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반격 (3)
지방에 위치한 한 대도시.
수도권과는 달리 외국 길드의 침공으로 인해 한국 헌터 세력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지역이었다.
하지만 도시 곳곳에 시체가 나뒹군다거나, 건물과 거리들이 파괴되어 있지는 않았다.
헌터들의 싸움이 요란하게 겉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직장인들은 멀쩡히 출근을 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큰 지장 없이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그 내부엔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젠장, 요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보이지 않던 외국 헌터들이 거리에 잔뜩 돌아다니질 않나, 뉴스에선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쉿. 무슨 일 생길라 조용히 말해.”
길을 걷던 시민 몇 명이 수군거렸다.
폐쇄적인 헌터 업계의 특성에 더해, 외국 길드의 수작으로 정보가 통제되어 충분치 않음에도 시민들도 뒤바뀐 분위기를 못 읽는 것은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소문들도 점점 들려왔고, 원래 도시의 구역들을 관리하던 길드와 헌터들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게 가장 컸다.
관동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패도 길드.
본래 그들의 존재는 지역 안에서 독보적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외국에서 굴러들어온 길드 몇 곳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나 패도 길드가 위치해 있던 지부들은 대부분 무력화된 채 텅 비어 있었고, 길드의 모든 활동이 멈춰져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게 저 외국의 헌터들이다.
시민들의 눈에 곧장 들어올 만큼 대부분의 구역 내에서 발생한 던전을 웬 외국 헌터들이 처리하는 중이었고, 당장 거리를 서성이는 저 자들도 남미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다른 지역에선 도시가 통째로 뒤집어질 정도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데. 우리는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닌 건가.”
“그거야 모르지. 이러다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질지는 어떻게 알아? 젠장, 세상이 대체 어떻게 되려는 건지…….”
직접 참사를 목격한 것도 아닌데도, 시민들은 상당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간 지역을 차지하던 7대 길드 패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뭐 하는 녀석들인지도 모를 외국 길드의 헌터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불안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던전이 생겨났을 초창기에 국내로 쳐들어온 외국 헌터들이라면 모두가 겪었다.
직접 맞서 싸웠던 헌터들뿐만 아니더라도, 당시의 민간인들도 데인 기억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시의 묘한 분위기를 읽으며 서있는 남자가 있었다.
“음… 역시 분위기는 어수선하네.”
길거리의 구석에 기대어 있던 성현이 중얼거렸다.
그는 무기도 없이 평범한 옷차림에 모자까지 눌러쓴 모습이었다.
국내 시민들은 물론 외국의 헌터들에게도 얼굴이 한참 알려진 만큼 괜한 시선을 끌지 않도록 이런 차림을 한 성현이다.
‘사실상 적진 한복판에 들어선 꼴이지만… 문제 될 건 없지.’
그는 도시를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성현은 강원도 내의 상황부터 우선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다른 지방을 제쳐두고서 이곳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정보 수집 과정에서 패도 길드에 대한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었던 대로 지배 길드 행세를 하고 있네. 아예 던전까지 대신 처리해 주면서 말이야.’
성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남몰래 시선을 돌리는 성현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리를 서성이고 있는 외국 헌터들이었다.
시민들이 수군거렸듯 패도 길드와 그를 따르는 산하 길드들의 빈자리를 대체한 이들.
지금은 길드 문양도 드러내지 않고서 활동하는 녀석들이었지만, 성현은 그들의 정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남미의 카르소 길드. 그쪽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꽤나 큼지막한 세력이지.’
물론 당장 이 거리를 서성이고 있는 녀석들뿐만이 아니었다.
강원 지역 전역에 남미의 헌터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남미의 길드들 역시 필요성을 느껴 연합 체제를 이루었고, 집단적으로 패도 길드를 상대로 공격을 해온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길드들이 붉은 힘까지 얻은 채로 달려들었으니, 패도 길드 혼자서는 못 버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힘에서 밀린다 해도 패도 길드는 그들에 비해서 몇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 오랫동안 한 지역을 점거한 채 눌러앉아온 7대 길드였으니 당연했다.
지역 내 시설 및 지형들을 손안에 훤히 잘 알고 있는 데다가, 활용할 여지가 있는 변수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 7대 길드들은 놈들과 싸우느라 깊숙이 숨어들었어. 그것 때문에 구역들의 주도권은 외국 길드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 열세에도 쓸려 나가지 않을 수 있었지.’
관동 지방뿐 아니라 각 지역의 7대 길드들이 아직까지도 외국 길드들에게 당하지 않고서 저항을 이어 나갈 수 있던 이유.
성현이 여기까지 조용히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쨌든… 계속 이러고 있어도 잠잠한 거 보니, 내가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눈치 못 챘나보네. 슬슬 움직여 볼까.’
성현은 위치상 남미 길드들의 활동 영역 한가운데에 와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사방에서 고위 헌터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성현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성현은 무난히 섞여 들어가 도시를 거닐기 시작했다.
‘흑련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이 아래에 있어야 할 텐데…….’
성현은 곧 도시를 관통하는 강가의 다리에까지 닿았다.
혹시 미행이나 다른 헌터의 시선은 없는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성현은 다리 밑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자 강가의 다리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교묘하게 낡아빠진 문짝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정답이었다.
‘찾았다. 허탕은 아니네.’
내심 쾌재를 부른 성현은 그리로 다가갔다.
