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특성 개방 (2)
콰드드득!
괴물의 머리통을 뜯어낸 성현이 발을 내딛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는 옷차림새든 얼굴이든 꽤나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닦아도 얼마 가지 않아 덕지덕지 묻게 되는 핏자국과 진흙투성이 덕이다.
“후, 끝도 없네.”
땀을 닦아 낸 성현이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빠르게 지하 던전의 필드를 돌파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지간한 S급 던전들은 귀엽게만 보일 정도의 온갖 필드들을 겪어 왔지만, 지옥 늪지대는 한결 특별했다.
단순히 몬스터들뿐 아니라, 지형지물부터가 아주 고약한 장소라는 것.
시체 썩은 악취가 진동하며, 발이 푹푹 꺼지는 땅과 곳곳에 위치한 수렁 속엔 수많은 몬스터들이 두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 동굴과 넓은 강가, 수풀 사이, 어느 곳에서도 예외 없이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늪지대 전역에 나무들이 워낙에 높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다른 지형과는 달리 공중에선 제대로 된 정보들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성현에게 당장 급한 일은 이곳 지옥 늪지대 전역을 뒤집어엎어 가며 점령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특정 목표를 제거하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좋지 못한 일이다.
그나마 성현은 퀘스트와 함께 주어진 ‘퀘스트 마커’ 덕에 이 넓은 필드 전역을 뒤지진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이번 퀘스트 마커의 위치는 대략적인 범위만을 가리켜 줄 뿐.
목표의 코앞까지 그를 바래다주진 않았다.
“키이이이익!”
앞으로 전진하던 성현의 발치에서, 밟히게 된 식물의 줄기가 굉음을 토해 냈다.
식인 식물 계열의 몬스터가 커다란 몸체를 드러내며 성현에게 이빨을 드러내었고, 휘감기는 줄기들을 뻗었다.
하지만 성현에겐 지난 몇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이 겪은 경험이었고.
굳이 검을 치켜세우려 들지도 않았다.
콰아아아앙!
달려들던 식인식물에게서 강렬한 화염 폭발이 터져 나왔다.
화염구가 적중하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축축한 늪지대의 습기를 일순간 날려 버릴 정도로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언제나와 같이 강력한 화력을 뽐내는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의 화염 마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길 속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비명 소리는 멎지 않았고, 화염에 휩싸인 식물이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지직!
물론 단숨에 발을 박찬 이즈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몸통을 반으로 쩍 갈라 버리며 숨통을 끊었다.
그제야 불길에 휩싸인 채 요란한 비명을 토해 내던 식인 식물의 입이 닫혔다.
“하여간… 질긴 녀석들이라니까.”
이즈나의 공격 마법조차도 한 차례 버티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녀석.
지옥 늪지대에선 종종 이런 녀석들까지 튀어나오곤 했다.
끝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의 지옥 같은 밀집도에 더해, 붉은 기운을 머금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만으로 매우 강한 몬스터들의 수준.
어지간한 S급 헌터조차도 홀로 이 필드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목숨을 부지한 채 빠져나오긴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저나 또 처음 나타난 녀석이군. S급 몬스터들의 종류가 이렇게나 넘쳐난다는 걸 알면 학계에서 까무러치겠네.”
식인 식물의 몸을 슬쩍 건드리며 살펴본 성현이 중얼거렸다.
지금 그에게 달려든 식물계 몬스터는 그간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미발견 몬스터다.
하지만 지옥 늪지대에 들어선 지 몇 시간이 경과한 성현으로선 전혀 대수롭지도 않았다.
이젠 미발견 몬스터가 나타나는 게 슬슬 당연하게 여겨질 시점이었다.
늪지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여태 어느 국가의 던전에서도 발견이 되지 않은 종들이었다.
‘아마 이 이후의 필드들에서도 비슷하겠지. 여태껏 발견된 몬스터 중 이 정도 수준 이상의 몬스터 종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니까.’
열 번째 던전 이후로 급격히 강해지는 몬스터들의 수준.
이젠 사전 데이터나 대처법이 없는 미발견 몬스터와의 싸움에 익숙해져야 했다.
“주군, 고블린들에게서 연락이 닿았습니다. 수상한 장소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그래? 잘됐네. 그쪽부터 확인해 보자고.”
이즈나의 말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 방향에 흩어져 수색 작업을 하던 군주와 군단들.
그중 동쪽 구역을 뒤지고 있던 게아드가 이끄는 고블린들에게서 발견된 모양이었고, 성현은 주저 없이 그리로 향했다.
“여긴가?”
“키이이익!”
동쪽 구역에 닿은 성현을 격하게 반기는 고블린들.
그들은 성현을 곧장 수상한 장소로 안내했고, 곧 울창한 밀림 속 깊숙이 위치한 한 유적지의 입구에 닿았다.
“이건……?”
“크르르륵!”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아드가 고블린들과 함께 성현을 반겼다.
주변엔 그 사이 달려들기라도 한 건지, 적잖은 몬스터들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체들 정도야 이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성현은 한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숨겨져 있던 걸 잘도 찾았네.”
빽빽한 수풀 사이로 가려져 있던 입구.
마력이 흐르는 암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단단히 가로막은 채 서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아드는 성현의 의사를 묻는 듯 바라봤고, 성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콰아아아앙!
게아드의 커다란 몽둥이가 휘둘러지며, 굳게 잠긴 문을 통째로 박살 내었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박살난 문의 잔해들이 떨어져 나갔다.
“게아드, 너만 따라오고 고블린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어. 괜히 함께 따라왔다간 휩쓸리기만 할 테니까.”
