진 길목의 천장이 요란하게 박살 나며 무너져 내렸다.
작은 물줄기들과 함께 후두둑 떨어지는 잔해 파편 사이, 헌터들이 하나둘 내려서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길드 문장을 몸에 새긴 남미 연합의 헌터들.
정면이 아닌 배수로를 통한 급습이었고, 남미의 헌터들은 순식간에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며 들이닥쳤다.
“우아아아!”
“제, 젠장! 막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막아서는 길드원과 남미 헌터들 간의 충돌이 벌어졌고, 곧 각 통로들엔 흩뿌려진 핏줄기들이 낭자했다.
하지만 패도의 헌터들은 적들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빠져나갈 통로를 확보해라. 이런 곳에서 놈들과 전면전을 벌여 줄 생각 따윈 없어.”
바쁘게 걷는 천호영이 길드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완전히 기습을 당한 입장에서 멍청하게 끝까지 싸워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길드원들은 아직 적들의 손이 닿지 않았을 퇴로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패도의 ‘비밀 지부’답게 다리 아래 위치한 정문 입구를 제외하고도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통로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숨겨진 통로들을 이용한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 이후에 얼마든지 놈들에 대한 저항과 반격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이쪽입…….”
콰과과광!
하지만 그런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요란한 굉음.
외부로부터 비밀 지부와 연결된 지하 통로의 입구로부터, 남미의 헌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어느새 여기까지……?”
헌터라 해도 쉽게 찾지 못할 만큼 꽁꽁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들이었으나, 그를 발견하고서 처 들어온 남미의 헌터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통로는 단순히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예 어느 곳이 예외랄 게 없었다.
다른 쪽으로 길을 틀었음에도 또 다른 방향에서 쏟아져 나오는 남미의 헌터들이었고, 다른 길드원들에게서도 보고가 속속들이 들어왔다.
‘젠장, 이 자식들 비밀 통로들까지 모조리 파악해 놨어……! 우릴 가둬 둔 채 완전히 말려죽일 셈이었군.’
심각한 표정의 천호영이 이를 빠득 갈았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패도 길드의 비밀 지부는 남미의 헌터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 공격을 받는 중이었다.
지부에서 단 한 명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확실한 준비를 해두고서 공격을 해온 것이다.
이는 강원 지역의 메인급 퀘스트를 일본 길드에게 넘기지 않고,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끝내기 위한 남미 길드의 승부수이기도 했다.
“길드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이런 상황에 갈팡질팡했다간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한 쪽으로 뚫고서 빠져나간다.”
“아니, 그렇겐 안 되지.”
쿠우웅!
검을 들어 올리며 길을 뚫으려던 천호영의 앞에 불쑥 나타난 남자.
남미의 거대 세력인 카르소 길드의 길드장, 슬림이었다.
큼지막한 거구를 지닌 그의 등장에 천호영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이번 공격도 네가 주도했던 건가.”
“시스템이 우리에게 건네준 이 새로운 힘은 모든 능력을 증폭시키고 강화시켜 주지. 덕분에 증폭된 탐지 능력으로 네 놈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곳을 찾아낼 수 있던 거고 말이야.”
슬림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저번 싸움에선 운 좋게 달아날 수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다. 네놈은 결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젠장.”
천호영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모든 퇴로가 막힌 채 꼼짝없이 막다른 길에 갇혀 버린 상황이었고, 여기선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남은 선택지라곤 끝까지 싸우는 것이겠지만, 끝까지 싸운다 해도 승산은 없었다.
후우우우웅!
“음……?”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이 서 있는 통로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뻗어져 왔다.
단순한 그림자라기엔 끝없는 심연처럼 오싹한 감각이 느껴지는 마력을 품고 있었고.
어두워진 복도의 끝자락에서 성현이 뚜벅뚜벅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