사람 하나 없는 문짝을 벌컥 열어젖힌 성현은 아래로 뻗어지는 계단을 마주했고, 거리낌 없이 그 아래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통로 아래로 꽤나 길게 이어지는 계단.
성현은 청성에서 근무할 때도 이와 비슷한 시설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거대 길드들이라면 비상시를 대비해 마련해 둔 비밀 시설들.
과거 훨씬 거대한 세력인 외국 길드와 피 튀기게 싸워 본 국내의 9대 길드들이다 보니, 이런 것들을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물론 청성이든 화신이든 서울 길드들은 자신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았으니 여태까진 쓸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국내 다른 지역도 아니고 외국에서 온 헌터들은 알 수가 없을 장소긴 해. 물론 그것도 시간문제긴 하지만.’
이곳은 성현이 흑련의 정보망을 통해 위치를 알게 된 장소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다른 길드에게도 위치가 발각될 거란 뜻이기도 했다.
‘패도의 길드원들인가.’
계단을 충분히 내려가자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났다.
다만 이번 문짝 앞에는 길드원 둘이 테이블까지 깔아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축축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기척이 느껴지기라도 한 듯했다.
“뭐가 내려오나 했더만… 외국 놈들 같진 않은데?”
“길이라도 잘못 들었나 보군.”
푹 눌러쓴 모자 덕에 성현의 얼굴은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척까지 감쪽같이 숨겨 놓아, 그리 강한 헌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헌터인가?”
“그래.”
“어느 소속이지?”
“아니, 됐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자고.”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두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해도 비밀 지부에 발을 들였으니, 고의든 아니든 입을 틀어막아 둬야 했다.
“미안하지만 도로 돌아갈 순 없겠어. 남미 놈들에게 붙어먹은 변절자 놈들도 많아서 말이야.”
“상황이 끝날 때까진 안에 갇혀 있어야겠는데.”
“아니, 굳이 그럴 것 없이 직접 너희 길드장을 보고 싶은데. 천호영 말이야.”
두 헌터를 우뚝 멈춰 세운 성현의 말.
“뭐, 뭐야?”
“처음부터 우릴 찾아온 거였나? 그런데 길드장님을 본다니 대체 무슨 헛소리를…….”
“낭비할 시간 없어.”
성현은 양옆에 선 두 남자를 지나치고는, 내부로 통하는 낡은 문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수상한 성현의 거동에 눈을 치켜뜨던 헌터들이 그를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었다.
“이, 이 새끼가!”
“잡아!”
두 명의 길드원이 동시에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양쪽 모두 B급 이상의 헌터였고, 날아드는 주먹도 굉장히 빨랐다.
굳이 허리춤의 무기를 뽑아들지 않아도, 국내 헌터 한 명쯤이야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강원 지역 내에 패도 길드와 견줄 수 있을 만한 비슷한 체급의 국내 길드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현은 가볍게 그의 팔목을 낚아채고는 벽으로 내다꽂았다.
콰아아앙!
“커억……!”
벽에 내다꽂힌 남자가 거품을 물고서 기절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쯤 벽에 박히다시피 한 그의 모습.
그러자 깜짝 놀란 동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주먹을 뻗던 B급 헌터를 잡아채 저렇게 내던질 정도라니 완력이 엄청났다.
패도 길드의 비밀 지부라는 것도 알고 들어온 데다, 이런 실력을 가진 녀석이라니.
우연히 들어온 헌터는 결코 아니었다.
목숨의 위협까지도 느낀 남자는 단숨에 품속의 단검까지 뽑아들었다.
“죽어!”
터억!
하지만 성현은 단검을 뻗으려던 남자의 팔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마치 돌덩이에 팔이 박히기라도 한 듯, 힘의 차이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 상태에서 성현과 눈이 마주친 남자의 몸은 뻣뻣이 굳고 말았다.
“괜히 소란 일으키기 싫으니까. 안으로 안내해.”
위압이 실린 성현의 말에 남자는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남자가 앞장 서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팔짱을 낀 채 그의 뒤를 따르는 성현.
굳이 등 뒤에 검을 들이밀지 않아도, 달아나거나 소리를 지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B급 헌터인 남자조차 식은땀을 줄줄 흐르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강한 최상위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등 뒤에 두기라도 한 듯한 감각.
이는 백귀야행 특성을 통해 군단의 군주들이라면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스의 위압감’ 특성을 잠시 빌린 덕분이다.
베테랑 헌터들이라면 보스들을 상대하느라 이런 위압감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이 정도로 격 차이가 크다면 의미가 없어졌다.
“이쪽이야!”
“저기 있다! 침입자야!”
하지만 성현이 얼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시점, 패도 길드의 헌터들이 소란을 듣고서 잔뜩 몰려들었다.
스릉!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무기를 뽑고서 성현을 에워쌌다.
고위 헌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소굴이다 보니, 방금 같이 대놓고 소란을 한바탕 피웠으니 이렇게 몰려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위압감을 풀풀 뿜어대는 성현을 상대로, 에워싼 길드원들조차 감히 먼저 덤벼들 생각을 못했다.
“정말 귀찮게 구네.”
성현은 바짝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성현의 얼굴을 알아본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자, 잠깐… 당신은……?”
국내 최대 세력인 이지스의 길드장이자 한국 최강의 헌터, 이성현.
한국 헌터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의 얼굴과 이름이었다.
“두 번 말하기 싫으니까, 당장 길드장한테 안내해.”
그의 말 한마디에 헌터들의 검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