“크르륵!”
지시를 내린 성현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군주급인 이즈나와 게아드만 그의 뒤를 따르는 모습.
굳이 수하들을 함께 대동하지 않는 것은 이 안에 있을 녀석의 정체에 대해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 마커가 갱신되었습니다!]
[임무 목표와 근접한 상태입니다.]
“맞췄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성현의 눈앞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정확히 맞췄다는 시스템의 알림이었다.
범위가 좁혀지며 갱신된 퀘스트 마커가 저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성현은 주변을 눈에 담았다.
‘역시 여태 봐 온 성소들과 거의 똑같은 양식이야.’
마치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키는 내부 구조.
과거,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생소한 것투성이였지만, 이젠 이 장소들도 눈에 익었다.
가디언들의 성소.
천장과 기둥, 벽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글자들은 이전에 보았던 것들과 똑같은 문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외에도 아주 유사한 양식의 장소였다.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어. 서두르자.’
성현은 주저 없이 성소로 더 깊숙이 발을 내딛었다.
퀘스트를 위해 제시간 안에 처리해야 했고, 상대의 정체도 짐작이 알아차린 와중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짝 곤두서 있었다.
츠츠츠츠츳!
기다란 통로를 걷던 도중,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소용돌이조차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온다……!’
콰아아앙!
안쪽에서 뻗어진 거대한 빛의 줄기.
파괴적인 마력이 일직선상의 통로를 통째로 휩쓸었고, 성현은 급하게 옆으로 몸을 내던졌다.
쿠당탕!
“주군……!”
“후, 난 괜찮아.”
찰나의 순간, 간신히 공격을 피해 낸 성현이다.
그는 몸을 빼낸 뒤 자신과 함께 걷고 있던 이즈나와 게아드까지 곁으로 소환해 내며 공격을 피하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공격의 속도는 미리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성현이건 이즈나건 간에 그대로 휩쓸렸을 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날아든 공격 마법은 그저 반갑다는 인사 정도에 불과했다.
쿠구구구구!
“키에에에엑!”
초토화된 통로 사이로 엄청난 거구의 괴물이 들어섰다.
석상과도 같은 거친 재질의 피부, 네 발 달린 짐승의 모습을 한 거대한 괴물이 성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주변 기둥들을 요란하게 박살 내며 들이닥치고 있는 녀석.
성현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한동안 나타나질 않아서 섭섭할 뻔했잖아.”
저번 ‘니아글리프’에 이은 세 번째 가디언.
일반 보스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의 등장이었고, 성현은 주저없이 특성을 활성화시켰다.
[군주, 다크엘프 로드 ‘카론’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매의 눈’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일순간에 성현의 눈빛이 바뀌었고, 그의 통찰안이 달려드는 가디언의 몸체를 꿰뚫었다.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예상했었지만, 놈의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의 양은 엄청났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놈들의 특성상, 한마디로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어지간한 공격으론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인 데다가, 웬만한 깊이의 상처 정도론 저 거대한 몸뚱이를 멈춰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저번에 상대했던 니아글리프를 아득히 넘어서는 강적이라는 것이다.
“후, 좋아.”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가디언의 모습에도, 성현의 입가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가디언이건 뭐건 결국엔 그는 사냥꾼이었고 녀석은 사냥감일 뿐.
군단 강화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 가디언들의 정수였고, 군단이 질적으로 보다 더 성장해야 하는 지금, 녀석만큼 훌륭한 사냥감이 따로 없었다.
새로운 특성이 걸린 퀘스트와 엮인, 거대한 정수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어디 한바탕 해보자고.”
츠츠츠츠츳!
성현의 등 뒤로 가디언 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늪지대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의 군주들이 소환되었다.
* * *
“아 진짜, 전화나 좀 제대로 받을 것이지! 메시지만 하나 달랑 남겨 놓으면 끝이야?”
이지스 길드의 본사.
회의장 밖에서 바삐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던 한승희가 분통을 터트렸다.
“하,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한승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당장 이 벽 건너편에 백룡과 유성 같은 7대 길드를 비롯해, 그 외 대형 길드와 정부 기관 등 국내 주요 세력의 장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자리를 마련하고서, 회의를 주도해야 할 성현이 자리를 비워 버렸다.
“조금만 기다려 봐라. 녀석이 이 자리가 중요하다는 걸 모를 리도 없을 테고.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럼 그 생각을 좀 말해 주고 가던가!”
같은 이지스의 간부, 성찬일의 말에 한승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가끔가다 이상한 기행을 벌이는 게 한두 번 일이 아니라곤 해도, 이렇게 중요할 때 사라져 버리다니.
지금 지하 던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따윈 전혀 모르는 그녀로선 당연히 황당할 뿐이다.
물론 당장 사태가 시급하고, 이미 모든 인원이 모여 있게 된 만큼 자리가 파하진 않고서 임시적으로 회의가 진행되고는 있었다.
하지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이지스 길드 측 대표가 빠져 버렸으니, 회의는 훨씬 어수선한 분위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잠깐…….”
그때, 성찬일의 시선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넌 안 느껴지는 거냐?”
“느끼긴 뭐가… 엇?”
곧이어 한승희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반사적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말끔하게 숨겨져 있던 헌터의 기척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철컥!
“수뇌부들이 다 모인 김에 한 번에 뿌리 뽑을 작정인 건가.”
성찬일은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어느 방향이라 할 것도 없이 사방의 거리에서 노골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기척들.
당장 드러난 것만 해도 빽빽한 숫자였다.
“하… 젠장. 이 길드장 자식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진 몰라도 빨리 돌아오라고.”
한승희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